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시레기 한 움큼 공굉규, 사라진 동화 마을 반칠환, 미친 교실 이봉환 (2020.05.06)

푸레택 2020. 5. 6. 07:43

 

 

 

 

 

● 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미운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 사라진 동화 마을 / 반칠환

 

더 이상 불순한 상상을 금하겠다

달에는 이제 토끼가 살지 않는다, 알겠느냐

물 없는 계곡에 눈먼 선녀가 목욕을 해도

지게꾼에게 옷을 물어다 줄 사슴은 없느니라

아무도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갈 일이 없을 것이며

나무 위에 오른들 더 이상 삭은 동아줄도 내려오지 않느니라

흥부전 이후, 또다시 빈민가에 박씨를 물고 오는 제비가 있을 것이며

소녀 가장이 밑 없는 독에 물을 부은들 어디 두꺼비 한 마리가 있더냐

이 땅엔 더 이상 여의주가 남아 있지 않나니,

한때 지구 자체가 푸른 여의주였음을 알 턱이 없는 너희들이

삼급수에서 비닐 봉다리 뒤집어쓴 용이 승천하길 바라느냐

자아, 더 이상 철부지 유아들을 어지럽히는 모든 동화책의 출판을 금한다

아울러, 덧없이 붉은 네온을 깜박이는 자들이여

쓸데없는 기도를 금한다

하느님은 현세의 간빙기 동안 취침중이니

절대 교회문을 시끄럽게 두들기지 말거라

너희가 부지런히 종말을 완성할 때 눈을 뜨리라

 

● 미친 교실 - 이봉환

 

“씨팔년아 뭐 어쩌라고, 어쩔건데?”

이어폰을 꽂은 학생이 욕을 하며 대든다

여교사는 다리가 후들거려 교탁을 짚는다

자식보다 어린 저 고딩 녀석을 어쩌랴

참을 수 없는 수모를 견뎌내며 겨우겨우

“너 공부하러 왔어, 음악 들으러 왔어?”

라고 묻는 그녀 목소리가 캄캄하게 떨린다

녀석은 교실 바닥에 침을 탁, 내뱉는다

“뭐라고 하냐? 저 씨팔년이”라며 빈정거린다

“당장 밖으로 나가!” 교사는 비명을 지른다

본드 흡입처럼 흐리멍덩해진 눈을 좍 찢으며

반 친구들을 휘, 둘러보고 난 학생은 말한다

“얘들아, 저년이 나보고 나가란다? 지가 나가지”

그녀는 절망마저 놓아버리고 그만 주저앉는다.

뿌연 형광등이 미친 교실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 이봉환 / 1961년 전남 고흥 출생. 전남대 졸업. 1988년 《녹두꽃》에 「해창만 물바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조선의 아이들은 푸르다』『해창만 물바다』『내 안에 쓰러진 억새꽃 하나』『밀물결 오시듯』. 현재 해남에서 교사로 재직 중.

 

참으로 끔찍하다. 차마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학교 교실의 현주소다. ‘군사부일체’, ‘스승의 그림자도 안 밟는다.’던 선생의 위상은 땅바닥에 추락한 지 오래이다. ‘자식보다 어린’ 학생 녀석이 어머니 같은 여교사에게 ‘씨팔년아’ 쌍욕을 퍼붓는다. 심지어 교사의 멱살을 잡거나 흉기로 위협을 가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선생에게 이렇게 하는 녀석들이라면 제 부모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마디로 후레자식들이다. 이러니 선생질 못 해 먹겠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그렇다고 학생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나? 인성교육이나 적성교육을 내팽개치고 오로지 살벌한 경쟁만을 부추기는 입시 위주 교육이 그 주범일 터이다. 아, 이 나라의 교육이 ‘절망마저 놓아버리고 그만 주저앉는다.’

/ 김선태 (시인·목포대 교수)

 

[편집] 2020.05.06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