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나무에 대한 기억 / 문무학 시인
감나무, 감나무 떠나온 집 늙은 감나무
할배같고 아비같이 푸근하고 넉넉했지
잎 피워 그늘 내리고 꽃 피우고 감을 달던,
감꽃이 필 무렵엔 소쩍새가 울었지
이산 소쩍 저산 소쩍 골골마다 소쩍소쩍
소쩍새 울어 떨군 꽃, 그 꽃 주워 먹었지
비바람 이기느라, 버티다가 악을 쓰던
오기로 속 살 채운 풋감의 막무가내
사는 건 그런거라고 요량없이 믿었지
너른 잎 떨어져서 '할말 많다' 버석댈 때
청명한 하늘 이고 뉘우치듯 익던 홍시
한 세월 삭히고 삭힌 체념으로 읽었지
떨구고 버리고 다 주고 난 겨울날엔
하늘을 생채기 내는 무수한 잔 가지들
눈물로 건너야하는 그 길인걸 알았지
● 내 친구 택수 / 고증식 시인
나보다 한 살 더 먹었으니
올해 마흔이 되는구나
한 뼘 송곳 꽂을 땅도 없는
그런 집 장남으로 태어나
줄줄이 동생은 다섯이나 되었지
젊은 아버지 소작 논배미 벤 채
피 토하며 쓰러져가던 날
네 나이 열일곱이었던가
중학교 문턱도 못 넘은 네가
죽어라 흙귀신 된 지 이십여 년
동네 사람들 이젠
살만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어
그렇게 공부시킨 네 동생들
눈물로 쌓은 볏가마니 털어
잘도 끈 달아 보내더니
정작 마흔이 넘어서도 너는
혼담 한 자리 없었구나
일찌감치 등지고 떴더라면
땟물 빠진 허연 색시
총각귀신은 면했으리
누가 네 목 비틀어 가시 질러 놓았는가
농촌총각인지 몽달귀신인지
희망찬 농촌인지 팽개친 찬밥인지
막걸리에 눈물 말아 씹어 삼키던
내 친구 택수 택수야
● 우리 살던 옛 집에 / 김재진 시인
헌옷 벗어 걸어놓고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나?
마당에 서 있던 목련나무
허리가 굵어졌고
벽 위에 박았던 못 그대로 있는데
어디로 가신 건지 아버지
소식을 알 길 없다
환한 햇살이 창호지에 비치던 방
입고 계시던 모시옷의 깔깔한 감촉만
아물거리며 손끝에 남아 있는데
껄껄, 웃음 터뜨리던 아버지는
그날 밤 누이가 꾼 꿈을 끝으로 나타나지 않으신다
우리 살던 옛 집에 해 지면 분꽃 피고
허물어진 부뚜막 아래 귀뚜라미 소리 들린다
물기 빠진 광목을 팽팽하게 맞잡으며
세월을 두드리는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
슬픔도 늙는 건가?
슬픔도 우리처럼 나이를 먹는 건가?
내모습 속에서 문득 나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우리 살던 옛 집에 저녁이면 불 켜지고
찬바람 불면
자전거 타고 돌아오실 아버지를 기다리며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 하나
자르르, 기름기 흐르는 밥알들을 껴안고 있다
/ 2020.05.04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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