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역사산책] (1) 세종대왕 기념관,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탐방 (2021.10.03)

푸레택 2021. 10. 3. 20:32

△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사진 촬영 2021.10.03)

세종대왕 기념관, 영휘원과 숭인원 탐방

오늘은 개천절, 국립산림과학원 홍릉숲의 가을꽃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홍릉숲은 식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식물배움터이고 일반시민들에게는 휴식의 공간이다. 해마다 몇 차례씩 찾아가곤 하는데 계절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다양한 나무와 풀꽃들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 아뿔싸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홍릉 숲 정문에 “강풍으로 인한 시설물 피해로 복구작업을 위해 이번 주 홍릉숲은 개방하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아쉬움을 달래며 홍릉숲 바로 앞에 위치한 세종대왕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굳게 닫힌 국립산림과학원 홍릉숲 (사진 촬영 2021.10.03)
△ 홍릉숲 국립산림과학원 (사진 촬영 2021.10.03)
△ 홍릉 숲 정문에 “강풍으로 인한 시설물 피해로 복구작업을 위해 이번 주 홍릉숲은 개방하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사진 촬영 2021.10.03)
△ 홍릉 세종대왕기념관 정문 (사진 촬영 2021.10.03)
△ 세종대왕기념관 정문에 자리잡은 나무, 두충 (사진 촬영 2021.10.03)
△ 세종대왕기념관 세종대왕 동상 (사진 촬영 2021.10.03)

◇ 세종대왕기념관 옥외 전시물 관람

세종대왕기념관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 왕 중 가장 뛰어난 성군 세종대왕의 위업과 성덕을 추모하고 이를 영원히 기념·보존하기 위해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 세종대왕기념관은 코로나19 때문인지 장기간 폐쇄로 관람객을 받지 않고 있다. 다행히 기념관 옥외 공간은 개방하고 있어 세종대왕 동상과 세종대왕 기념비, 세종성왕 기념탑, 서울 세종 영
릉 신도비, 영릉 석물을 두루 살펴보았다. 또한 물시계와 앙부일구, 측우기, 수표석 등 세종 때 만들어진 과학 전시물도 관람하고 국어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주시경 스승의 묘비도 살펴보았다. 청례대중궁이라는 간판이 붙은 아름다운 건물은 결혼식장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 세종대왕 동상 (사진 촬영 2021.10.03)
△ 세종대왕기념관 전경 (사진 촬영 2021.10.03)

◇ 세종대왕 기념관의 전경 및 풍경

세종대왕 기념관에서는 세종대왕이 남긴 역사의 흔적들과 민족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을 볼 수 있다. 기념관 옥외에는 덕수궁에서 옮겨온 세종대왕 동상이 있고, 세종대왕 재임 시절에 발명한 측우기와 해시계, 물시계 등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세종대왕 서울 영릉에 세워져 있던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와 석물들이 있다. 1469년(예종 1년) 세종대왕의 묘를 강남구 내곡동에서 경기도 여주로 옮기면서 서울 영릉에 있던 신도비와 석물들은 그 자리에 묻었다. 이 신도비와 석물들은 1970년대에 발굴하여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세종대왕신도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1호이고, 구 영릉 석물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 수표는 보물 제838호이다.

△ 물시계 (사진 촬영 2021.10.03)
△ 물시계 (사진 촬영 2021.10.03)

◇ 물시계 (누각)

물시계는 아래물통에 물이 드는 대로 자가 떠올라서 자의 눈금을 가지고 시간을 알도록 한 것이다. 물시계의 역사는 이미 신라 성덕왕 때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 20년(1438)에는 더 정밀한 자격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물시계는 중종 31년(1536)에 주조된 것으로 현재 덕수궁에 보전되어 있는 것을 1/2로 줄여서 만든 것이다. (안내문)

