[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역사산책] (2) 세종대왕 기념관 '조선 세종의 성덕과 위업'.. 물시계, 앙부일구, 측우기, 청계천 수표, 구 영릉 석물,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 주시경 스승 묘비 (2021.10.03)

푸레택 2021. 10. 3. 20:34

■ 세종대왕 기념관(世宗大王紀念館) 옥외공간을 둘러보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위치

물시계, 앙부일구, 측우기, 수표석,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 기념탑, 구영릉 석물, 주시경 스승 무덤과 묘비

◇ 세종대왕 기념관

세종대왕 기념관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기념관으로, 조선 세종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여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70년 11월 준공하고 1973년 10월 개관하였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현대식 건물로, 전시실, 강당, 연구실, 자료준비실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전시관은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 옥외 전시로 구성된다.

한글실은 세종 당시 펴낸 도서류를, 과학실은 조선 시대의 과학에 관련된 자료(금속활자 판자기, 측우기, 천문도 등)를 전시하고 있으며, 국악실은 각종 국악 악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일대기실은 세종대왕의 어진과 김학수가 수년 동안 그린 '세종대왕 일대기 그림'이 전시되어 있어 세종의 치덕을 살펴 볼 수 있다. 옥외에는 세종대왕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1호)와 구영릉석물(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42호), 수표(보물 838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출처: 다음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 물시계 (누각)

물시계는 아래물통에 물이 드는 대로 자가 떠올라서 자의 눈금을 가지고 시간을 알도록 한 것이다. 물시계의 역사는 이미 신라 성덕왕 때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 20년(1438)에는 더 정밀한 자격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물시계는 중종 31년(1536)에 주조된 것으로 현재 덕수궁에 보전되어 있는 것을 1/2로 줄여서 만든 것이다. (안내문)

안쪽에 눈금이 새겨지고 밑바닥에 작은 구멍을 가진 그릇에 물을 채워 이 물이 일정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이용한 시계로, 흐린 날과 밤에 사용할 수 없다는 해시계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BC 1400년경에 이집트에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며, BC 500년경에는 그리스에서도 물시계가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삼국사기 三國史記》의 기록을 보아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때에는 물시계인 누각을 만들었으며, 조선 태조 시기에는 경루를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다. 1434년 장영실이 세종의 명을 받아 자격루를 완성했는데, 이 시계는 여러 물시계 중 가장 정밀한 것이며, 자동시보장치가 장착되어 있어 시각을 자동으로 알려주었다.(출처: 다음백과)

◇ 오목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오목 해시계는 세종 16년(1434)에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처음으로 대중시계로 썼었다. 이 해시계는 오석에 반지름 30센티미터의 반구를 파고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을 꽂아 그 끝이 구의 중심에 오게 만든 것이다. 그 바늘 끝의 그림자의 위치는 진태양시와 계절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쓰는 시간은 (동경 135도 선 기준의 평균 태양시이므로 해시계보다) 31.8분+균시차만큼 빠르다. 그러므로 이 해시계의 눈금을 읽고 뒷면의 그래프에 나타난 시간을 더하면 우리나라의 상용시가 된다. (안내문)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청동으로 만든 반구형의 해시계이다. ‘솥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으로 앙부일구라고 불렸다. 앙부일구는 해그림자를 받는 시반(時盤)과 해그림자를 나타내는 영침(影針)이라는 바늘로 이루어졌다. 안쪽 바닥 시반에는 은입사로 시각선을 그렸고, 영침은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시반의 왼편에는 동지부터 하지[겨울→여름], 오른편에는 하지부터 동지[여름→겨울]까지의 24절기가 13줄의 가로선으로 새겨져 있다.

