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지상의 방 한칸 김사인, 자갈밭을 걸으며 유하, 구부러진 길을 걸으며 이준관 (2020.05.06)

푸레택 2020. 5. 6. 08:34

 

 

 

 

 

● 지상의 방 한칸 / 김사인 시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자갈밭을 걸으며 / 유하 시인

 

자갈밭을 걸어간다

삶에 대하여 쉼없이 재잘거리며

내게도 침묵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갈에 비한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무수하게 야비한 내가 그들을 밞고 지나갔다

증오만큼의 참회, 그리고

새가 아니기에 터럭만큼 가벼워지지 않는 상처

 

자갈밭을 걸어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자갈이 되어주길 원했다

나는 지금, 자갈처럼 단련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알고 있다, 저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고 또 지나도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처는 어찌할 수 없이, 해가 지는 쪽으로 기울어감

으로

정작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틈새에서 서서히 돋아날 굳은 살,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 구부러진 길 / 이준관 시인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2020.05.06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