안쪽에 눈금이 새겨지고 밑바닥에 작은 구멍을 가진 그릇에 물을 채워 이 물이 일정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이용한 시계로, 흐린 날과 밤에 사용할 수 없다는 해시계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BC 1400년경에 이집트에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며, BC 500년경에는 그리스에서도 물시계가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삼국사기 三國史記》의 기록을 보아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때에는 물시계인 누각을 만들었으며, 조선 태조 시기에는 경루를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다. 1434년 장영실이 세종의 명을 받아 자격루를 완성했는데, 이 시계는 여러 물시계 중 가장 정밀한 것이며, 자동시보장치가 장착되어 있어 시각을 자동으로 알려주었다.(출처: 다음백과)

△ 오목 해시계 앙부일구 (사진 촬영 2021.10.03)
△ 오목 해시계 앙부일구 (사진 촬영 2021.10.03)

◇ 오목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오목 해시계는 세종 16년(1434)에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처음으로 대중시계로 썼었다. 이 해시계는 오석에 반지름 30센티미터의 반구를 파고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을 꽂아 그 끝이 구의 중심에 오게 만든 것이다. 그 바늘 끝의 그림자의 위치는 진태양시와 계절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쓰는 시간은 (동경 135도 선 기준의 평균 태양시이므로 해시계보다) 31.8분+균시차만큼 빠르다. 그러므로 이 해시계의 눈금을 읽고 뒷면의 그래프에 나타난 시간을 더하면 우리나라의 상용시가 된다. (안내문)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청동으로 만든 반구형의 해시계이다. ‘솥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으로 앙부일구라고 불렸다. 앙부일구는 해그림자를 받는 시반(時盤)과 해그림자를 나타내는 영침(影針)이라는 바늘로 이루어졌다. 안쪽 바닥 시반에는 은입사로 시각선을 그렸고, 영침은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시반의 왼편에는 동지부터 하지[겨울→여름], 오른편에는 하지부터 동지[여름→겨울]까지의 24절기가 13줄의 가로선으로 새겨져 있다.

동지에는 해그림자가 가장 길고 하지에는 가장 짧으므로 영침의 그림자는 동지에 가장 바깥쪽 계절선에, 하지에는 가장 안쪽 계절선에 위치한다. 시각선은 해가 뜨는 묘시[(卯時), 5~7시)]부터 해가 지는 유시[(酉時), 17~19시]까지 7개가 있으며, 각 시각선 사이에는 1각[약 15분]을 뜻하는 8등분 된 선이 그려져 있다. 세종대에 처음 만들어져 사람의 통행이 많은 서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거리에 설치하였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 측우기 (사진 촬영 2021.10.03)

◇ 측우기(測雨器)

1441년(세종 23) 8월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필요성이 커짐으로써 측우기를 제작하고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이 당시의 측우기는 높이 32㎝, 지름 15㎝가량의 철제 원통이고, 주척의 길이는 약 21㎝이다. 이후 100여 년 동안은 측정이 제대로 시행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강우량 측정의 전통이 단절되고 세종 때 만든 측우기는 모두 유실되었다.

《세종실록》에 측우기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측정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주척을 써서 자·치·푼까지 정확하게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갠 일시를 기록하여 전국단위의 강우량이 정확히 기록·보존되었다.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조선에서 최초로 확립되었음에 큰 의의를 가진다. (출처:다음백과)

△ 서울 청계천 수표석 (사진 촬영 2021.10.03)

◇ 서울 청계천 수표(水標)

서울 청계천 수표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물의 높이를 재는 수표는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 세종 23년(1441년)에 청계천에 설치했다. 이에 대해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돌로 만든 수표에 척촌의 숫자를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수표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수표교 위쪽 가운데 물속에 있었는데, 청계천을 덮으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겼다가 1973년 지금의 자리로 가져왔다.

이 수표는 커다란 받침 위에 육각 기둥을 세우고 연꽃 문양을 새긴 덮개를 얹은 구조이다. 기둥은 위로 갈 수록 가늘어지며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육각의 긴 면을 향하게 하여 물살의 저항을 줄였다. 기둥에 10자까지 눈금을 파고 앞뒷면에는 숫자를 새겼는데, 눈금의 간격은 주척 1자로 평균 21.5센티미터이다. 수표교와 마주한 면에는 3자 6자 9자의 위치에 둥근 구멍을 파서 물의 높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기둥 하단과 받침돌에 청계천을 준설한 해인 계사경준과 기사대준이 새겨져 있다. 구조는 간단하지만 치밀한 설계와 조형미를 갖춘 문화재이다. (안내문)

