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그리운 서귀포' 노향림 (2021.08.8)

푸레택 2021. 8. 8. 16:30




■ 그리운 서귀포 1 / 노향림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마른 갯벌엔 눈 감은 게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그리운 쪽빛 바다 서귀포

ㅡ 노향림의 ‘그리운 서귀포1’ 전문

[감상]

노향림 시인의 시집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에서 그리운 서귀포 연작을 선보였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강렬한 그리움으로 들어 있는데 화가 이중섭의 불우한 생애가 그려져 있다.

6.25 전후의 참혹한 상황에서 가진 것 없는 예술가가 제주에 왔다가 극심한 생활고로 아내의 친정인 일본으로 가족들을 보낸다. 그 그리움을 애틋한 그림엽서에 담아 보내지만 간염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그는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다.

이 작품은 얼핏 이해가 어려운듯 하지만 이중섭의 눈으로 서귀포 바다를 시리게 바라보자. 멀리 중섭을 걱정하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리는게 보이지 않는가.

글=오승철 시인

■ 그리운 서귀포 4 / 노향림
 
이중섭의 바다엔 물고기가 살아요
내 몸에도 정체불명의 물고기가 살아요
섶섬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엔
등 굽은 야생매화나무들이
밤이면 유령처럼 쏘다니고 있어요
그 잎, 입들이 두런두런 말을 걸어와요
쏴아쏴아 파도소리에 쓸리며
한쪽 귀가 다 닳은 나뭇잎들
굼실거리는 지느러미를 매달고는
은갈치 어랭이 벵어돔 자바리
수중의 물고기가 되었을까요
별들은 매화나무 가지에 내려와
이중섭의 비좁은 방을 기웃거려요
빛도 들지 않은 빈 방에서
마분지에 물고기가 그려진 그의 벽면에서
미이라처럼 발굴된 말은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피항하듯 벼랑 아래로 숨어든
갈치잡이 배나
외눈박이 알전구 눈들 발갛게 치켜뜬 채
두근두근 엿들어요
 
ㅡ『시와사람』(2013. 가을)

■ 그리운 서귀포 7 / 노향림

서귀포 앞바다를 달려오는 파도는
수만 갈래로 부서지며
상수리나무 잎새 부딪는 소리로 운다
앞바다에 뜬 유난히 붉은 노을 속에
누군가 눈시울이 붉어져 서 있다
못 견디게 아내를 그리워한 가난한 화가
아내를 향한 마음
촘촘한 그물 같이 수평선에 널어두고
지는 해를 보고 섰다
그 빨갛게 운 햇덩이를
무동력으로 정박한 배 한 척이 건져 올린다
소주 몇 잔에 취해
몇 겹 마음의 감옥에 누운
이중섭을
지금도 그만 일어나라 일어나라
상수리나무 잎새들이 이불 개키듯
스사스사 쏴아 흔든다
꿈속에서도 그리운 서귀포

 —《시인동네》 2017년 5월호

노향림 / 1942년 전남 해남 출생.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눈이 오지 않는 나라』『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바다가 처음 번역된 문장』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