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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3) 대한제국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사적지 '영휘원'과 '숭인원' 탐방 (2021.10.03)

푸레택 2021. 10. 3. 20:37

대한제국 망국의 한이 담겨 있는 사적지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

대한민국 사적 제361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위치

영휘원(永徽園)은 조선 제26대 고종의 후궁이며 의민황태자아 생모인 순헌황귀비(1854~1911) 엄씨의 원이다. 숭인원(崇仁園)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의 아들 원손 이진(1921~1922)의 원이다. 원(園)이란 왕의 사친 또는 왕세자와 그 빈의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 (안내문)

◇ 영휘원과 숭인원

영휘원은 대한제국 1대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왕의 사친, 왕세자, 왕세자빈, 황태자, 황태자비 등의 무덤을 의미)이고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첫째 아들인 이진 원손(1921~1922)의 원이다. 영휘원 안에는 조선왕조 제 26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인 영휘원과 영친왕의 첫째 아들의 원인 숭인원이 있다. 엄씨의 위패는 현재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모셔져 있다. 영휘원이 있는 이 지역은 원래 고종 황제의 비인 명성왕후 민씨의 홍릉이었으나, 1919년 고종의 장례 때 함께 묻기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현 홍유릉에 이장하였다.

영휘원(永徽園)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후비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이다. 건립시기는 1911년이고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이다. 순헌황귀비는 엄진삼의 딸로 광무1년(1897)에 영친왕을 낳았고 광무7년(1903)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신교육에 관심을 두어 양정의숙과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의 설립을 도왔다. 1911년에 덕수궁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원을 조성하였다.

이진 원손은 1921년에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 순종황제의 명으로 현재의 자리에 원을 조성하였다. 비각내부에 있는 원표석에는 '순헌귀비 영휘원'이라고 글이 새겨져 있다.
영휘원은 조선시대의 원소제도에 맞게 조성하여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세웠고 원침에는 호석(둘레돌)을 둘렀다. 숭인원은 영휘원과 비슷하게 조성하였으나 원침에 호석과 석양을 생략하였다. (안내문)

사적 제361호. 지정면적 5만 5015㎡. 한 묘역 안에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다. 이곳에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이 있었다. 1919년 고종이 죽었을 때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남양주시 금곡동)로 천장(遷葬: 묘를 옮김.)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곳은 ‘홍릉’이라 불리고 있다.

영휘원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친(私親)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소(園所: 왕가 산소의 다른 이름)이다. 순헌귀비는 증찬성 진삼(鎭三)의 딸로 1854년(철종 5)에 태어나 1859년에 입궁해 민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당하자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을 시봉(侍奉)하였으며, 1897년 영왕을 낳고 1903년 귀비로 책봉되었다.

엄귀비는 양정의숙·진명여학교·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 여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11년 7월에 죽었다. 같은 해 8월에 안장하고 원호(園號)를 영휘라고 하였으며, 위패는 덕수궁 영복당(永福堂)에 봉안되었다가 경복궁 서북 측에 있는 칠궁(七宮)으로 이안(移安)되었다. 숭인원은 영친왕과 이방자(李方子) 사이에서 태어난 진(晋)의 원소이다. 진은 1921년 8월에 태어나 그 이듬해 5월에 죽었다.

두 원의 묘역시설로는 곡장(曲牆: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상설(象設, 石虎·石馬)·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석마(石馬)·홍살문(紅箭門)·정자각(丁字閣)·비각(碑閣)·제실(祭室)·우물[靈泉]·사초지(莎草地: 오래 되거나 허물어진 곳을 떼로 잘 입혀 다듬은 곳)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담장 밖 북쪽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관(世宗大王紀念事業會館)이 있으며, 구영릉(舊英陵, 서울 서초구 內谷洞 獻仁陵)에서 수습해온 신도비(神道碑)와 능호석(陵護石) 등이 전시되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의 첫째 아들인 이진 원손의 원이다. 원손은 의민황태자(영친왕)과 황태자비 이씨(방자)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듬해에 황태자 내외와 함께 잠시 귀국하였으나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급사하였다. 순종황제가 원손의 사망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크게 장례를 치루도록 명을 내렸고 지금의 자리에 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봉분(원침)에는 석마, 혼유석,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등을 배치시켰고 원침 아래부분에는 비각과 정자각 등을 세웠다. 봉분과 석물의 크기는 다른 원에 비해서 작게 1922년에 만들었다. 비각 내부에는 원표석이 있는데 여기에는 원손 숭인원이라고 글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 영휘원 / 숭인원(홍릉)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길 90
대한제국 황실의 비극적 역사

홍릉은 원래 명성황후의 무덤이었다. 대대로 왕가의묘지로 쓰이던 터였으며 명성황후의 무덤이 안장된 후 홍릉이라 불렀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남양주시로 옮겼지만 여전히 홍릉이란 이름이 따라다닌다. 홍릉에는 현재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다. 영휘원(永徽園)은 고종황제의 후궁이었던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이다. 원은 왕의 사친 왕세자와 그 비의무덤을 부르는 이름이다.

순헌황귀비는 철종 5년태어나 철종 10년에 궁궐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모시는시위상궁이 됐다. 을미사변(1895) 후에는 아관파천 때 고종황제를 보필했고, 광무 원년에는의민황태자(영친왕)을 낳아 귀인에 봉해졌다. 그리고 광무 7년에는 황귀비로 책봉됐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명성황후가 떠난 그 자리를 대신하는 셈이다.

