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뜰보리수와 산뽕나무에 스쳐가는 단상
안타깝고 지루한 Covid19 사태가 잠잠해질 줄 모르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멀리 꽃 산행을 가서 나무와 풀꽃을 만나는 즐거움이 사라졌다. 동네를 한바퀴 산책하며 나무와 풀꽃을 관찰하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다. 오늘 산책길에서 뜰보리수와 산뽕나무를 만났다. 뜰보리수 은빛 이파리엔 내 유년시절의 꿈이 숨어있고 산뽕나무 열매엔 청년시절의 설움이 맺혀있기에 나는 이 두 나무를 나의 인생 나무로 삼아 늘 내 마음 속에서 키워왔다.
유년 시절 뛰어놀던 뒷동산에는 보리수나무가 참 많았다. 어느 날의 가을이었던가, 학교를 파하고 뒷동산 언덕에 올라 빨갛게 익은 보리수 열매를 맛보며 뛰놀던 그 때가. 성터 언덕배기 산동네엔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아이들은 산에 오르면 가난을 잊고 저 산너머에 있을 꿈과 희망을 키웠다. 뉘 집을 들어서도 반겨주던 이웃들이 있었고, 마음의 정 가득한 따뜻한 저녁이 있었다. 뜰보리수를 몇 그루 심어놓고 낙엽지는 가을에 빨갛게 익은 열매에 유년 시절 뒷동산에서 뛰놀던 내 모습 떠올리고 싶다. 차를 만들어 마시며 좋은 사람들과 추억을 함께 나누며 아름다운 가을을 음미하고 싶다.
이십대 황금 같은 삼년의 세월을 통째로 나라에 바치던 젊음의 시절, 사병식당과 FDC 올라가는 갈림길에 산뽕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었다. 나는 그 길을 지나갈 때면 그 커다란 산뽕나무를 습관처럼 올려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산뽕나무는 삭막한 군대 생활에 지친 내 마음을 아는 듯 늘 나를 반겨주고 위로해 주었다. 부대 내 민간인이 경작하던 논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그 무덥던 한여름 우렁차게 울어대던 매미도 지칠 때쯤이면 산뽕나무는 까만 열매를 다닥다닥 매단다.
한적한 오후 그 산뽕나무에 기어올라 오디를 몇 개 따서 먹으며 설음도 함께 삼키곤 했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오디 열매를 다닥다닥 매단 산뽕나무를 본 적이 없다. 외롭고 서럽던 군대시절 내 마음을 위로해 주던 산뽕나무를 나는 지금껏 잊어 본 적이 없다. 혹독한 시절 나의 벗이 되어 주었던 그 산뽕나무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대암산 산골짝 그 낯설고 물선 곳에 홀로 서있는 신병(新兵)들에게 여전히 마음의 벗이 되어 그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고 있을까?
보리수나무, 산뽕나무와 함께 추억을 소환하는 나무는 눈 녹은 산에 피어나는 진달래다. 중학생 시절, 봄이 오면 뒷동산에 올라 꽃망울 가득한 진달래 꽃가지를 한아름 꺾어와 항아리에 꽂아두고 봄의 향기를 느끼곤 했다. 진달래꽃 피어난 산언덕엔 노란 양지꽃도 함께 피어났었지. 김소월의 산유화를 읊조리며 오르내리던 뒷동산엔 올해도 진달래꽃이 저만치 혼자서 피어났을까?
동토의 땅 강원도 양구, 겨우내 쌓인 산골짝의 눈이 녹을 때쯤이면 대암산(大岩山)을 온통 연분홍빛으로 물들게 하여 우리 병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진달래꽃. 우리들의 벗이 되어 살을 에는 혹한의 추위와 모진 세월 함께 이겨내고 꽃망울 활짝 터뜨리던 너를 어찌 잊으랴. 너를 안고 내가 울던 그 눈물 많던 슬픈 시절을 어찌 잊으랴. 어느 봄날 감성 충만한 한 전우(戰友)는 부대 옆 산기슭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왔다. 삭막한 내무반에도 얼어붙은 병사들의 마음에도 환한 웃음꽃 피어나게 하던 진달래꽃을 올해도 어느 병사가 꺾어 왔을까?