동지에는 해그림자가 가장 길고 하지에는 가장 짧으므로 영침의 그림자는 동지에 가장 바깥쪽 계절선에, 하지에는 가장 안쪽 계절선에 위치한다. 시각선은 해가 뜨는 묘시[(卯時), 5~7시)]부터 해가 지는 유시[(酉時), 17~19시]까지 7개가 있으며, 각 시각선 사이에는 1각[약 15분]을 뜻하는 8등분 된 선이 그려져 있다. 세종대에 처음 만들어져 사람의 통행이 많은 서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거리에 설치하였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 측우기(測雨器)

1441년(세종 23) 8월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필요성이 커짐으로써 측우기를 제작하고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이 당시의 측우기는 높이 32㎝, 지름 15㎝가량의 철제 원통이고, 주척의 길이는 약 21㎝이다. 이후 100여 년 동안은 측정이 제대로 시행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강우량 측정의 전통이 단절되고 세종 때 만든 측우기는 모두 유실되었다.

《세종실록》에 측우기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측정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주척을 써서 자·치·푼까지 정확하게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갠 일시를 기록하여 전국단위의 강우량이 정확히 기록·보존되었다.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조선에서 최초로 확립되었음에 큰 의의를 가진다. (출처:다음백과)

◇ 서울 청계천 수표(水標)

서울 청계천 수표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물의 높이를 재는 수표는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 세종 23년(1441년)에 청계천에 설치했다. 이에 대해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돌로 만든 수표에 척촌의 숫자를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수표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수표교 위쪽 가운데 물속에 있었는데, 청계천을 덮으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겼다가 1973년 지금의 자리로 가져왔다.

이 수표는 커다란 받침 위에 육각 기둥을 세우고 연꽃 문양을 새긴 덮개를 얹은 구조이다. 기둥은 위로 갈 수록 가늘어지며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육각의 긴 면을 향하게 하여 물살의 저항을 줄였다. 기둥에 10자까지 눈금을 파고 앞뒷면에는 숫자를 새겼는데, 눈금의 간격은 주척 1자로 평균 21.5센티미터이다. 수표교와 마주한 면에는 3자 6자 9자의 위치에 둥근 구멍을 파서 물의 높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기둥 하단과 받침돌에 청계천을 준설한 해인 계사경준과 기사대준이 새겨져 있다. 구조는 간단하지만 치밀한 설계와 조형미를 갖춘 문화재이다. (안내문)

수표(水標)는 하천의 수위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세종 때 제작한 측량기구다. 강우량을 측정하는 데는 측우기를 사용하는 방법 이외에 하천의 수위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도 있다. 비가 오면 하천의 수위가 올라가고, 가물면 하천의 수위가 내려간다는 자연현상에 주목한 방법이다. 1441년(세종 23)에는 측우기의 제작과 함께 청계천과 한강에 수표(水標)를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고대사회 이래로 각 문명권에서는 하천의 수위를 측량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였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물가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척도를 새겨서 수위의 변화를 측정하고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수칙(水則)’이었다. 세종대에 제작된 수표 역시 이와 같은 역사적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제작한 수표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수표의 역사적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은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는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와 장충단 공원에 있는 수표교(水標橋, 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세종대왕상 이전 기념비

세종대왕은 단기 3730.5.15(음력 4.10) 한양 준수방에서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어 스물두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모셔져 3783.4.8(음력 2.17) 쉰네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서른 두해 동안 백성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중하며 신의를 중히 여기는 도덕 의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고도의 과학 문화 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한편, 연구에 직접 참여하시고 주의깊게 살핌으로써 훈민정음 창제 반포를 비롯하여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도덕, 예술, 의학, 군사, 외교 등 그 어느 방면 할 것 없이 빛나는 문화를 창조하시어 꽃피웠으며 겨레의 생존발전에 영구히 다함없는 은덕을 끼치신 배달 겨레의 가장 위대한 성왕이시고 인류의 큰 스승이시다.

