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눈' 김수영, '대설 주의보' 최승호 (2021.03.21)

푸레택 2021. 3. 21. 16:35

 

 

?? 눈/ 김수영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감상과 해설

?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어디서 오는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머언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내리는 김광균의 눈이 있는가 하면, 쌀랑쌀랑 푹푹 날리는 백석의 눈이 있다. 기침을 하자며 촉구하는 김수영의 살아있는 눈도 있고, 희다고만 할 수 없는 김춘수의 검은 눈도 있다. 괜, 찮, 타, 괜, 찮, 타, 내리는 서정주의 눈도 있고, 갑작스런 눈물처럼 내리는 기형도의 진눈깨비도 있다.

그리고 여기 '백색계엄령'처럼 내리는 최승호(54) 시인의 눈이 있다. 1980년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념의 시대였고 폭압의 시대였다. 그는 '상황 판단'이라는 시에서 '굵직한/ 의무의/ 간섭의/ 통제의/ 밧줄에 끌려다니는 무거운 발걸음./ 기차가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 터널 속처럼 불안한 시대'라고 일컬었다. 그의 시는 선명하고 섬뜩하게 '그려진다'. '관(觀)'과 '찰(察)'을 시 정신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현실을 '보면서 드러내고', 자본주의와 도시문명을 '살피면서 사유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은, 굵게 힘차게 그치지 않을 듯 다투어 몰려온다. 눈보라의 군단이다. 도시와 거리에는 투석이 날리고 총성이 울렸으리라. 눈은 비명과 함성을 빨아들이고 침묵을 선포했으리라. 백색의 계엄령이다. 쉴 새 없이 내림으로써 은폐하는 백색의 폭력, 어떠한 색도 허용하지 않는 백색의 공포! 그 '백색의 감옥'에는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꺼칠한 굴뚝새'가 있고, 굴뚝새를 덮쳐버릴 듯 '눈보라 군단'이 몰려오고, 그 군단 뒤로는 '부리부리한 솔개'가 도사리고 있다. 분쟁과 투쟁, 공권력 투입, 계엄령으로 점철됐던 시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골짜기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칠 때 그 눈발을 향해 날아가는 굴뚝새가 있었던가. 덤벼드는 눈발에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췄던가. 꺼칠한 굴뚝새의 영혼아, 살아있다면 작지만 아름다운 네 노랫소리를 들려다오! 다시 날 수 있다면 짧지만 따뜻한 네 날개를 펼쳐 보여다오!

ㅡ 정끝별·시인

? 새해가 밝았습니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는 어느 시구처럼 지난해 무거웠던 몸과 마음도 이제 많이 맑아졌구요. 제야와 신년 아침에는 겨울 수채화처럼 서설까지 내려 우리들 메마른 가슴을 포근히 또 아름답게 채색해주었지요. 그러더니 이 즈음엔 울릉도며 산간 내륙에 간간이 대설주의보까지 내려 무언가 풍성한 느낌을 던져주는 모습입니다.

우리 시에서 눈내리는 풍경을 묘사한 시로는 아마도 이 최승호 시인의 ‘대설주의보’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태백산맥 깊은 산 속에 한겨울 눈보라가 몰아치고 사람키 만큼 폭설이 쌓여 가는 겨울 풍정을 잘 묘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각종 오염과 공해로 찌든 우리 도시생활의 모습을 떠올리노라면 이 겨울 태백산맥을 몰아치는 눈보라의 신선한 생명력이 간절하게 그리워지기도 하지요.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이라는 구절 속에는 엄청난 대자연의 생명력과 함께 원시의 싱싱한 맥박과 숨결이 느껴져 오기 때문입니다. 부디 올해에는 고운 눈이라도 펑펑 내려 우리들 인정이 더욱 넉넉해지고 또 한 해 농사가 풍요로워지길 기원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ㅡ 김재홍(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 2021.03.21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