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 벚꽃, 그녀에게 / 김종제
누군가를 저렇게 간절히 원하다가
상사병으로 밤새 앓아 누워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적 있느냐
누군가를 저렇게 원망하다가
눈물 하루종일 가득 흘려
깊은 강물 되어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를 저렇게 목 빼고 기다리다가
검은머리 한 세월
파뿌리 흰머리가 되어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를 저렇게 못 잊어 그리워하다가
붉은 목숨 내놓고
앞만 보고 행진해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를 저렇게 찾아다니며
사막의 빙하의 길
오래 걸어 신 다 닳아 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단 며칠이라도 얼굴 보여주려고
이 세상 태어나기를 원한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몸 눕혀 불길로 공양해 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목숨 바쳐
순교자의 흰 피를 뿌려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말없는 눈빛으로 다가가
속 깊은 우물이 되어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천년 만년 바람 불고 눈비가 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절대적인 꿈과 희망이 되어 본 적 있느냐
누군가에게 저렇게 전율이 감도는
노래와 춤이 되어 본 적이 있느냐
어제 벚꽃, 그녀에게
숨김없이 옷을 다 벗고
사랑한다고 고백해 본 적이 있느냐
● 벚꽃나무 / 유홍준
추리닝 입고 낡은 운동화 구겨 신고 마트에 갔다온다 짧은 봄날이 이렇게 무단횡단으로 지나간다 까짓 도덕이라는 거, 뭐 별거 아니지 싶다 봄이 지나가는 아파트 단지 만개한 벚꽃나무를 보면 나는 발로 걷어차고 싶어진다 화르르 화르르 꽃잎들이 날린다 아름답다 무심한 발바닥도 더러는 죄 지을 때가 있다 머리끝 생각이 어떤 경로를 따라 발바닥까지 전달되는지... 그런 거 관심 없다 굳이 알 필요 없다 그동안 내가 배운 것은 깡그리 다 엉터리, 그저 만개한 벚꽃나무를 보면 나는 걷어차고 싶어진다 세일로 파는 다섯개들이 라면 한 봉지를 사서 들고 허적허적 돌아가는 길, 내 한 쪽 손잡은 딸아이가 재밌어서 즐거워서 자꾸만 한 번 더 걷어차 보라고 한다
/ 2020.04.05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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