이 세종대왕 동상은 대왕의 위업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학계, 문화예술계, 교육계, 정계, 실업계 등 각계 명사들로 구성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 신문사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의 자문을 받고 국민들의 뜻을 모아 단기 4298.3월부터 주최하여 4301.5.4일 덕수궁 중화전 동쪽 광장에 모셨던 것이다. 이제 세종대왕 탄신 육백열다섯 돌을 맞이하여 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좀 더 성실히 기리고 대왕의 높은 뜻을 드높이고자 세종대왕동상이전위원회가 문화재청 등 정부의 도움을 받아 세종대왕기념사업의 중심전당인 세종대왕 기념관이 자리잡은 세종공원으로 옮겨 모셨다. ㅡ
옮겨 모신 날 단기 4345.7.17일(서기 2012년) 세종대왕동상이전위원회 (안내문)

세종대왕은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1397.5.15일에 태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시어 1450.4.8일에 54세로 승하하셨다. 대왕은 어릴 때 부터 총명하시고 성실근면 하셨으며 왕위에 계신 32년 동안 역대 군왕 중 가장 영명하신 성군으로 혼민정음의 창제를 비롯하여 활자를 개량하시어 많은 책을 편찬하는 한편, 해시계와 물시계, 천체관측기와 측우기 등 많은 과학기구를 발명하여 천체를 측정하였으며 또한 국악을 정비하고 전제평정소를 두어 전제세제를 정리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장려하는 등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및 과학면에서 많은 치적을 남기신 임금으로 실로 대왕은 문화창조의 시범자요, 학문의 대왕, 발명의 대왕으로 우리 겨레의 나아갈 길을 밝혀주신 성군이시다. 대왕을 모신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소재한 영릉이다.

◇ 세종대왕 기념탑

이 탑은 우리나라 역사상 으뜸가는 위인이요, 드높은 은인이신 세종성왕의 마음과 위업을 온전하게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기념탑이다. 세종성왕은 단기 3730년 음력 4.10일(서기 1397.5.15)에 태어나시어 스물 두살의 나이인 3751년 음력 8.10일(1418.9.18)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모셔져 32년 동안 나라의 바탕을 닦고 겨레문화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신뒤 3783년 음력 2.17(1450.4.3)일 쉰 네살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릴 때부터 그 용모가 단아하고 자질이 총명하셨으며, 성행이 돈독 근면할 뿐만 아니라 학문을 부지런히 하셨고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동기간의 우애도 누구에 못지 않으셨다. 임금 자리에 계시기 서른 두 해 동안 백성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믿음을 중히 여기는 도덕 의식을 뿌리로 하면서 차원 높은 과학 문화 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 또 연구에 직접 참여하여 과학 문화에 공적을 이루었으니 훈민정음의 창제, 참다운 국문학의 시작, 활자 인쇄의 개량발전, 학문의 숭상, 예절, 음악의 정리, 전세제도의 개혁정리, 측우기의 발명, 수표, 물시계, 해시계, 천체관측기들의 발명 제작, 역사, 천문, 지리, 도덕, 교육, 정치, 문자, 문학, 불교, 군사, 농사, 의약들에 관한 여러가지 저서들은 중요한 것이다.

서북면으로 4군을 두고 동북면으로 6진을 세웠으며 동남면으로 대마도 왜구를 정벌하여 경상도에 예속시키셨으니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에서 드높은 빛을 펼치어 국태 편안하고 과학문화가 찬란한 황금시대를 이룩하셨다. 세종성왕은 실로 겨레 의식을 통일, 문화를 독창, 학문을 애호하셨으며 예악을 제정하고 국토를 개척하셨고 과학을 발전시켜 민생을 살피신 사랑의 지도자이시다.

세종성왕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지 560돌을 맞이하여 온겨레와 기쁜 마음으로 성왕의 위업과 성덕을 기리고 자손 만대에 역사 창조의 이성과 슬기가 넘치도록 힘쓸 것을 다짐하며 더 나아가 성왕의 뜻이 온 누리에 펼쳐지도록 겨레 모두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운다. (안내문)

◇ 구 영릉(英陵) 석물(石物)

