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수아비 / 김동인
허름한 겉옷 툭 걸치고
밀짚모자 푹 눌러 쓴
나는 허수아비
잘 익어가는 곡식들
넓은 논 위에 우뚝 서 있다
이글거리는 한낮 뜨거운 태양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을
홀로 견디며 이곳을 지켜야 한다
곡식이 다 익을 때까지
나는 허수아비
아무도 내 곁에 오지 않아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지
올 수도 갈 수도 없는 신세
내게 다가와 주는 새를 쫓고
무서운 얼굴로 겁을 주지
곡식이 다 익을 때까지
나는 허수아비
긴 외로움에 서러움에
밀짚모자 눌러 쓰고 울고 있지만
아무도 몰라
내가 얼마나 겁쟁이라는 걸
가을은 외로운 계절이라는 걸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해
곡식이 다 익을 때까지
나는 허수아비
● 고목나무 / 김동인
기억하는가
울창하고 푸르던 그 잎새를
새들의 쉼터가 되어
둥지 틀 보금자리를 내어주었던
그 많은 새들의 노랫소리를
다 기억하는가
한 여름 뜨거운 태양을 가리어
나그네의 땀을 식혀 주고
그늘 아래 뛰놀던 아이들
웃음소리 그 노랫소리를
다 기억하는가
매미들이 기대어 울던 자리
바람이 잠시 쉬어간 자리
나무 등 뒤에 숨어 눈물 훔치던
어느 아낙네의 붉은 뺨을
그 많은 하소연과 넋두리들을
다 기억하는가
천수가 다 해 고목이 되었으니
시리도록 푸르렀던 그 잎새를
이젠 누가 기억하는가
● 그것은 축복입니다 / 김동인
눈부신 따뜻한 햇살
새들이 지저귀는 고요한 아침
아름다운 꽃이 피어 향기를 내고
커다란 나무는 그늘이 되어 주니
해가 뜨고 하루가 지나가는 것
그것은 축복입니다
이웃과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 오는 것
따뜻한 밥 한 공기와 김치찌개
오손도손 둘러 앉은 저녁 식탁
함께 식사할 가족이 있다는 것
그것은 축복입니다
신발장에 신을 신발이 있고
입고 다닐 옷이 내게 있고
만나서 이야기할 친구가 있다는것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고
내일의 일정을 계획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축복입니다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공짜이고
따뜻한 햇살이 공짜이고
바위 틈 맑은 물도 공짜이고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이 공짜이니
신이 주신 흙을 밟고 산다는 것
그것은 축복입니다
당연한 듯 누리고 지냈던 평범함 삶
그것은 분명 신의 축복입니다
/ 2020.07.07 봄비 김동인 이천에서 보내온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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