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창백한 달」 송병수 (2020.02.10)

푸레택 2020. 2. 10. 10:35

 

 

 

 

 

 

 

● 창백한 달 / 송병수

 

이른 아침이다.

아래층에서 전축을 요란하게 틀어 댄다.

딸 옥주의 짓이다.

신들린 무당의 푸닥거리 같은 팝송가락이 온통 집안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ㅡ 슈가, 오호 호니 호니…

톰 존스라나 누구인지는 어정쩡하지만 참 지랄 같은 노래다.

도무지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 소리에 황선애 여사는 잠을 깼다. 밤새도록 뜬눈으로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간신히 든 잠이다. 한나절이고 하루 종일이고 내처 잘 판이었는데 영 잡치고 말았다.

망할 것, 대학 졸업을 앞둔 다 큰 계집애가 철따구니없이 이른 아침부터 저게 무슨 짓이람. 생각 같아서는 버럭버럭 악이라도 쓰며 역증을 내고 싶었지만 황선애 여사는 도무지 그럴 만한 기력이 나지 않는다.

밤새도록 흠씬 두들겨맞은 것처럼 천근만근 늘어붙은 몸뚱이가 마음 따라 움직여 주지 않는다. 설사 악을 쓴다 해도 황선애 여사의 골수에 맺힌 분통이 가셔질 리도 없다.

ㅡ유아 마이 캔디 걸...

단말마의 절규 같은 가락이 귀따갑게 이어진다.

"누나아ㅡ 시끄러워 죽겠어ㅡ 볼륨 좀 줄여ㅡ "

아들 진이의 짜증어린 소리가 들린다. 국민학교 졸업반인 그 녀석은 제 누이년과는 영 딴판이다. 보나마나 녀석은 할머니가 대견히 지켜보는 안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지랄 같은 소리가 시끄러워 참다못해 저 짜증인데 누이년은 들은 척도 않는다.

ㅡ앤드 유 곳 미 왠딩 유...

숫제 멱을 따는 것 같은 기성의 연속이다.

ㅡ슈가 슈가... 그 가사하며 창법이 저속하고 난잡하기 이를 데 없다.

하이든이나 슈베르트를 감상하는 것이라면 또 모르겠다. 소위 대학 졸업을 앞둔 지성인의 감성이 저렇게도 천박할 수가 있을까. 게다가 나이가 적은가. 그 애가 벌써 스물둘이지 아마 저런 딸이 조용히 피아노를 연주한다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학구적이고 탐구적인 것에 열중한다면 얼마나 고맙고 대견할까.

황선애 여사는 탄식을 토하며 억지로 눈을 찡그려 감는다. 잠이 올 턱이 없다.

ㅡ호니 오호 슈가 슈가...

식인종의 주문(呪文) 같은 야릇한 기성이 숨넘어갈 듯 이어진다.

보나마나 뻔하다. 옥주는 제 방을 숫제 걸어 잠그고 잠옷바람으로 소파에 처박혀 두 다리를 보조의자에 걸쳐 논 채 신들린 사람처럼 어깻짓 고갯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애야 옥주야ㅡ 문좀 따라, 문 좀ㅡ 다 큰 계집애가 꼭두새벽부터 한다는 짓이 원, 그게 푸닥거리두 아니구 경 읽는 소리두 아니구, 무슨 미치광이 소리냐, 시끄러워 죽겠다ㅡ

할머니가 역증스레 옥주를 나무란다. 그러나 전축 소리는 여전히 요란하다.

"이건요ㅡ 서양 니나노예요 니나노ㅡ"

"니나논지 장타령인지 어서 집어치지 못햇!"

할머니의 노성과 함께 빗자루로 방문을 때리는 소리가 전축 소리보다 더 요란하고 시끄럽게 울린다.

"에이 참 내... 이 집 안에서는 맘대로 되는 게 없으니, 아이 답답해ㅡ"

토라진 옥주의 투정과 함께 전축 소리가 뚝 그친다.

갑자기 집 안이 조용하다.

황선애 여사는 연신 장탄식이 절로 토해진다. 아무래도 가슴속에 도사려 맺힌 울화가 가셔지지 않는다.

몸뚱이가 온통 쑤시고 골머리가 빼개질 것처럼 아프다.

어젯밤 홧김에 거푸 마신 양주 몇 잔에다 잠을 청하기 위해 과용한 수면제의 범벅이 심신을 꿇린 모양이다.

자꾸만 헛구역질이 나고 사지는 물먹은 솜뭉치처럼 나른하다.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신현기 사장의 그 소행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3천만 원ㅡ 그것이 누구의 어떤 돈이라고 신고를 했단 말인가.