구영릉 석물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2호이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왕비인 소현왕후를 모신 왕릉이다. 처음에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길지가 아니라는 논의가 있어 예종 원년(1469)에 현재 영릉이 있는 여주로 옮겼다. 이 때 능을 치장했던 석물을 운반하기 어려워 가져가지 않고 땅에 묻었는데, 1970년대에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석양, 석마, 망주석, 장명등, 석인상, 혼유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 현재 남아 있는 석물은 1974년에 이 곳 세종대왕 기념사업회로 옮겨왔다. 품목과 수량이 처음과 다르고 일부 부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구 영릉 석물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와 석물 배치 방식, 그리고 제작기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안내문)

◇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

세종대왕기념관 진입로 중간쯤 오르막길에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각이 서 있다. 이 신도비는 보물 제1805호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는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52년(문종 2)에 세운 비석이다. 현재 비신(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이 심하게 부식되어 표면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 비문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비문을 지은 정인지와 글씨를 쓴 이용의 이름은 확인할 수 있다. 이수(건축물이나 공예품 따위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 비석의 머리, 궁전의 섬돌, 돌기둥에 많이 새긴다.)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으로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치게 조각되었다.

1469년(예종 1) 영릉을 경기도 여주로 옮기면서 서울 영릉에 있었던 신도비와 석물을 묻었다. 1691년(숙종 17)과 1738년(영조 14)에 영릉 신도비가 노출되었는데, 논의끝에 다시 묻어 두었다. 1974년 옛 영릉 터를 발굴하여 비신과 이수를 발견하였으나 비석의 받침돌은 찾지 못하였다. 1999년 2월에 받침돌을 새로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세웠고 2004. 6월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안내문)

◇ 주시경 스승 묘비

주시경 스승은 서기 1876.11.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태어나시어 19세 때인 1894년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고 이로부터 20년동안 우리말글 연구와 교육 및 한글운동을 하시다가 39세 되던 해인 1914.7.27일 작고하시어 유해는 서대문밖 수색 고택골(현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

그 뒤 한글학회가 1959.10.7일 고 주시경 선생 이장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켜 스승의 묘소 이장과 묘비건립을 서둘러 이전할 산지와 묘소가 마련되고 묘비(비문은 최현배님이 짓고 글씨는 정인승님이 씀)가 제작되어 '주시경 스승 이장식'과 '묘비제막식'을 1960.10.1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묘소에서 각계 인사들과 유족들의 참배하에 거행하였다.

스승의 묘소는 그뒤 1981.12.12일 국립묘지(현 서울시 동장구 현충로 65번지) 국가 제2 유공자 묘역으로 다시 옮겨 모실 때 묘비를 비롯한 석물은 옮기지 않고 그 옛 무덤터에 그대로 세워두었다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한글학회가 2008.7.31일 이 곳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2008.8.25 (안내문)


◇ 주시경 스승 무덤

말과 글에는 그 나라 민족의 혼이 배어있으며, 말이 없으면 나라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주시경 선생님은 평생을 한글연구와 나라사랑에 몸바치셨고, 주시경 선생님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와 한글이 빛나게 되었습니다

수천년간 중국글자인 한문을 사용한 한국인들이었지만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과 평생을 우리말 우리글 사랑에 바치신 주시경 선생님의 국어문법연구로 한글은 더 나아갈 수 있게됬고, 이로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쉽고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글학회에서 세운 주시경 스승 묘비

△ 주시경 선생님 묘비명 / 이은상 선생 지음

한힌샘 겨레의 스승
이 땅에 태어나시어
한평생 오직 한 길 
우리 말 글 키우시니 
그 공덕 어디다 비기리까. 
해달같이 빛나옵니다. 

겨우 서른 여덟 해 
짧은 한 뉘 사시는 것을 
자기 몸은 돌보지 않고
겨레 위해 바치신 이라.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 그리워집니다.

/ 사진촬영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 기념관 (2021.10.03)

https://blog.daum.net/mulpure/15856991

 

[역사산책] (1) 세종대왕 기념관,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탐방 (2021.10.03)

■ 세종대왕 기념관, 영휘원과 숭인원 탐방 오늘은 개천절, 국립산림과학원 홍릉숲의 가을꽃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홍릉숲은 식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식물배움터이고 일반시민들

blog.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