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수필산책] 「그믐달」 나도향 (2020.03.30)

푸레택 2020. 3. 30. 15:07

 

 

 

 

 

 

 

 

 

 

● 그믐달 / 나도향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해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 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 잡은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 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 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恨)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情)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 작가 소개

나도향(羅稻香, 1902~1927) : 본명은 나경손. 서울 청파동에서 출생하여 경성의전을 다니다 중퇴. 1922년 《백조> 동인으로 활동함으로써 문학활동을 시작한 이래, 초기 작품은 주로 낭만주의적인 환상에의 추구를 극단화시켰음. 그러나 <여이발사> 이후 환상을 거부하는 냉정한 시선을 유지함으로써 사소한 사건을 예리하게 관찰해, 조그마한 허위조차 용납하지 않는 놀라운 변화를 보이고 있음. 그 이후에는 주로 낭만주의적 사고방식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비판하는 길을 모색하던 가운데 <벙어리 삼룡이>를 통해 죽음을 낭만적 미학으로 승화시키고 있음. 그의 수필은 주로 이러한 후기의 경향을 구체적으로 대변하고 있음.

 

☆ 작품 해설

이 수필은 1935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작품으로 역시 달이란 자연물을 통해 정서를 기탁하는 탁정 (托情)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대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이 문학작품의 한 기능이라고 할 때 문학의 본질과 가장 잘 조응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물론 이 글에서 탁정의 대상은 달이다. 달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각각 독부, 여왕, 청상 등이 초생달, 보름달, 그믐달로 비유되고 있다. 이 가운데 작자는 특히 그믐달을 택하고 있다. 그믐달은 마악 영그는 달이 아니라 이지러지는 달이며, 넉넉한 달이 아니라 소멸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조촐하게 내뿜는 달이다. 이는 한국적인 정서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대상을 보는 새로움이란 기실 보편성을 바탕에 둔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흔히 사람들이 사랑하는 보름달이나 초생달이 아니라 한이 서린 듯한 그믐달을 사랑한다. 이러한 주제를 다른 달과 비교하여 여인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다. 초생달이 독부이거나 처녀와 같고, 보름달이 여왕과 같이 화려한 반면, 그믐달은 원부와 같고 쫓겨난 공주와 같은 한이 가득한 달인 것이다. 작가 자신이 한이 많기에 그 한스러움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한의 주제는 작가 개인의 몫이라기 보다는 한국 문학의 전통적인 정조이기도 하며, 작가가 몸담고 있는 낭만주의의 주요 경향으로도 볼 수 있다.

 

이 글은 단순한 진술에서부터 시작한다. 첫 문장을 통해 작가는 선명하게 자신의 주제를 드러내고 그러한 생각이 가능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서술의 방법은 주로 유추와 대조를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논리적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비약과 암시를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 이 작가의 낭만성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 남들이 많이 보아주지 않는 그믐달의 한의 정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는 낭만주의자들의 공통된 성향이었다.

♤ 그믐달 이외에 다른 달들은 어떻게 비유하고 있는가?

- 초생달은 독부이거나 철모르는 처녀요, 보름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인 반면, 그믐달은 원부요, 쫓겨난 공주요, 우는 청상과 같다.

 

[출처] 《고교생이 알아야 에세이》 발췌

 

/ 2020.03.30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