나는 생태 탐사를 하면서 멋진 나무들과 아름다운 풀꽃들을 수없이 만났다. 감탄의 소리 절로 나왔던 울진 소광리의 명품 소나무 금강송, 울릉도 성인봉에서 본 너도밤나무, 제주도 한라산에서 만난 구상나무, 비자림숲과 황근, 윤선도가 귀향 가서 머물렀던 보길도의 난대림과 대나무숲, 군산 선유도에서 본 예덕나무 군락, 정선 동강의 비술나무와 난티나무, 서해안 어디선가에서 본 모감주나무 그리고 서울 옛 창덕여고 자리에서 살아가는 귀족 나무 백송(白松).
이런 명품 나무들도 내 가슴에 아름답게 남아있지만, 그래도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는 으뜸나무는 단연코 가난하던 유년기 시절 푸른 꿈을 심어주던 뒷동산 언덕의 보리수나무다. 그리고 버금나무는 스무살 젊음을 나라에 바치던 그 서럽고 혹독하던 시절,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손 내밀어 나를 붙잡아주던 산뽕나무다. 또한 학창시절과 군대 시절 추억이 서려있는 진달래꽃이다. 보리수나무와 산뽕나무 그리고 진달래꽃은 힘들고 서럽던 시절 나의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나무들이고 내 삶의 영원한 동반자다. 오늘 동네 산책길에서 마주친 뜰보리수와 산뽕나무가 봄날 저녁 내 심연(深淵)에서 잠자던 추억들을 일깨운다.
/ 2020.04.29 벚꽃 지는 어느 봄날에.. 김영택
◆ 모과의 반전 매력
사람들이 모과를 보고 네 번씩 놀란다고 한다. 먼저 못생긴 모양을 보고 과일이 왜 이리 못생겼나 하고 놀란다. 생선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옛말도 있으니. 그런데 모과의 향기를 맡아보고는 그 향기가 너무 좋아서 두 번째 놀란다고 한다. 향기가 너무 좋아 먹으려고 했다가 너무 맛없는 그 맛에 세 번째 놀란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못생기고 맛도 없는 모과를 차로 민들어 마시니 그 차 향기와 맛에 네 번째 놀란다고 한다. 모과의 반전 매력이다.
◆ 추록(追錄)
나는 중고교 학창 시절에 과학적 재능보다는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었다. 그런데 대학 진학 때 수학과 진학에 실패하여 뜻하지 않게 과학 분야인 생물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생물학은 강의 수업에 이어 많은 실험실에서의 실험실습과 산과 강으로 야외실습 활동을 해야 했다. 내향적 성격인 나는 남들과 팀을 이루어 활동해야 하는 이런 일들이 무척 싫었다. 차츰 적응해 갔지만 내가 왜 이런 적성에도 맞지 않는 엉뚱한 분야를 공부해야만 할까 라는 생각에 빠져 한때 방황하기도 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현직(現職)에서 물러나 돌아보니 생물학을 공부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비록 잠재된 나의 수학적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지는 못했지만 아름다운 나무와 풀꽃들을 만나면서 생태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어 관조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남들보다 나무와 풀꽃 이름과 사연들을 하나더 알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 곳곳에서 살아가는 멋진 나무와 풀꽃들을 만나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이제 어디를 가도 벗이 되어주는 나무가 있고 안부를 나눌 수 있는 나무와 풀꽃들이 있어 외롭지 않으니 이것만으로도 생물학을 공부한 보람이 아니겠는가?
/ 2020.04.29 김영택 씀
[오늘 명언] 행복은 종종 사소한 일에 관심을 기울일 때 생겨난다. 불행은 종종 사소한 일을 무시할 때 생겨난다.' ㅡ 빌헬름 부쉬
● 보리수 /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중에서)
성문밖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오늘 밤도 지났네 보리수 곁으로
캄캄한 어둠 속에 눈 감아 보았네
가지는 흔들려서 말하는 것 같이
그대여 여기와서 안식을 찾으라
안식을 찾으라
/ 2020.04.29 글 사진 김영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