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깊은 맛' 김종제, '마늘촛불' 복효근, '슬픈 음식' 홍관희 (2021.01.17)

푸레택 2021. 1. 17. 11:41

 

 

■ 깊은 맛 / 김종제

모름지기 배추는
다섯 번은 죽어야
깊은 맛을 얻을 수 있다는데

밭에서 잘 자란 놈을
모가지 잡아채서 쑤욱 뽑아내니
그 첫 번째요
도마 위에 올려놓고
번득이는 칼로 몸통을 동강내니
그 두 번째요
커다란 고무다라에
소금물 뒤집어쓰고 누웠으니
그 세 번째요
고춧가루에 마늘에 생강에
온몸이 붉은 피로 뒤범벅이 되었으니
그 네 번째요
마지막으로 독이란 관에 묻혀
흙 속으로 다시 돌아가니
그 다섯 번째라

푸르뎅뎅한 겉절이 같은 것이 아니라
시큼털털한 묵은지 같은 것이 아니라
쓴맛에 매운 맛에 단맛까지
몇 번은 죽어
깊은 맛을 내는 김치처럼

우리네도
몇 번은 죽었다가
몇 번은 살았다가
곰삭은 인생이야말로
깊은 맛을 지니는 것 아닌가

잘 익은 저 주검을
손으로 집어
한 입 먹어주는 것도
生에 한 발 더 깊이 빠지는 일이겠다

■ 마늘촛불 / 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가운데에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 슬픈 음식 / 홍관희

숨쉬듯 날마다 먹는 쌀밥과
즐겨 찾는 싱싱한 야채와 고기
아무 때나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는
편리한 인스탄트 식품은
적어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기에
깨끗하고 생명이 되는 음식이라고
믿고 먹는다

내가 믿고 먹는 음식에 꿈도 없이
농약과 공장폐수와 합성세제가 스며있고
방부제와 방사능이 들어있고
아아 죽음으로 가는 질긴 욕망이 들어있다 해도

농약으로 쌀을 씻지는 않고
공장폐수로 양치질을 하지는 않고
합성세제로 먹이를 버무리지는 않는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사는데

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온갖 공해는
나의 욕망을 잠시 채워주며 즐겁게는 해주지만
꿈이 없는 만큼
마침내 내가 그것의 공격 대상이 되고
그것의 먹이가 되어가고 있음을
나의 생명이 어둠의 슬픈 먹이가 되고 있음을

/ 2021.01.17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