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산 역사·문화 둘레길 걷기
△ 일시: 2021.09.19(일) 14:00~16:00
◇ 오늘 산책 코스
집 출발~서울식물원~호수원~주제공원~2·8공원~권농일기념비~상산 김도연 박사 동상~겸재정선미술관~망동산~궁산근린공원~소악루~성황사~서울양천고성지~양천향교~전통문화마당~홍원사~양천현아지~하마비~양천향교역(9호선)~마곡나루역~집 도착
◇ 2·8공원, 일문오열(一門五烈),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 박사 흉상, 사귀정직(事貴正直) 유묵비, 권농일기념비 표석
작년 가을, 일산에서 이곳 강서구로 이사 와서 궁산 둘레길을 자주 걸었다. 오늘도 산책길에 나서 서울식물원을 지나 겸재정선미술관 가는 길목에 들어섰는데, 늘 무심코 지나쳤던 쌈지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수차례 지나다닌 길 옆에 이런 공원이 있고 그곳에 뜻깊은 비석과 동상이 세워져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그곳으로 발길을 옮겨 살펴보니 2·8공원이라는 표석과 함께 일문오열(一門五烈) 비석과 권농일기념비 그리고 사귀정직(事貴正直) 유묵비와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 박사의 흉상이 세워져 있었다. “늘 다니던 길로만 걸어가지 말고 새롭고 낯선 길을 걸으라. 그러면 우리의 뇌도 새로워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강서구 가양동 2·8공원과 일문오열 그리고 상산 김도연 박사의 생애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역사든 문화든 자연이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했던가. 인생은 끝없는 배움의 여정(旅程)이라는 생각이 든다.
◇ 독립운동가 상산 김도연 선생의 삶
2·8공원이라는 이름은 2·8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에서 유래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문과 결의문을 선포한 사건이 2·8독립선언이다. 2·8독립선언은 당시 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이 주도하였다. 유학생 김도연이 이 단체의 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공원 이름을 「2·8공원」으로 하였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상산 김도연은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피의되어 심한 옥고를 치른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자 김도연은 초대 재무부장관이 된다. 신생정부의 열악한 재정을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산하 공무원에게 ‘청백리 정신’을 일깨운다. 당시 상산은 시정일보에 「事貴正直」(사귀정직, 일을 대함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은 정직함이다)이라는 휘호를 쓰고 고결한 청백리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러한 상산의 독립정신과 청백리의 숭고한 뜻을 잊지 않기 위해 양찬향교 유림, 지역 유지 등이 뜻을 모아 2020년 11월 초라하게 방치되던 마을 어귀의 소공원을 재정비하여 아담한 「2·8공원」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공원에는 상산 김도연 박사의 흉상과 유묵비(遺墨碑)를 세우고, 독립운동가로서 청백리(淸白吏)로서의 삶을 배울 수 있도록 기록을 새겨 보존하고 있다.
또한 2·8공원에 세워져 있는 「一門五烈」 비석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구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국한 후포마을 황씨 일문 5인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또한 「권농일기념비」는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농정문화를 상기해 주는 귀한 비석이다. 가을이면 황금물결 넘실거렸을 풍요로운 마곡의 농촌벌판이 그려진다. (노을서당 대표, 까치뉴스기자 글 참고)
◇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 박사 (1894년~1967년)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정치인.
1894년 6월 16일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출생으로, 본관은 영천(永川), 호는 상산(常山)이다. 보성(普成)중학교를 수료하고,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영어·일어 등을 공부했다. 1914년 긴죠[錦城]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고, 1919년 게이오[慶應]대학 이재학부(理財學部)를 수료했다. 도쿄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하였고, 1921년 일본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2년 학업과 항일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 웨슬리안대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27년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1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초기부터 북미한인유학생총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주도적으로 학생운동을 펼치는 한편,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했고, 특히 1927년부터 윤치영(尹致暎),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대한인동지회 가입,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 등을 통해 이승만(李承晩) 지지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내다,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았고,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여운형(呂運亨)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권유를 거부한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건설에 주력하며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6년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과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48년 5월 제헌국회 총선거 때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서대문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국회 초대 재정경제분과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48년 8월부터 1950년까지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8월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국회의 인준투표에서 부결되었고,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결성해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이 상실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6대 국회에서는 야당이 참패하였는데, 한일협정 문제가 사회 이슈로 등장하자 강력한 야당 출현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5년 5월 자유민주당과 민정당이 합당, 민중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김도연은 같은 해 6월 민중당 대표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8월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제7대 국회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7년 7월 19일 숙환으로 사망해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회고록인 『나의 인생백서』와 박사학위 논문인 『한국농촌경제』 등이 있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조국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021.09.19(일) 옮겨 적음
https://blog.daum.net/mulpure/15856624
'[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소한 이야기]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샤인머스켓', 마약포도가 따로 없네.. 이육사 '청포도', 도미의 '청포도 사랑' (2021.10.01) (0) | 2021.10.01 |
---|---|
[강서둘레길] 아름다운 한강 조망 명소 꿩고개산 '치현정'을 찾아서 (2021.09.21) (0) | 2021.09.21 |
[즣은생각] 오만 가지 생각, 고난, 삶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것들 (2021.09.15) (0) | 2021.09.15 |
[소소한 일상] 사마귀와 작두콩 그리고 우산 (2021.09.09) (0) | 2021.09.09 |
[설교문] '천사의 나팔꽃' 장윤재 이화대학교회 목사 (2021.09.05) (0) | 2021.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