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시조감상]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박팽년,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길재 (2020.03.08)

푸레택 2020. 3. 8. 21:40

 

 

 

 

 

 

 

 

 

 

● 우리 시조(時調)를 찾아서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 박팽년(朴彭年)

 

세조는 끝까지 박팽년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했다. 박팽년의 재주가 아까워서였다. ‘까마귀가 눈비 맞는다 해서 희는듯 하지만 희게 되지는 않는다. 빛나는 명월은 밤이라해서 어두워지지 않는다.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 있겠는가? ’ 밝은 달은 자신을, 밤은 세조를 지칭하고 있다. 세조의 청을 일언지하 이「단심가」 한 수로 거절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던 날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후일을 기약하자는 성삼문의 만류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박팽년은 충청감사를 거쳐 형조판서로 있었다. 그러다 단종 복위 실패로 이렇게 국문을 당하게 된 것이다.

 

친국청에 나온 박팽년은 의연했다.

"모의에 가담하였느냐?"

"가담했으니 여기에 나오지 않았소이까. 나으리."

 

나으리라는 말에 세조는 또 한번 화가 치밀었다.

"네가 나의 녹을 먹었고 또 나에게 신이라 일컬었으니 너는 나의 신하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외다.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소이다."

 

세조는 충청감사 때 그가 올린 장계를 확인해보았다. 신하 신(臣)자 대신 거인 거(巨)자가 씌여 있었다. '신하' 신, 박팽년이 아니라 '거인' 거, 박팽년이었다. 원래 장계의 '臣'자는 신하를 낮추어 불러 작게 쓰는 법이다. 세조는 이를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녹도 성삼문처럼 창고에 고스란히 쌓아두었던 것이다.

 

금부도사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그를 보고 말했다.

"집을 잠깐 거두시오면 온 집안이 영화를 누리실텐데. 무슨 고집을 그렇게도 부리십니까?"

 

"더럽게 사느니 깨끗하게 죽는 것이 나으리니라."

 

기꺼이 형을 받았다. 아버지, 동생, 세살 짜리 아들까지 사형당했다. 이때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조정에서는 아들을 낳거든 즉시 사형시키라고 명령했다. 때마침 종도 임신 중이었다.

 

종은 비슷한 시기에 해산을 했다. 약속한 듯이 주인은 사내 아이를 낳고 종은 딸 아이를 낳았다. 종은 자기 아이와 부인의 아이를 바꿔치기했다. 박팽년의 사내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운 것이다. 성종 대에 이르러 이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성종은 이를 사면해주고 '일산'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해 주었다. 이 때문에 사육신 중 박팽년만은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경북 달성 묘골에는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부인 이씨는 관비가 되어 평생을 수절하여 일생을 마쳤다.

 

일찍이 단심가 한 수 시조를 남겼다.

 

금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금강(玉出崑崗)이라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모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한들 님마다 좇을소냐

 

아름다운 물에서 나지만 물마다 금이 나며, 옥은 곤윤산에서 나지마는 산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자는 남자를 따라야한다지만 님마다 이를 좇아야겠는가?

 

박팽년(태종17년,1417년 - 세조 2년,1456년).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으로 회덕 출신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성품이 차분하고 말이 없고 종일 단정히 앉아 의관을 벗지 않았다 한다.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고 영월 창절서원, 과천 민절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대전 광역시 동구 가양 2동에 대전 광역시 기념물 제1호 박팽년의 유허가 있다. 달성 묘골에는 사육신을 배향한 '육신사'가 있다.

 

인생은 혼자서 선택을 강요받을 수 밖에 없다. 인생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 삶도 죽음도 외롭고,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외롭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충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우리의 세상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 신웅순(시조시인, 중부대교수)

<대전일보 기사 발췌>

 

● 우리 시조(時調)를 찾아서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冶隱) 길재(吉再)

정종 2년(1400) 그의 나이 48세. 조정은 송도로 천도한 직후였다. 화려했던 고려의 서울, 송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심경이 얼마나 참담했으면 이런 시조를 노래했을까. 길재에게 태상 박사(太常博士) 를 제수했으나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하여 벼슬을 사양했다. 조정에서는 지조와 절개를 가상히 여겨 조신(操身)을 허락하고 식읍을 내렸다. 야은은 식읍으로 받은 밭 100결에 대나무를 심었다. 그의 절개는 이랬다.

