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하늘 접시, 작명의 즐거움,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2020.05.09)

푸레택 2020. 5. 9. 18:06

 

 

 

 

 

● 하늘 접시 / 이정록

 

시골 어머니를 위해 누님은 에어컨과 스카이를 달아드리고

아우는 텔레비전과 청소기를 사드렸는데, 맏아들인 나는

병아리눈곱만큼 나오는 전기세와 벙어리 전화세 내드리는 게 전부다

그런데 누님은 누님이시다

누님이 달아드린 그 위성 케이블이 치매 걸린 광줄댁, 풍 맞은 대밭머리 아주머니, 수다와 버캐가 전문인 박달자 할머니까지,

동네과부들을 어머니 방에 다 모이게 하는 것이다

모두 모여 벌건 대낮에 훌러덩 식식거리는 영화를 꼴깍꼴깍 보고 계시다

이 집 텔레비는 원제 저리 다 벗겨 놨댜? 어이쿠, 어이쿠, 저 양코배기들 방아 찧는 것 좀 봐. 풍 맞은 몸으로 흉내 내려니

반쪽만 에로배우다. 굳은 한 쪽 팔다리는, 주책 좀 그만 떨라니까!

젊어 떠난 서방이 엉거주춤 옷섶 추슬러주는 듯하다.

풍 맞고야 앞서 간 남편과 몸을 섞다니,

누님은 역시 누님이시다

함박꽃 틀니들, 공옥진 초청공연이 따로 없다

웃음바다에 둥둥둥 떠가는 치매의 복사꽃잎들, 떠돌이 약장수에게 약 들여

놓는 일도 없어졌다

이제 나는 노파 전용 영화관의 맏아들이 된 것이다

돌아가시기도 전에 벌써 스카이 라이프이라니!

짠하기도 하지만, 누님은 역시 누님이시다. 녹슨 처마 끝

천국의 접시여. 하느님도 세상 재미가 쏠쏠하신가? 새털구름

불콰한 하늘 접시여

 

●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것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 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 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 작명의 즐거움 / 이정록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사, 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봄 가뭄에 보리누룽지처럼 졸아붙은 올챙이 눈 그 작고 깊은 끈적임을 천배쯤 키워놓으면

그게 바로 콘돔이거니, 달리 요약 함축할 길 없어 개펄 진창에 허벅지까지 빠지던 먹먹함만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 2020.05.09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