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얼굴 반찬 공광규, 사라진 것들의 목록 천양희, 스미다 이병률 (2020.05.05)

푸레택 2020. 5. 5. 20:20

 

 

 

 

 

● 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 사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다

 

● 스미다 /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 2020.05.05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