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개밥풀, 무명초, 귀촌, 금강봄맞이꽃 이동순 (2020.05.09)

푸레택 2020. 5. 9. 17:34

 

 

 

 

 

● 개밥풀 / 이동순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서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럼*을 푸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 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 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 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 개밥풀: 개구리밥, 부평초. 논이나 못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수초.

* 스크럼(scrum): 여럿이 팔을 바싹 끼고 횡대를 이루는 것.

 

● 무명초(無名草) / 이동순

 

차디찬 시멘트 축대 위 가파른 곳의

금 간 틈서리를 비집고 살던 풀포기 하나

바람결에 나 이렇게 잘 있으니 염려말라고

온 몸으로 흔들어 보이던 고갯짓이

지금은 어디 갔나 모진 비바람끝에 축대 무너지고

무지막지한 흙더미 그 위로 쌓이고 덮여

이젠 아무도 깔린 풀포기를 떠올리지도 않는데

더욱 까맣게 흔적조차 잊어가고 있는데

애잔한 한 포기 목숨 죽었는가 살았는가

즐겨 이곳을 찾던 채마밭 콩새들도 오지 않고

낯설구나 어제 모습 하루아침에 바뀌어지다니

허물어진 성터에 오른듯 마음만 소란할 뿐

내가 오늘도 기웃거리며 돌틈 뒤지는 것은

거친 흙더미를 솟구쳐 하늘로 파리한 얼굴 내밀

무명초, 네 믿음의 힘을 보려 함이다

 

● 귀촌(歸村) / 이동순

 

빈집을 하나 얻어서 산골 살림을 차렸다 어느 해 과한 군불에 꺼뭇꺼뭇 색깔이 변한 붉은 패랭이꽃무늬 비닐장판을 걷어내다가 흰 밥알을 뿌린 듯 바글바글 널부러진 벌레알에 소름이 송글송글 맺혀왔다

 

도저히 못 살고 떠난 사람이 버리고 간 겨우 쥘손만 남은 몽당비로 흙 바른 서까래에 얼기설기한 거미줄 대강 쓸고 툇마루의 쥐똥 제비똥 긁어내고 버려진 농약병이랑 파묻고 장뚝간엔 방춧돌도 가즈런히 짜 맞추었다

 

천장의 파리똥과 묵은 세월의 때얼룩을 헌 신문지로 쓱싹 발라 놓고 등에 목물하고 방에 들어와 툇문 열고 앉으니 다 익은 앵두가 제풀에 호도독 떨어지고 가까운 골짜기에선 오월 한낮의 뻐꾸기도 울었다

 

● 금강봄맞이 꽃 / 이동순

 

험한 벼랑에서 여물어진

무수한 금강봄맞이꽃*의 풀씨들은

바람에 날려

내를 건느고 공장을 지나

연탄가스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외딴 함석지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종일 햇살 한 모금 들지 않는

뒤꼍 토담 밑에 다다른다

 

험한 벼랑에서 여물어진

무수한 금강봄맞이꽃의 풀씨들은

바람에 날려

장독대 가즈런히 반짝이는

시골집 뜨락을 그윽히 내려다보다가

갓 태어난 복슬강아지의

보송보송한 솜털에

가서 딩굴며 몸 부빈다

 

험한 벼랑에서 여물어진

무수한 금강봄맞이꽃의 풀씨들은

바람에 날려

동강 난 국토의 허리께 부근

철조망 치고 방공호 파대느라

뻘겋게 파헤쳐진

황토의 속살이 하도 애가 말라

그 속으로 사뿐 내려 앉는다

 

* 앵초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 잎은 뿌리에서부터 뭉쳐서 나며 꼭지가 긺.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유월경에 흰 꽃이 예닐곱개씩 핌


 / 2020.05.09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