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제하 (2020.02.19)

푸레택 2020. 2. 19. 22:27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이제하

 

계해년(癸亥 : 1983)이 저물던 12월 중순 해질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물치 삼거리에 잠깐 선 속초 시내버스에서 몇 사람이 내렸다. 방한 점퍼들을 여미고 벙거지에 륙색을 메거나 세면도구용 가방을 달랑 손에 든 사내 서넛은 산행(山行)길인 듯, 엇 추워 뭐라고 떠들면서 길가 가게 쪽으로 곧 몰려 걷기 시작했고, 뒤따라 내린 중늙은이 하나도 시내에서 횟감을 구해 오는 모양으로 꾸러미를 든 채 어기적거리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내린 사내 하나만이 전차에 받힌 듯한 얼굴을 하고 우두커니 그 자리에 못박힌 채 서 있었다. 코르덴 점퍼에 옛 시골 면서기의 그것 같은 낡은 가방을 늘어뜨린 모습으로 버스 꽁무니가 사라진 쪽을 눈여겨보고 있는 눈치였으나 실은 길 건너편을 그는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닿는 한 온통 그것뿐인 듯한 바다가 통째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거의 충동에 쫓기다시피 서울 터미널에서 차에 오른 이래 그 동안 심심치 않게 물을 보며 흔들려 온 것은 사실이지만, 좀전 멈춘 차창 너머 갑자기 들이닥친 바다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자신도 모르는 힘에 떼밀려 마지막 순간에 급하게 그가 차에서 몸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무어랄까, 그것은 창졸간에 앞을 막아 선 절벽과도 같았다.

서울 바닥의 그것 같진 않아도 관광버스니 뭐니 그런 차량들이 그대로 끊이지 않는, 그 부근만 4차선의 세 배쯤 돼보이는 더 넓은 광장 같은 아스팔트 한끝에서 곧바로 물은 시작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진저리를 한번 치고, 주춤거리며 낭떠러지를 피하듯 조심스럽게 그는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행락객들을 위해선지 길 중간중간에는 시멘트 화단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기도 했으나 딛고 선 바닥이 모로 서는 듯한 세찬 바람 속에서 그것들은 한없이 왜소하고 짜부라져 보였다. 두어 자 높이의 길 축대를 내려서자 십여 미터쯤 돼보이는 폭의 자갈사장 속으로 그는 걸어들어갔다.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그가 허리를 굽혔을 때 정지! 움직이지 마라, 하는 고함이 들렀다.

 

"세 발짝 물러서! 그냥 두고."

소총을 겨누고 다가온 초병은 그가 열어 놓은 가방을 기웃이 들여다보더니 표정이 누그러졌다.

"이게 뭐요?"

"제미..." 하고 그가 말했다.

“보면 몰우? 난수표하고 미숫가루..."

"이 아저씨가?"

가방 속이래야 내의 한 벌과 세면도구와 비닐봉지 하나밖에는 없다. 초병이 쭈그리고 봉지를 뒤적이고 있을 때 넌 벌써 죽었어,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간첩이라면 이 틈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가방 속에 무기를 넣고 다니는 얼간이가 이 세상에 있을까.

"뭐요, 이거? 가루 같은데 석회 아뇨?"

봉지 아구리에서 꺼낸 손가락을 문대며 들여다보고 있는 초병은 언짢은 심사로 바라보다가 그는 작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미숫가루라고 했잖우?"

"이 아저씨가 정말? 어, 뼈군"

"뿌리고 빨리 올라가슈"

"......"

"... 빨리 올라가슈."

십오륙 년 전 훈련병 시절에, 안전펀을 뽑은 수류탄을 든 채 어쩔 줄 몰라하다가 엉뚱한 곳에 투척해 동료 하나의 팔을 날려 버린 사고를 그는 목격한 일이 있다. 주위에서 아무리 발을 구르고 제 방향을 손가락질하며 외쳐 대도 그 훈련병은 더욱 시뻘게진 얼굴로 게걸음만 치고 있었는데, 초병에게서 봉지를 채뜨려 받자 그는 자신이 홉사 같은 꼴이 된 것 같아 울화통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가방을 주워 들고 두말없이 그는 길 쪽으로 올라갔다.

'매운탕'이라고 종이로 유리에 써붙인 두어 집 간이식당의 들창이 길 건너 먼빛으로도 바람에 덜컹거리고 있다.

그가 왼켠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까 버스에서 같이 내린 예의 사내들이 난로를 끼고 앉아 술추렴을 하고 있다가 그를 돌아봤다. 륙색을 메었던 사내가 안면이 있다는 얼굴로 쉬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그는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맹꽁이의자에 몸을 앉혔다.

"이 자식이 왜 여태 안 와? 실패한 것 아냐?"

"쌔고쌘 게 그것들인데 아무리... 그 반대겠지."

"반대라니?"

