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지 / 천상병
점심을 먹다가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지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있었다
그걸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 강아지풀과 함께 / 최종국
깜장 박쥐우산 쓰고
강변 둑에 쪼그려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본다
물가의 강아지풀
저도 같이 본다
강물은
곁눈질도 없이 제 길을 간다
천수답 봇도랑처럼 비루하지 않고
호수처럼 죽은 듯이 게으르지 않고
돌각사리 시내처럼 촐랑거리지 않고
바다처럼 지루하게 일렁이지 않고
계곡처럼 소리치지도 굽이치지도 않고
폭포처럼 기세를 부리지도 몸을 던지지도 않으면서
어쩌면 그리 유유하고 기품 있게 가는지
비로 살진 강은 장엄하기조차 하다
넉넉해질 일이다
강 같은 사유와
물 같은 깊이로 다스릴 일이다
강아지풀 연신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다
● 사랑 / 도스토예프스키
하나의 잎사귀를 사랑하라
하나의 동물과 하나의 풀을
바로 내 앞에 있는
그 하나로 사랑하라
네 앞에 떨어지는 빗줄기 하나까지도
만일 네가 네 앞의 작은 그 하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속에 담긴 신비를 보게 되리라
만일 네가 네 앞에 작은 하나 속에 담긴 신비를 본다면
날마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그리고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너 자신과 세상 전체를 사랑하게 되리라
아! 당장 네 앞에 작은, 작은 그 하나를 사랑하는 것이
마침내 모든 것을 사랑하는 첫걸음인 것을...
내 앞에 시방 보이는 그것 (바로 그 사람, 바로 그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이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하나는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이다
그리고 하나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 2020.05.04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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