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안부 정병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기철, 너는 아느냐 채형복 (2020.05.06)

푸레택 2020. 5. 6. 08:02

 

 

 

 

 

● 안부 / 정병근

 

언제 한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어디 약속뿐이랴 뱉은 만큼

못다 한 말들 입속에 바글거리고

만나면 만날수록 결별만 수북수북 쌓인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나는 제법

늙어서 흰머리를 툭툭 털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안경알을 닦으면서

생각하건데, 나는 죄의 신봉자였으니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이기철

 

내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너는 아느냐 / 채형복

 

유학 시절

수업 중 쉬는 시간

나보다 열 살은 어린 친구에게 푸념했다

프랑스인들은 왜 한국에 대해 무지하냐고

88올림픽을 치른 나라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인데

사뭇 비장한 어조로 물었다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던 어린 친구가 되물었다

너는 아프리카의 약소국들에 대해 아느냐

그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의 의미를 아느냐

제 형과 같은 내게 되물었다

당시 소말리아에서는 내전이 있었다

수십 수백만의 실향민들이 난민으로 떠돌고 있었고

살인과 강간, 방화로 연약한 노인과 여인,

그리고 아이들이 죽어갔다

자신과 한국이란 조국에만 집착한 나는

부끄럽게도 소말리아에서 일어난 일에는 무지하였다

나는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꿈꾸는 국제법학도였고

분열과 갈등을 넘어선 통합을 이룩한

유럽공동체법을 공부하는 통합론자였다

자성과 체험을 거치지 않고

관념에만 사로잡힌 지식의 무력감

관념에 사로잡힌 지식과 지식인은 위험하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어린 친구가 나를 준엄하게 질책하는 꿈을 꾸곤 한다

너는 아프리카의 약소국들에 대해 아느냐

그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의 의미를 아느냐

어린 친구의 질책은

여전히 무섭다

 

[펀집] 2020.05.06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