 

(중략)

 

"받아!" 하고 넋두리를 외던 무당이 번쩍이는 눈으로 다시 소리를 질렀다. 간호원이 얼굴이 시뻘게졌다. 밀어붙이듯이 무당은 계속 부채를 내밀었고, 거기 따라 허우적대듯이 여자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가방을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부채를 잡은 여자의 몸이 와들와들 떠는 것이 보였다. 여자의 뒤통수에서 모자가 떨어졌다.

"야아, 뭐 하는 거야, 저거 신 내리는 거 아냐?"

"저런 간호원이군"

배 난간에 몰렸던 구경꾼들 틈에서 감탄하는 소리와혀 차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죽은 아내의 것인지 간호원의 것인지 어디선가, 여보! 하는 절규 소리가 들려 왔다.

배에서 뛰쳐나가려고 그가 마악 한 발을 내디뎠을 때, 여자의 눈빛이 변했다. 여자가 한 손으로 옷을 잡아뜯고, 다른 손으로 부채를 혼들면서 어느덧 춤추는 걸음이 되었다.

기우뚱하더니 물 위로 배가 떴다. 콰르르 하고 배 밑창으로 썰물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눈 덮인 맞은편 산봉 위로 거대한 손바닥 하나가 걸렸다.

그것이 꿈인지 환각인지 분간을 못 한 채, 여태껏 무심히 보아 오던 자신의 손바닥의 금들이 세 개의 방형(方形)을 그리고 어지러이 엇갈리며 달리고 있는 것을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보고 있었다.

(『어느 낮선 별에서』, 청아출판사, 1983)

 

☆ 이제하 소설가

▲ 1937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

▲ 1950년 마산동중학교 입학

▲ 1956년 마산고등학교 졸업

▲ 1956년 홍익대 조각과 입학

▲ 1959년 《신태양》에 소설「황색의 개」당선

▲ 1985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로 이상문학상 수상

 

● 개 같은 세상에서의 꿈꾸기 / 황도경(문학평론가)

 

'개 같은 세상', '개 같은 인생', 이제하의 소설은 내게 이런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세계에서 거의 모든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개이고, 원숭이이고, 개구리이고, 두꺼비이고, 멧돼지이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 역시 이 섬뜩한 동물원의 풍경으로부터 우리들 스스로가 자유롭지 않음을 깨달으며 '나는 개다'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명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요컨대 그의 소설은 개가 되어 버린 이 세상과 우리들 자신에 대한 암담한 기록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가 「황색의 개」로 등단했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홍미롭다. 이 작품은 전쟁중에 불구가 되어 제대한 주인공이 차에 뛰어들어 죽기로 결심을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뛰어든 차가 전신주를 들이받고 뒤집혀서 그 운전수가 죽게 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나'에게는 죽음을 '결행'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대신 그는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게 되는데, 이때 그는 '나는 내가 아니었'고 전혀 딴 것에 속해 있는 '어떤 더러운 물건'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 고는 거리에서 본 누런 빛깔의 개처럼' 어디론가 끌려가게 된다. 이때 '개 같은 나'는 사람다움을 상실한 채로의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그가 전쟁터에서 성기가 잘려 나가 불구가 된 것도 사실은 이와 같은 인간성 상실과 연관되어 있다. 그가 전투에서 사로잡은 여자 포로를 총으로 쏴버렸을 때 이미 그는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신을 잃은 것이었고, 이 연장선에서 그는 불구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하의 소설에서 불임은 이 같은 인간성의 상실, 혹은 개가 되어버린 존재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 「유자약전」에서의 유자나 「밤의 창변」에서 자살한 아내도 불임증이 있고, 「황색의 개」에서처럼 「밤의 창변」에서의 '나'도 고자가 되어 있으며, 「용」에서의 '나'도 성기능이 불능인 것으로 암시되다가 박갑종의 딸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이제하 인물들의 불구성은 인간다움을 상실한 혹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의 불모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서 '인간'을 빼앗긴 채 네 발로 기는 짐승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인간'을 지키는 방법은 죽는 것과 미치는 것 두 가지뿐이다. 전쟁중에 비행기 포탄에 맞아 죽은 욱이 어머니와 상사에게 맞아 죽은 욱이, 물에 빠져 죽은 '나'의 누이(「손」), 위암으로 죽은 유자(「유자약전」), 죽은 어머니(「용」), 축대에 깔려 죽은 계모, 물에 빠져 죽은 영순이, 병으로 요절한 아내(「소렌토에서 」), 죽은 짱구 엄마(「한양고무공업사」), 죽은 기순이와 죽은 아내(「환상지」), 총에 맞아 죽은 오궁발 시(「근조」), 죽은 아내(「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들은 이제하소설에서 짐승이 되는 것을 모면한 다행스런 인물들이다(이들이 대개 여성이라는 사실은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제하 소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 혹은 남성과 여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 이들은 '살 수가 없다.' 한편 살아서 짐승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자 한 자들은 '미쳐 있다.' 「근조」의 오궁발 시인이나, 죽은 아내와 호텔에서 빨래를 했다는 「환상지」의 주인공, 기합을 받다가 소총을 집어 든 「손」에서의 '나', 상관한테 대글고서 배트를 50대나 맞고도 훨휠 날아다니던 「유자약전」의 어떤 시인, 「한양고무공업사,에서 광 속에 갇혀 있는 키다리가 그들이다. 이은 짐승이 되는 것을 모면하는 대신 미쳐 버린다.