△ 서울 청계천 수표석 (사진 촬영 2021.10.03)

수표(水標)는 하천의 수위 변화 측량기구

수표(水標)는
하천의 수위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세종 때 제작한 측량기구다. 강우량을 측정하는 데는 측우기를 사용하는 방법 이외에 하천의 수위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도 있다. 비가 오면 하천의 수위가 올라가고, 가물면 하천의 수위가 내려간다는 자연현상에 주목한 방법이다. 1441년(세종 23)에는 측우기의 제작과 함께 청계천과 한강에 수표(水標)를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고대사회 이래로 각 문명권에서는 하천의 수위를 측량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였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물가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척도를 새겨서 수위의 변화를 측정하고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수칙(水則)’이었다. 세종대에 제작된 수표 역시 이와 같은 역사적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제작한 수표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수표의 역사적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은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는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와 장충단 공원에 있는 수표교(水標橋, 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세종대왕 동상 이전 기념비 (사진 촬영 2021.10.03)

◇ 세종대왕 동상 이전 기념비

세종대왕은 단기 3730.5.15(음력 4.10) 한양 준수방에서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어 스물두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모셔져 3783.4.8(음력 2.17) 쉰네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서른 두해 동안 백성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중하며 신의를 중히 여기는 도덕 의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고도의 과학 문화 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한편, 연구에 직접 참여하시고 주의깊게 살핌으로써 훈민정음 창제 반포를 비롯하여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도덕, 예술, 의학, 군사, 외교 등 그 어느 방면 할 것 없이 빛나는 문화를 창조하시어 꽃피웠으며 겨레의 생존발전에 영구히 다함없는 은덕을 끼치신 배달 겨레의 가장 위대한 성왕이시고 인류의 큰 스승이시다.

이 세종대왕 동상은 대왕의 위업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학계, 문화예술계, 교육계, 정계, 실업계 등 각계 명사들로 구성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 신문사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의 자문을 받고 국민들의 뜻을 모아 단기 4298.3월부터 주최하여 4301.5.4일 덕수궁 중화전 동쪽 광장에 모셨던 것이다. 이제 세종대왕 탄신 육백열다섯 돌을 맞이하여 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좀 더 성실히 기리고 대왕의 높은 뜻을 드높이고자 세종대왕동상이전위원회가 문화재청 등 정부의 도움을 받아 세종대왕기념사업의 중심전당인 세종대왕 기념관이 자리잡은 세종공원으로 옮겨 모셨다. ㅡ
옮겨 모신 날 단기 4345.7.17일(서기 2012년) 세종대왕동상이전위원회 (안내문)

△ 세종대왕 동상 (사진 촬영 2021.10.03)

◇ 겨레의 스승, 성군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태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시어(1397.5.15) 54세로 승하하셨다.(1450.4.8) 대왕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시고 성실근면하셨으며 왕위에 계신 32년 동안 역대 군왕 중 가장 영명하신 성군으로 훈민정음의 창제를 비롯하여 활자를 개량하시어 많은 책을 편찬하는 한편, 해시계와 물시계, 천체관측기와 측우기 등 많은 과학기구를 발명하여 천체를 측정하였으며 또한 국악을 정비하고 전제평정소를 두어 전제세제를 정리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장려하는 등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및 과학면에서 많은 치적을 남기신 임금으로 실로 대왕은 문화창조의 시범자요, 학문의 대왕, 발명의 대왕으로 우리 겨레의 나아갈 길을 밝혀주신 성군이시다. 대왕을 모신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소재한 영릉이다.