옛 홍릉에는 영휘원 외에 숭인원(崇仁園)도 있다. 고종황제의 일곱번째 아들 의민황태자의 장자인 이진의 묘다. 이진은 의민황태자와 일본인 황태자비 마사코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로 순헌황귀비의 손자인 셈이다. 의민황태자 내외의 귀국 하루 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순종황제의 명으로 홍릉에 묻힌 것이다. 부모보다 일찍 죽으면 불효라 했지만 어린 진의 억울한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순종황제의 배려였다.

◇ 순헌귀비 엄씨와 그 손자가 잠들다

서울 한복판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은 대한제국 망국의 한이 담겨 있는 사적지다. 영휘원에 들어서면 영휘원에 앞서 숭인원을 만난다. 숭인원은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무덤을 원으로 만든 것이다. 비록 어린 원자의 무덤이지만능원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다만 강이 낮고 봉분이나 석물들이 어린 아이의 무덤임을 알려줄 뿐이다. 빛바랜 정자각의 단청에도 그 슬픔이 깃든 듯하다. 동편에는 비각이 서 있는데 그 안의 비석이 한층 외롭게 느껴진다.

숭인원에서 숲길을 지나면 영휘원에 이른다. 그사이에는 제사 때 물을 긷는 제정이 곡장에 둘러싸인 풍경도 만난다. 영휘원 정자각은 아름다운 오색단청을 자랑한다. 숭인원과 대비될 만큼 또렷한 색감을가진다. 오색단청은 미관뿐만 아니라 일반 건축물과의 차별화를 위해 만든 것으로 궁전이나 법당의 권위를 나타낸다. 음양오행 사상을 중심으로 길흉화복 기원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의 비극이 서려 있어 슬픔이 묻어나며 숭인원에 비해 화려한색감은 그 슬픔을 애써 감추려는 듯하다. 순헌황귀비는 살아생전에 근대화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도 영휘원 주변에는 과학기술원을 비롯해 대학교, 각종연구원, 벤처벨리가 영휘원의 뜻처럼 아름답게 에워싸며 원을 그리고 있다.

숭인원에는 채 한 살도 채우지 못한 의민황태자의 맏아들 이진이 묻혔다.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와 정자각 영휘원과 숭인원 사이에 있는 제정(祭井)은 제사 때 사용할 물을 긷는 우물이다. 홍창살 너머 숭인원의 전경은 영휘원과 그 모습이 흡사하다. 홍릉은 남양주시 금곡으로 옮겼고 지금은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영휘원은 조선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이고, 영휘원 경내에 있는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아들이자 순헌황귀비의 손자 이진의 무덤이다.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는 엄진삼의 딸로 철종5년에 태어났다. 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아 시위상궁이 되었으나, 1885년(고종22) 32세에 고종의 승은을 입자 대노한 명성황후에 의해 강제 출궁을 당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의 명으로 다시 입궁하여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아관파천 때 상궁이었던 황귀비는 며칠동안 가마 2채로 궁을 출입하며 고종과 순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시켰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후 황태자(영친왕)을 낳았고 이후 귀인, 순빈, 순비를 거쳐 1903년(광무 7)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엄씨는 선교사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특히 여성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명신(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양정의숙(양정중고교)이 재정난에 허덕이자 땅 2백만평과 내탕금을 기증하는 등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 데 역할을 하였다. 경술국치후 1911년에 덕수궁 즉조당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순헌, 궁호를 덕안궁, 원호를 영휘원이라 하였다.

◇ 원손 이진(李晉, 1921~1922)

이진
(李晉)은 1921년 8월 일본에서 탄생하였다. 이듬해 의민황태자 내외는 1922년 8개월 된 황손 진을 순종에게 보이고 혼인보고도 할 생각으로 귀국한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 8개월 된 아기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여 독살일 거라 했지만 일제는 배앓이로 죽었다고 발표했다. 일제가 황실의 손을 끊으려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8개월이란 짧은 생을 살다간 어린 아기 진은 5월 17일 순종황제의 명에 의해 원손의 예로 묘(墓)는 원(園)으로 조성하여 예장하고 친할머니인 순헌황귀비 엄씨(엄귀비)의 묘소 건너편에 안장되었다. 원호(園號)를 숭인원(崇仁園)이라 하였다. 숭인원(崇仁園)은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 영휘원(永徽園) 내에 있으며, 영휘원과 같이 사적 제361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

의민황태자(1897~1970)

의민황태자(1897~1970)는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비 엄씨이다. 영친왕(英親王) 또는 영왕(英王)이라 칭한다. 순종과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1900년 영왕으로 봉해졌으며 1907년 순종황제 때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강제로 유학길에 올라 일본에 인질로 잡혔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순종이 폐위되어 이왕(李王)이 됨에 따라, 황태자였던 영왕 역시 단순히 왕세자로 격하되었다. 1920년 일본 왕족의 맏딸인 마사꼬(한국명 方子)와 강제로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는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렀으나 역사적으로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에 있다. (다음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관람 안내

2~5월, 9~10월 09:00~18:00
6~8월 09:00~18:30
11~10월 09:00~17:30
정기 휴일 : 매주 월요일
관람 요금 : 1,000원
교통 안내
ㆍ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2출구 도보 15분, 6호선 고려대역 3번 출구 도보 15분
ㆍ버스 201, 1226, 1227 (홍릉사거리 하차)

ㅡ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안내문


/ 사진촬영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영휘원과 숭인원 (2021.10.03)

https://blog.daum.net/mulpure/15856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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