이제하 소설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들은 이처럼 미쳐 버리거나 죽지도 못하는, 그리하여 서서히 짐승이 되어 가는 인물들이다.

 

(중략)

 

실질적인 행위 주체로서의 인물은 거의 언제나 문장 말미에 가서야 나타난다. 이제하의 문장은 처음부터 대상의 한 부분을 무턱대고클로즈업시켰다가 점차 뒤로 물러나면서 나중에서야 전체 윤곽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씌어진다. 문장 서두에 나타나는 행동이나 상황에 대한 설명은 마치 모자이크된 그림의 한 조각과 같아서 그것의 실질적인 행위 주체나 수식되는 대상이 문장 말미에 나타날 때에야 비로소 전체의 그림을 드러낸다. 이제하의 소설이 난해하다는 것은 그의 소설 세계가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뿐 아니라,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조각그림 맞추기처럼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이와 같은 서술방식에서도 기인한다. 그리고 이때 행위의 주체로서의 인물은 언제나 맨 끝에 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언제나 상황이나 행동 자체에 밀려나 있는 것이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빗어 소퉁맞은 연두색 빗을 가장자리에꽂았으나 그 뒷통수에 깊이 숨은 사마귀 한 점의 기억과 아름다움을 지울 수는 없다. 나는 울고 싶었다. (「임금님의 귀」, 133쪽)

내가 떠나려고 하자 갑자기 고개를 내두르고, 꾸벅꾸벅 졸듯이 하면서 김선생은 소리 없이 느껴 울기 시작했다.

(「임금님의 귀」, 139쪽)

그때마다 장군은 다 안다는 듯이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드디어 장군의 팔에 털을 비비며 훌쩍이고 울기 시작했다.

(「임금님의 귀」, 142쪽)

 

이 예문들은 「임금님의 귀」에서 '나'와 원숭이가 된 김선생, 그리고 원숭이인 '나'의 울음을 묘사하고 있는 대목들이다. 인간과 원숭이가 서로의 위치가 바뀌게 된 상황을 통해 원숭이가 되어 버린 인간 상황을 그려 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이들 '나'와 원숭이의 울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들이 완전하게 원숭이가 아니라는 암시를 받게 하고 있다. 아름다움에의 갈망, 훼손되지 않은 영혼에의 꿈, 자신을 돌아보는 자책의 눈길, 이들의 울음은 이러한 것들에 연유된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인 것이다. 사실 이제하의 인물들은 곧잘 '운다.' 그리고 이때 이들은 짐승이 아니다. 「태평양」에서는 아들의 전사 통지를 받은 날 단 위에서 훈시하던 교장이 울고, 「한양고무공업사」에서는 개가 오징어 찌꺼기를 주워먹고 있던 곳에 오줌을 누다 계집애를 죽게 할 뻔한 짱구가 질질 울기 시작하며 짱구네 집 대문까지도 우는 듯이 보인다. 「유자약전」에서는 정신병원에 갇힌 한 시인의 시와 용기와 믿음, 싸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유자가 '나'에게 매달려 울기 시작하며, 「환상지」에서 아내 역시 노상 울기만 하고 '나'와 아내는 갓난애의 울음 소리를 듣는다. 「근조」에서는 자신의 시집 출간을 기념하는 오찬희와 무명 시인의 무덤 앞에서 주인공이 목을 놓아 울고, 「용」에서는 박갑종이 아들을 자수시키라는 '나'와 형사의 말에 울기 시작한다. 이들의 울음은 거꾸로 된 세상 안에서의 대책 없는 절망감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 거꾸로 된 세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자의 인간적 절망감이다. 이들의 울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들의 가슴속 깊이 일렁이고 있는 인간이고 싶다는 욕망을 확인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는 개가 아니다, 라는 인식을, 아니 그 인식마저 잃지는 않으려는 안간힘과도 같이 들린다. 이들이 울 때 이들은 아직 인간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하의 소설은 우리는 개다, 라는 현실과 우리는 개가 아니다, 라는 꿈을 동시에 담고 있는 셈이다.

'질식하지 않으려면 함께 미쳐야만 하는'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평행봉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제하의 인물들은 꿈을 꾼다. 유자가 종일토록 잠만 잔다든지 「용」의 주인공이 M시에서 제일 먼저 영화관을 찾는 것 등은 개 같은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이제하식 대웅방식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잠겨 있는 듯 보이는 잠과 환상의 세계는 현실과 등진 채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꿈을 발판으로 수면을 향하여 떠오르려고 부심하는'(「유자약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하는 그 꿈의 힘을 믿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가 믿는 작가란 그 꿈의 힘으로, 우리 모두가 개처럼 으르렁대고 있을 때 훼손되지 않은 영혼과 삶에의 꿈,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홀로 외치는 자이다. 그는 불침번이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 2020.02.19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