 

만고의 충절, 만인의 사표는 이를 두고 말함인가. 조선 왕조 실록에 그의 충절 기사가 60여 차례가 넘었고, 행실은 만인의 교과서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에도 올랐다.

 

길재는 공민왕 2년(1353년) 경상도 선산군 고아면 봉계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매우 영민했다. 8세때 부친이 어머니와 함께 임지로 떠나게 되어 혼자 외가에 남았다.

 

어느날 남계(南溪)에서 가재를 잡았다. 어머니 생각에 석별가(石鼈歌)를 짓고는 슬피 울었다. 마을 사람들은 ‘시골에도 이런 아이가 있는 줄 몰랐다’며 그의 영특함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어렸을 때부터 효심이 깊었다.

 

10세 때에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갔다. 18세 때에 박분(朴賁)에게 논어와 맹자를 배웠고 송도에 올라와서는 성리학의 대가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 들어갔다. 권근과도 사제의 연을 맺었다. 이들과의 만남으로 야은은 성리학의 일대 계기를 마련했다.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했고 사마시에도 올랐다. 학문과 더불어 덕행은 깊어갔다. 권근은 ‘내게 와서 학문을 배우는 사람이 많지만 길재가 독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길재는 31세에 신면의 딸과 결혼, 이듬해 부친이 별세하자 삼년상을 마치고 금주에서 송도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명현들과 학문을 닦았다.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학문에 뜻이 있어 청주목의 사록(司祿)을 사양했다. 이 때 태종과 동문수학했고 교분도 두터웠으나 조선조 창업으로 이방원과는 길을 달리했다.

 

우왕 14년(1388)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 길재는 반궁(태학관)에서 고려조의 운명을 근심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용수산 동쪽 담장(나라)은 기울고

미나리 밭(泮宮)가에 푸른 버들은 축 쳐졌네

몸은 비록 남다른 것 없지마는

뜻은 백이·숙제처럼 마치고 싶구나

 

길재는 이렇게 고려의 충절을 지키고자 했다. 많은 귀족과 자제들이 다투어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두문동 3절사(節士) 조의생·배을서 같은 인물도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종사랑(從事浪)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38세 때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 학문에 몰두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계림부 교수(鷄林附 敎授)와 안변 경사 교수(安邊 經史 敎授)에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우왕이 하세하자 삼년상을 입었고 그의 나이 40세에 고려의 멸망을 향리에서 맞았다.

 

이후 본격적인 교육 활동을 전개했다. 경전 토론, 성리 심학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양반, 미천한 자제할 것 없이 하루에 100명이 넘었다.

 

문하에는 성리학의 중추 사림파 김숙자가 있다. 절의 정신은 아들 김종직에게 전해지고 김일손, 김굉필, 정여립, 조광조, 조식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선비 정신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임진왜란의 의병도 이러한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길재는 유학의 사표로 평생을 바쳤다. 그는 2남 3녀의 자녀와 수백명의 선비 제자를 남기고 1419년(세종 원년) 4월 12일에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절개는 백이·숙제요 효는 공문의 증자였다. 만세 충절의 사표였다. 금오산 동쪽 낙동강 서쪽 오포(烏浦)벌에 그의 묘소가 있다.

 

사림 각지에 수 많은 추모 서원과 비석들이 있으나 충청도에는 금산 부리리에 ‘청풍사’가 있고 계룡산 동학사에는 고려 삼은을 제향한 ‘삼은각’(三隱閣)이 있다. 길재의 고향 구미에는 절의의 사표 채미정이 있다.

 

물질 만능에 정신이 피폐해져가는 이 시대. 우리 선비 정신이야말로 반드시 되짚어보야할 무형의 자산이다. 나라를 지탱해왔던 선비 정신은 거대한 물질의 광풍에 온데 간데 없이 쓸려갔다.

 

님이 가신지 600년이 되었다. 조선조 창업, 임진왜란, 구한말, 일제시대, 미군정, 좌우 갈등, 남과 북, 육이오, 군사 독재, 5.18 등의 낱말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갔다.

 

님이 참으로 그리운 때이다.

 

/ 신웅순(시조시인, 중부대교수)

<대전일보 기사 발췌>

 

♤ 2020.03.0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