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모습 / 오규원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 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엑스트라 / 정해종
그냥 지나가야 한다
말 걸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모든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 해야 한다
누군가 지나간 것 같지만
누구였던가 관심두지 않도록
슬쩍 지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몇 번을 죽을 수 있지만
처절하거나 장엄하지 않게
삶에 미련 두지 말고
되도록 짧게 죽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죽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생이 더욱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배당받는 것이다
주어진 생에 대한 열정과 저주,
모든 의심과 질문들을 반납하고
익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을 한번, 휙..
사소하게 지나가야 한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끝끝내
우리는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
/ 2020.05.05 편집 택..
'[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시감상] 시레기 한 움큼 공굉규, 사라진 동화 마을 반칠환, 미친 교실 이봉환 (2020.05.06) (0) | 2020.05.06 |
---|---|
[명시감상] 얼굴 반찬 공광규, 사라진 것들의 목록 천양희, 스미다 이병률 (2020.05.05) (0) | 2020.05.05 |
[명시감상] 책상을 치우며 도종환, 쓸모없는 친구 김광규,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이기철 (2020.05.05) (0) | 2020.05.05 |
[명시감상] 일수와 한수 김광규. 길 윤제림,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김재진 (2020.05.05) (0) | 2020.05.05 |
[명시감상] 청보리 문무학, 삶이 나를 불렀다 김재진,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이병률 (2020.05.05) (0) | 2020.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