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도둑과 경찰, 꽃벼슬, 시의 쓸모 이정록 (2020.05.09)

푸레택 2020. 5. 9. 17:58

 

 

 

 

 

● 도둑과 경찰 / 이정록

 

경수 아버지는

만년 특진 한 번 못 한 교통경찰이다

경수는 고급 오토바이만을 훔친 뒤

오토바이 숨겨 논 곳을 아버지 폰으로 알려 줬다

공중전화나 발신 표시 없이 문자만을 남겼다

경수 아버지는 승진했다

경수가 무면허 운전 사고로 얻은 빚,

맞춤하니 딱, 그 이자만큼 월급이 올랐다

졸업식 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다

중국집 독한 술이 눈물을 끌어 올렸다

경수 아버지도 더 이상은 포상이 없었다

오토바이는 늘 허탈하게 웃는다

칠년 뒤 부자는 오토바이 대리점을 냈다

상호명은 부자오토바이센터다

경찰 오토바이 수리 전문점이다

경찰과 공소시효 지난 도둑이 한솥밥을 먹는다

 

​● 꽃벼슬 / 이정록

 

한식날, 무덤 위

쥐구멍에 꽃다발을 꽂는다

망자가 딱히 쥐띠여서가 아니라

무덤 안으로 들어간 저 숨길에

꽃밥 한 그릇 바치는 것이다

식성대로 부침개부터 자셨나

입가를 훔친 잔디가 번들번들하다

틀니는 어디다 두고 잇몸만 내보일까

뒤따라온 망자의 아내가

쥐구멍에 술잔을 따른다

빈속이 어지간히 쓰리겠다

잔솔들이 침을 세워 손사래 친다

쥐구멍에 꽃 꽂는 놈이 어딨냐

그래도 새끼들이 술 갖고 올 줄 알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구나

목메것다 저 꽃다발이나 뽑아 드려라

무덤 안에서 뭔 소리 들려요

그랴 니 불알 많이 컸다고 그런다

살아서는 마을 이장밖에 못하더니

죽어 벼슬혔구나 무덤이 꼭

어사화 꽂아놓은 항아리 같구나

아에 술병을 쥐구멍에 박아놓는다

간만에 술로 목욕한께 시원하것다

돌아앉아 먼 산 바라보는 눈빛이

어둠 속에다 사금파리를 끼워 넣는다

 

● 시의 쓸모 / 이정록

 

모 시인의 승용차가 폐차 직전이란 걸 눈치챈 자동차외판원은 시인의 대표작과 신작시를 달달 외웠다 시인이 오래된 만년필로 연거푸 사인했다 하나는 신작시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매계약서였다 자신의 시에 처음으로 제값을 치른 쾌거였으므로 승차감 또한 흐뭇하였다 나 또한 시의 노복, 내 단골집 아씨는 별명이 줄똥말똥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전통을 내세워 안주 없이 맥주만 홀짝였다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옥편 값이 더 비싸데요! 한자 어석거리는 나의 시「풋사과의 주름살을 줄줄 외웠다 무릎을 꿇은 채, 메뉴판의 구부 능선을 제 유방으로 덮고는 가장 비싼 메뉴에 초고추장 같은 손가락을 찍었다. 왼손으로는 브래지어 끈을 살짝 올렸다가 눈사람 목주름만큼만 끌어 내렸다 딱 여기까지라는 듯 가슴 둔덕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른 안주를 살피려면, 그녀의 젖가슴을 들어 올리는 수고로움이 뒤따름으로 나는 물레방앗간 옆 산뽕나무처럼 오디 눈동자만 깜작였다 오빠 그거! 한번 매상을 올린 그녀는 번번이 과일안주를 대동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교양미 넘치는 시낭송가였다. 자동차외판원의 애인이란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딘가에서 손익계산서를 두드리며 시를 외우는 애인들아 아직도 나는, 주춧돌 메고 나가 기둥서방이라도 되고 싶다 끝내 시의 용도폐기까지는 따져 묻지 못했지만 시 한 편이 최소한 과일안주 값은 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메뉴판이 되리라! 나에게도 뻥뻥 축포가 터지던 시의 역사가 있었다

 

/ 2020.05.09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