△ 세종성왕 기념탑 (사진 촬영 2021.10.03)

◇ 세종성왕 기념탑

이 탑은 우리나라 역사상 으뜸가는 위인이요, 드높은 은인이신 세종성왕의 마음과 위업을 온전하게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기념탑이다. 세종성왕은 단기 3730년 음력 4.10일(서기 1397.5.15)에 태어나시어 스물 두살의 나이인 3751년 음력 8.10일(1418.9.18)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모셔져 32년 동안 나라의 바탕을 닦고 겨레문화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신뒤 3783년 음력 2.17(1450.4.3)일 쉰 네살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릴 때부터 그 용모가 단아하고 자질이 총명하셨으며, 성행이 돈독 근면할 뿐만 아니라 학문을 부지런히 하셨고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동기간의 우애도 누구에 못지 않으셨다. 임금 자리에 계시기 서른 두 해 동안 백성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믿음을 중히 여기는 도덕 의식을 뿌리로 하면서 차원 높은 과학 문화 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 또 연구에 직접 참여하여 과학 문화에 공적을 이루었으니 훈민정음의 창제, 참다운 국문학의 시작, 활자 인쇄의 개량발전, 학문의 숭상, 예절, 음악의 정리, 전세제도의 개혁정리, 측우기의 발명, 수표, 물시계, 해시계, 천체관측기들의 발명 제작, 역사, 천문, 지리, 도덕, 교육, 정치, 문자, 문학, 불교, 군사, 농사, 의약들에 관한 여러가지 저서들은 중요한 것이다.

◇ 겨레 모두의 정성을 모아 탑을 세우다

서북면으로 4군을 두고 동북면으로 6진을 세웠으며 동남면으로 대마도 왜구를 정벌하여 경상도에 예속시키셨으니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에서 드높은 빛을 펼치어 국태 편안하고 과학문화가 찬란한 황금시대를 이룩하셨다. 세종성왕은 실로 겨레 의식을 통일, 문화를 독창, 학문을 애호하셨으며 예악을 제정하고 국토를 개척하셨고 과학을 발전시켜 민생을 살피신 사랑의 지도자이시다.


세종성왕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지 560돌을 맞이하여 온겨레와 기쁜 마음으로 성왕의 위업과 성덕을 기리고 자손 만대에 역사 창조의 이성과 슬기가 넘치도록 힘쓸 것을 다짐하며 더 나아가 성왕의 뜻이 온 누리에 펼쳐지도록 겨레 모두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운다. (안내문)

△ 결혼식장으로 사용한다는 청례대중궁 (사진 촬영 2021.10.03)
△ 구 영릉 석물 (사진 촬영 2021.10.03)
△ 구 영릉 석물 (사진 촬영 2021.10.03)
△ 구 영릉 석물 (사진 촬영 2021.10.03)

◇ 구 영릉(英陵) 석물(石物)

구영릉 석물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2호이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왕비인 소현왕후를 모신 왕릉이다. 처음에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길지가 아니라는 논의가 있어 예종 원년(1469)에 현재 영릉이 있는 여주로 옮겼다. 이 때 능을 치장했던 석물을 운반하기 어려워 가져가지 않고 땅에 묻었는데, 1970년대에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석양, 석마, 망주석, 장명등, 석인상, 혼유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 현재 남아 있는 석물은 1974년에 이 곳 세종대왕 기념사업회로 옮겨왔다. 품목과 수량이 처음과 다르고 일부 부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구 영릉 석물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와 석물 배치 방식, 그리고 제작기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안내문)

△ 세종대왕기념관 쪽에서 본 영휘원 (사진 촬영 2021.10.03)
△ 세종대왕기년관 쪽에서 본 영휘원 정자각 (사진 촬영 2021.10.03)
△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 (사진 촬영 2021.10.03)

◇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

세종대왕기념관 진입로 중간쯤 오르막길에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각이 서 있다. 이 신도비는 보물 제1805호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는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52년(문종 2)에 세운 비석이다. 현재 비신(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이 심하게 부식되어 표면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 비문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비문을 지은 정인지와 글씨를 쓴 이용의 이름은 확인할 수 있다. 이수(건축물이나 공예품 따위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 비석의 머리, 궁전의 섬돌, 돌기둥에 많이 새긴다.)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으로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치게 조각되었다.

