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보리 / 문무학 시인
도라지꽃 입술로 봄을 씹던 누부야
앞들 논 서 마지기 보릿골 이랑마다
긴긴 해 허기를 물고 꿈을 캐고 있었제
꽃불타던 산허리 뻐꾸기 봄을 울면
아지랑이 아물아물 나른한 한 나절을
누부야 청보리같이 그래 살고 싶었제.
● 삶이 나를 불렀다 / 김재진 시인
한때는 열심히 사는 것만이 삶인 줄 알았다.
남보다 목소리 높이진 않았지만 결코
턱없이 손해보며 살려 하진 않던
그런 것이 삶인 줄 알았다.
북한산이 막 신록으로 갈아입던 어느 날
지금까지의 삶이 문득
목소리 바꿔 나를 불렀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고 있는 건가?
반짝이는 풀잎과 구르는 개울
하찮게 여겨왔던 한 마리 무당벌레가 알고 있는
미세한 자연의 이치도 알지 못하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듯 착각하며
그렇게 부대끼는 것이 삶인 줄만 알았다
북한산의 신록이 단풍으로 바뀌기까지
노적봉의 그 벗겨진 이마가 마침내
적설에 덮이기까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살아왔다
●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 이병률 시인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꽃향은 두고
마늘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신(神)에게 다가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 2028.05.05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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