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쓴맛에 대하여 / 홍해리(洪海里)
사람들은 단 것을 좋아하지만
맛의 근본은 쓴맛일시
혀끝으로 촐랑대는 단맛에 빠진 요즘
세상일이 다 그렇다
혀끝으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내면서
그곳에서 놀고 있다
단맛이란 맛있다는 말과 동의어지만
어찌 단맛이 맛의 전부일까
삶의 은근한 맛은, 아니 멋은,
느낄 때까지의 시간이 길고
또 오래 남아 없어지지 않는
쓴맛에 있음이 아니랴
단맛이 단맛을 내기 위해서는
쓴맛이 근저에 있어야 하는 것을
고진감래가 감진감래,
아니 감진고래로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렸고
속담으로나 남아 있는 표현이 되었지만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싫어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지
어찌 젊은이들만의 일일까만
더위 먹어 헛헛하고 헛배 부를 때
밥맛을 일깨우고 기운 차리게 하는
한 대접의 익모초, 그 초록빛 하늘,
학질에 걸려 덜덜 떠는 한여름
몇 알의 금계랍은 또 어떤가
쓸개에서 쓴 물이 빠지면
쓸개 빠진 놈이 되어 버리는 법
어느 새벽에 잠깨어 쓴맛을 기리며
나의 쓸개를 더듬어 보나니
입 안에 단 물이 가득 고이네
■ 독서법 / 홍해리
눈이 침침해 책을 오래 볼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드디어 천 개의 눈이 열리고
귀가 만리 밖까지 트인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책이 눈앞에 펼쳐진다
손으로 책장을 넘길 필요가 없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책
아무리 오래 읽어도 눈이 아프지 않다
나이 들어 시력이 떨어지는 것은
책 다 덮어 놓고 책을 읽으라는
신의 뜻
자연은 갈피마다 주석이 달려 있어
오독할 염려도 없는
가장 크고 위대한 책
마음껏 읽어보는 즐거움은
나이가 거저 주는 축복 아닌가
■ 늙마의 길 / 홍해리
ㅡ 치매행致梅行 · 269
나이 들어도 나일 먹어도
기쁜 것은 기쁘고 슬픈 건 슬픔이듯
늙어도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여전히 싫기 마련입니다
오늘 아내가 중환자실에 들었습니다
앵앵대는 구급차를 타고
당당히 한일병원에 입성했습니다
다섯 시간 동안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습니다
환자는 의사의 실험대상입니다
이것을 해 보자 하면 따라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두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빙 둘러싸인 채 모처럼 아내는 호강을 누렸습니다
다들 돌려보내고 나서
코에 끼운 관[tube]으로 저녁을 때우고
고롱고롱 잠이 들었습니다
혈액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
CT, X-ray, MRI 촬영이 힘들었나 봅니다
병상 옆 긴의자에 나란히 누워
매화동산으로 산책을 나가다 보니
입원 첫날밤이 희붐하니 새고 있습니다
/ 2021 01.15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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