1469년(예종 1) 영릉을 경기도 여주로 옮기면서 서울 영릉에 있었던 신도비와 석물을 묻었다. 1691년(숙종 17)과 1738년(영조 14)에 영릉 신도비가 노출되었는데, 논의끝에 다시 묻어 두었다. 1974년 옛 영릉 터를 발굴하여 비신과 이수를 발견하였으나 비석의 받침돌은 찾지 못하였다. 1999년 2월에 받침돌을 새로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세웠고 2004. 6월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안내문)

△ 한글한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주시경 스승의 묘비 (사진 촬영 2021.10.03)

◇ 주시경 스승 묘비

주시경 스승은 서기 1876.11.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태어나시어 19세 때인 1894년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고 이로부터 20년동안 우리말글 연구와 교육 및 한글운동을 하시다가 39세 되던 해인 1914.7.27일 작고하시어 유해는 서대문밖 수색 고택골(현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

그 뒤 한글학회가 1959.10.7일 고 주시경 선생 이장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켜 스승의 묘소 이장과 묘비건립을 서둘러 이전할 산지와 묘소가 마련되고 묘비(비문은 최현배님이 짓고 글씨는 정인승님이 씀)가 제작되어 '주시경 스승 이장식'과 '묘비제막식'을 1960.10.1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묘소에서 각계 인사들과 유족들의 참배하에 거행하였다.

스승의 묘소는 그뒤 1981.12.12일 국립묘지(현 서울시 동장구 현충로 65번지) 국가 제2 유공자 묘역으로 다시 옮겨 모실 때 묘비를 비롯한 석물은 옮기지 않고 그 옛 무덤터에 그대로 세워두었다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한글학회가 2008.7.31일 이 곳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2008.8.25 (안내문)

◇ 한힌샘 주시경 스승의 무덤

말과 글에는 그 나라 민족의 혼이 배어있으며, 말이 없으면 나라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주시경 선생님은 평생을 한글연구와 나라사랑에 몸바치셨고, 주시경 선생님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와 한글이 빛나게 되었습니다

수천년간 중국글자인 한문을 사용한 한국인들이었지만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과 평생을 우리말 우리글 사랑에 바치신 주시경 선생님의 국어문법연구로 한글은 더 나아갈 수 있게됬고, 이로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쉽고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글학회에서 세운 주시경 스승 묘비

△ 주시경 선생님 묘비명 / 이은상 선생 지음

한힌샘 겨레의 스승
이 땅에 태어나시어
한평생 오직 한 길
우리 말 글 키우시니
그 공덕 어디다 비기리까.
해달같이 빛나옵니다.

겨우 서른 여덟 해
짧은 한 뉘 사시는 것을
자기 몸은 돌보지 않고
겨레 위해 바치신 이라.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 그리워집니다.

△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사진 촬영 2021.10.03)

■ 대한제국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사적지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

대한민국 사적 제361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위치

세종대왕기념관 옥외 전시물을 둘러 본 후 울타리 하나로 이웃하고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을 찾았다. 영휘관과 숭인원은
대한제국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사적지(제361호)다.
영휘원(永徽園)은 조선 제26대 고종의 후궁이며 의민황태자의 생모인 순헌황귀비(1854~1911) 엄씨의 원이다. 숭인원(崇仁園)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의 아들 원손 이진(1921~1922)의 원이다. 원(園)이란 왕의 사친(私親) 또는 왕세자(王世子)와 그 빈(嬪)의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는 엄진삼의 딸로 철종5년에 태어났다. 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아 시위상궁이 되었으나, 1885년(고종22) 32세에 고종의 승은을 입자 대노한 명성황후에 의해 강제 출궁을 당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의 명으로 다시 입궁하여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아관파천(1896년) 때 상궁이었던 황귀비는 며칠동안 가마 2채로 궁을 출입하며 고종과 순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시켰다.

◇ 여성의 신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후 황태자(영친왕)을 낳았고 이후 귀인, 순빈, 순비를 거쳐 1903년(광무 7)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엄씨는 선교사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특히 여성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명신(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양정의숙(양정중고교)이 재정난에 허덕이자 땅 2백만평과 내탕금을 기증하는 등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 데 역할을 하였다. 경술국치후 1911년에 덕수궁 즉조당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순헌, 궁호를 덕안궁, 원호를 영휘원이라 하였다.