아무리 따져도 그 돈은 사채(私債)랄 수는 없다.

황여사에게 그 돈은 전재산이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피땀을 흘려 모았다거나 하는 그런 유의 돈이 아니다. 피를 짜고 살을 가르고 뼈를 깎았다는 식의 지독스러운 표현도 오히려 무색하다.

아무튼 그 엄청난 돈을 황여사는 신사장에게 아낌없이 내준 것이다.

숫제 거저 준 거나 다름없다. 대차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달리 영수증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토록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의 군 동기급들이 각계 요로에 있어서 설립인가나 차관승인 교섭은 맡아 논 거나 다름없지만 운동자금부터가 궁하다는 하소연이다.

황여사는 두말하지 않고 그가 필요로 하는 운동자금을 쾌척했다.

그가 장담한 대로 설립인가는 쉽사리 났으며, 그는 분주하게 외국을 내왕하여 유명한 메이커와 기술제휴를 맺고 엄청한 액수의 차관을 얻어 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천성의 교제수단을 발휘해서 기업육성보조금도 거뜬히 융자받았다.

그쯤이면 더 볼 것도 없이 전도는 양양하다.

신바람이 난 것은 정작 신현기 사장 당사자보다도 그를 뒷바라지하는 황여사였다.

황여사는 교외에 묵혀 두었던 땅을 팔고 자신이 경영하던 일련의 사업들을 깡그리 정리하였다.

자그마치 3천만 원.

황여사의 전재산인 셈이다. 그 엄청난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달리는 내자(內資)에 충당했다.

공장은 가동과 함께 장사가 잘됐다. 물론 오랜 기반을 바탕으로 대량생산을 하고 있는 기존 대메이커와 경쟁을 하기에는 어림도 없이 빈약하지만 신흥메이커로서는 예상 외로 톡톡히 재미를 보는 편이었다.

신사장의 유리한 안면과 타고난 교제수완이 주효해서 학교의 급용 빵과, 군납(軍納)의 길도 쉽사리 틔어져 기업은 날로 번성했다.

그럭저력 차관 거치기한이 지나 상환기에 이르자 달릴 수밖에 없는 운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황여사는 예전 사업가 시절의 두터운 안면과 신용을 동원해서 3천만 원의 사채를 끌어들였다.

사채 3천만 원ㅡ 순수한 신고 대상액은 그뿐이다.

거기 황여사가 투자한 3천만 원은 그것이 얼마만큼의 대자본으로 불어났든 황여사는 추호도 욕심한 바 없으니까, 바로 신사장 자신의 자본이지 결코 사채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사장은 황여사의 그 애틋한 신의를 무참히도 짓밟은 것이다.

그런 수가 있단 말인가...

황여사는 크게 몸부림을 치면서 단말마의 비명 같은 피맺힌 절규라도 하고 싶다.

몇 잔째인가. 그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켜 빈잔을 내동댕이치면서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왔다.

무엇엔가 다급하게 쫓기는 것만 같다. 그러나 막상 갈 곳이 없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몸뚱이가 후들후들 떨린다.

와락, 구역질이 난다. 빈속에 분수 없이 마신 그 독한 술 때문만은 아니다. 순간 황여사는 너무나도 엄청난 자신의 변화를 직감할 수가 있었다.

분명, 신현기 그 사나이의 씨를 잉태한 것이다.

황여사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놀랄 기력도 없었다.

어디선가 곡명 미상(曲名未詳)의 그 지랄 같은 팝송이 은은히 들려온다. 언제 들어도 그게 그 소리만 같고, 원시인의 지극히도 저열한 흥타령 같은 그 난잡한 가락이 하도 귀에 익어서인지 반갑기조차 한 것은 웬일일까ㅡ

현란한 수은등 저쪽에 광택 잃은 달이 댕그러니 걸려 있다. 내일 또다시 찬란한 태양이 솟아 오르면 여지없이 사그라져 버릴 가련한 운명을 지레 겁내는 것일까. 어쩐지 달은 창백하다.

정녕 지레 겁나는 것은 황여사 자신의 기구한 운명이다. 아무래도 또 하나의 유복자를 낳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불쑥불쑥 인다.

그러니까 신현기 그 사나이를 영영 못 보게 될 운명의 날이 어김없이 미구에 닥칠 것이 아닌가...

달은 여전히 창백하다.

 

☆ 송병수 소설가

▲ 1932년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

▲ 1950년 군 입대 참전, 그후 한양대학교 졸업

▲ 1957년 《문학예술》에 단편「쇼리 킴」당선

▲ 1964년 「잔해」로 동인문학상 수상

▲ 1974년 「산골 이야기」로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

 

♤ 2020.02.10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