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인간담배 / 이정록
교실 커튼 둥글게 말아 그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담임에게 들켰다. 학생부로 넘어가면 사회봉사 한 달이다. 학급문고 중에 가장 무거운 책을 다섯 권이나 들고 서 있다. 담임선생님은 학생 징계 회의에 가서 굽신거리는 게 싫은 거다. 학급 경영 잘 못한다고 눈치받는 게 쪽팔리는 거다. 저 마음의 팔할은 내 책임이다. 점심 약속이 있는지 꾸지람이 짧다. 조금 고맙다. "너 같은 놈은 기네스북에 올려야 해. 커튼으로 자신을 말아서 인간 담배를 피운 놈은 처음일 거야." 반성문 쓰는 대신 인터넷에 나오는 기이한 담배 이야기를 발표하란다. 커튼에 뚫린 담배빵이 째려본다. 봄햇살에 김이 피어오른다.
● 도둑 / 이정록
내가 가출한 사이
집에 도둑이 다녀갔단다
내 또래일 거라고 했다
내 메이커 점퍼와 칠년 묵은 돼지저금통을 가져갔단다
근데 도둑이 변태인 것 같단다
책상에 개어놓은 팬티도 가져갔단다
가출했다가 보름 만에 돌아온 내 안부는 묻지도 않고
젊은 놈이 안됐다고, 혀를 찬다
언제 들어올지 몰라서 문단속 안했더니
오라는 놈은 안 오고 밤손님이 들었다고 한숨 내쉰다
고개 숙이고 눈알은 굴렸지만, 나는 끝내 자백하지 않았다
도둑이 사실 나였음을
문을 잠그지 않은 마음 때문에 괴로웠음을
신발장에 올려놓은 지갑 때문에 흔들렸음을
달맞이꽃처럼 환한 거실을 엿보려고
밤길을 달려왔던 적 많았음을
/ 2020.05.09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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