△ 영휘원 순헌황귀비 재실 (사진 촬영 2021.10.03)

◇ 원손 이진(李晉, 1921~1922)

이진(李晉)은 1921년 8월 일본에서 탄생하였다. 이듬해 의민황태자 내외는 1922년 8개월 된 황손 진을 순종에게 보이고 혼인보고도 할 생각으로 귀국한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 8개월 된 아기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여 독살일 거라 했지만 일제는 배앓이로 죽었다고 발표했다. 일제가 황실의 손을 끊으려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8개월이란 짧은 생을 살다간 어린 아기 진은 5월 17일 순종황제의 명에 의해 원손의 예로 묘(墓)는 원(園)으로 조성하여 예장하고 친할머니인 순헌황귀비 엄씨(엄귀비)의 묘소 건너편에 안장되었다. 원호(園號)를 숭인원(崇仁園)이라 하였다. 숭인원(崇仁園)은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 영휘원(永徽園) 내에 있으며, 영휘원과 같이 사적 제361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

△ 영휘원 풍경 (사진 촬영 2021.10.03)

◇ 영친왕 의민황태자(1897~1970)

의민황태자(1897~1970)는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비 엄씨이다. 영친왕(英親王) 또는 영왕(英王)이라 칭한다. 순종과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1900년 영왕으로 봉해졌으며 1907년 순종황제 때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강제로 유학길에 올라 일본에 인질로 잡혔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순종이 폐위되어 이왕(李王)이 됨에 따라, 황태자였던 영왕 역시 단순히 왕세자로 격하되었다. 1920년 일본 왕족의 맏딸인 마사꼬(한국명 方子)와 강제로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는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렀으나 역사적으로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에 있다. (다음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서울 영휘원 정자각 (사진 촬영 2021.10.03)
△ 영휘원의 가을 풍경 (사진 촬영 2021.10.03)

◇ 영휘원과 숭인원

영휘원은 대한제국 1대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왕의 사친, 왕세자, 왕세자빈, 황태자, 황태자비 등의 무덤을 의미)이고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첫째 아들인 이진 원손(1921~1922)의 원이다. 영휘원 안에는 조선왕조 제 26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인 영휘원과 영친왕의 첫째 아들의 원인 숭인원이 있다. 엄씨의 위패는 현재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모셔져 있다. 영휘원이 있는 이 지역은 원래 고종 황제의 비인 명성왕후 민씨의 홍릉이었으나, 1919년 고종의 장례 때 함께 묻기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현 홍유릉에 이장하였다.

영휘원(永徽園)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후비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이다. 건립시기는 1911년이고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이다. 순헌황귀비는 엄진삼의 딸로 광무1년(1897)에 영친왕을 낳았고 광무7년(1903)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신교육에 관심을 두어 양정의숙과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의 설립을 도왔다. 1911년에 덕수궁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원을 조성하였다.

△ 조선시대 왕계도 (사진 촬영 2021.10.03)

◇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 있었던 곳 홍릉

한 묘역 안에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다. 이곳에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이 있었다. 1919년 고종이 죽었을 때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남양주시 금곡동)로 천장(遷葬: 묘를 옮김.)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곳은 ‘홍릉’이라 불리고 있다.


영휘원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친(私親)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소(園所: 왕가 산소의 다른 이름)이다. 순헌귀비는 증찬성 진삼(鎭三)의 딸로 1854년(철종 5)에 태어나 1859년에 입궁해 민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당하자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을 시봉(侍奉)하였으며, 1897년 영친왕을 낳고 1903년 귀비로 책봉되었다.

이진 원손은 1921년에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 순종황제의 명으로 현재의 자리에 원을 조성하였다. 비각내부에 있는 원표석에는 순헌귀비 영휘원이라고 글이 새겨져 있다. 영휘원은 조선시대의 원소제도에 맞게 조성하여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세웠고 원침에는 호석(둘레돌)을 둘렀다. 숭인원은 영휘원과 비슷하게 조성하였으나 원침에 호석과 석양을 생략하였다. (안내문)

△ 순헌귀비 재실 (사진 촬영 2021.10.03)

◇ 순헌귀비 엄씨와 그 손자가 잠들다

서울 한복판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은 대한제국 망국의 한이 담겨 있는 사적지다. 영휘원에 들어서면 영휘원에 앞서 숭인원을 만난다. 숭인원은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무덤을 원으로 만든 것이다. 비록 어린 원자의 무덤이지만능원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다만 강이 낮고 봉분이나 석물들이 어린 아이의 무덤임을 알려줄 뿐이다. 빛바랜 정자각의 단청에도 그 슬픔이 깃든 듯하다. 동편에는 비각이 서 있는데 그 안의 비석이 한층 외롭게 느껴진다.

숭인원에서 숲길을 지나면 영휘원에 이른다. 그사이에는 제사 때 물을 긷는 제정이 곡장에 둘러싸인 풍경도 만난다. 영휘원 정자각은 아름다운 오색단청을 자랑한다. 숭인원과 대비될 만큼 또렷한 색감을가진다. 오색단청은 미관뿐만 아니라 일반 건축물과의 차별화를 위해 만든 것으로 궁전이나 법당의 권위를 나타낸다. 음양오행 사상을 중심으로 길흉화복 기원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의 비극이 서려 있어 슬픔이 묻어나며 숭인원에 비해 화려한색감은 그 슬픔을 애써 감추려는 듯하다. 순헌황귀비는 살아생전에 근대화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도 영휘원 주변에는 과학기술원을 비롯해 대학교, 각종연구원, 벤처벨리가 영휘원의 뜻처럼 아름답게 에워싸며 원을 그리고 있다.

△ 숭인원 (사진 촬영 2021.10.03)

◇ 대한제국 망국의 한이 서린 곳

숭인원에는 채 한 살도 채우지 못한 의민황태자의 맏아들 이진이 묻혔다.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와 정자각 영휘원과 숭인원 사이에 있는 제정(祭井)은 제사 때 사용할 물을 긷는 우물이다. 홍창살 너머 숭인원의 전경은 영휘원과 그 모습이 흡사하다. 홍릉은 남양주시 금곡으로 옮겼고 지금은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영휘원은 조선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이고, 영휘원 경내에 있는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아들이자 순헌황귀비의 손자 이진의 무덤이다.

△ 영휘원 상설도 해설 (사진 촬영 2021.10.03)
△ 영휘원의 가을 풍경 (사진 촬영 2021.10.03)

‘시(詩)가 있는 힐링 산책길’을 걷다

세종대왕기념관과 서울 영휘원 숭인원의 풍경을 마음에 담고, 동대문구 시(詩)가 있는 힐링 산책길을 걸으며 집으로 향한다.


두타산 기슭에서 / 박수재

북평발 삼화리행
버스 차량으로 넘실대는
밤바다는 오늘따라 청정하지만
석회석 가루를 뒤집어 쓴 나목
침묵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인적 끊긴 산길, 눈은 내리는데
무른계곡을 향해 힘차게 걸으니
목덜미 여윈 개똥지빠귀 떼
삼화사 건너편 검은 숲으로 흩어진다

지리한 반복음을 내며
바닥을 두들기는 개울물 소리
그 무료를 압도하는 범종 소리
두타산 기슭, 모든 시간이 멈춘다

△ 동대문구 '시가 있는 힐링 산책길' (사진 촬영 2021.10.03)
△ 동대문구 '시가 있는 힐링 산책길. (사진 촬영 2021.10.03)
△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안내도 (사진 촬영 2021.10.03)
△ 관람 안내 (사진 촬영 2021.10.03)

◆ 관람 안내

2~5월, 9~10월 09:00~18:00
6~8월 09:00~18:30
11~10월 09:00~17:30
정기 휴일 : 매주 월요일
관람 요금 : 1,000원
교통 안내
ㆍ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2출구 도보 15분, 6호선 고려대역 3번 출구 도보 15분
ㆍ버스 201, 1226, 1227 (홍릉사거리 하차)

ㅡ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안내문

/ 사진촬영 :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 기념관 영휘원 숭인원 (2021.10.03)


https://youtu.be/MFgKB5p8F7U

https://youtu.be/3cRVM5vNbtE

https://youtu.be/_DMtym3Rs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