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쑈리 킴」 송병수 (2020.02.08)

푸레택 2020. 2. 8. 13:02

 

 

 

 

 

 

 

 

● 쇼리 킴 / 송병수

 

바로 언덕 위, 하필 길목에 벼락맞은 고목나무(가지는 썩어 없어지고 꺼멓게 그을린 밑둥만 엉성히 버틴 나무)가 서 있어 대낮에도 이 앞을 지나기가 께름하다. 하지만 이 나무 기둥에다 총 쏘기나 칼 던지기를 하기는 십상이다. 양키들은 그런 장난을 곧잘 한다. 쑈리는 매일 양키 부대에 가는 길에 언덕 위에 오면 으레 이 나무에다 돌멩이를 던져 그 날 하루 ‘재수 보기’를 해 봐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세 번 던져 한 번도 정통으로 맞지 않았다. 아마 오늘은 재수 옴 붙은 날인가 보다. 재수더럽다고 침을 퉤- 뱉고, 쑈리는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언덕 아래 넓은 골짝에 양키 부대 캠프들이 드믄드믄 늘어서 있다. 저 맞은쪽 한길 가에 외따로 있는 캠프는 엠피(MP, 미국 육군의 헌병)가 있는 것이고, 그 옆으로 몇 있는 조그만 캠프는 중대장이랑 루테나(lieutenant, 초급 장교)랑 싸징(sergeant, 하사관)이랑 높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캡틴 하우스 보이인 딱부리 놈이 바로 게 있다. 이쪽 바로 언덕 아래에 여러 개 늘어선 캠프엔 맨 졸때기 양키들뿐이다. 쑈리가 늘 찾아가는 곳은 이 졸때기 양키들이 있는 곳이다. 거기엔 밥데기[쿡], 빨래꾼[세탁부], 이발장이 쩔뚝이랑 몇몇 한국사람도 있지만, 쑈리는 그들보다 양키들하고 더 친했다. 거기 졸때기 양키들은 몇 사람만 빼놓곤 모두 몇 번씩 따링 누나하고 붙어먹은 일이 있어, 아무 때고 쑈리가 가기만 하면 ‘웰컴 쑈리 킴’이다. ‘김’이라는 멀쩡한 성을 양키들은 혀가 잘 안 돌아가 ‘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양키들이란 참 재미있는 자들이다. 근처에 얼씬만 해도 뭐 쑈톨(stole, 도둑질)이나 해 가는 줄 알고 “까뎀뽀이, 가라!”고 내쫓는 뚱뚱보 싸징이나, 검문소의 엠피 같은 깍쟁이 놈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양키라면 한국 사람들보다 모두 좋았다. 그렇다고 뭐 먹다 남은 닭다리나 초콜릿 부스러기 따위를 얻어먹는 맛에서가 아니다. 양키들이 어른답잖게 말발굽쇠 던지기랑 화약 터치기랑 어떤 놀이든(돈내기 포커 노름만 말고) 버젓이 한몫 붙여 주는 게 좋단 말이다. 어떤 땐 슬며시 으슥한 데에 불러다가 사타구니를 까내 놓고 그것을 좀 주물러 달라거나 흔들어 달라고 징글맞게 놀 때도 있지만, 그 장난만 말곤 양키들이 노는 장난은 뭣이고 다 신나는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코흘리개들이나 할 장난이지만 말발굽쇠던지기나 화약 터치기 따위를 할 땐 게서 더 재미있는 게 없었다. 서울서 고작 파커 만년필이나 론손 라이터를 날쳐다가 왕초 몰래 똘마니들끼리 팔아먹던 재미나, 피엑스(P.X., 군대 내의 매점) 앞에서 깔치들에게 매달려 한 푼 달라고 생떼를 쓰다가 옷자락에 타마유를 슬쩍 발라 주던 그 때의 재미 따위는 이젠 생각해 보면 참 시시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보니 사람 사는 집이라곤 통 없는 일선 지구 산골이지만, 진작 서울서 이 곳에 오길 참 잘한 것이다. 예서 양키들에게 양갈보나 붙여 주고 그럭저럭 얼려(어울려) 지내다가 딱부리처럼 하우스 보이라도 되기만 하면 그 땐 팔자 고치는 거다. 뭣보다도 이 곳엔 뭐 날쳐 오라고 야단 치는 왕초도 없거니와, 어디서 뭘 날치거나 쑈톨질을 안 해도 쓸 만한 건 양키 부대에 쌓여 있어 좋다.

양키들이란 먹을 것 입을 것 워낙 흔하니까 그들이 먹다 쓰다 남는 것만 얻어도 쑈리는 같이 있는 따링누나하고 둘이서 실컷 먹고 쓰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 찌꺼기나 얻어먹는 데데한 짓은 아예 안 한다. 그저 하루에 한두 놈씩 뒷구멍으로 슬쩍 꾀내어 따링 누나에게 붙여 주기만 하면 된다. 이따금 재수 좋게 전방에서 처음 온 양키가 걸려들기만 하면 그건 숫제 노다지보나 다름없다. 처음 색시 맛을 들여놓으면 한 보름 동안은,

“쑈리 킴, 캄앙...”

하며 몸이 달아 줄줄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그런 놈을 슬금슬금 잘 궈 삶기만 해 봐라, 그냥 박하 사탕이랑 레이션(군대에서 배급되는 휴대용 식량)이랑 마구 생긴단 말이다. 여기 수송 중대 졸때기 양키들도 따링 누나가 서울서 처음 왔을 때엔 한꺼번에 여남은씩 몰려들어 저희끼리 차례를 다투곤 했지만 그 땐 참 신바람나게 수지가 맞았었다. 씨레이션이 통째로 생긴 것도 그 때였다.

요새는 모두 따링 누나에게 맛을 볼만큼 다 봐놨고 또 웬만큼 약아질 때도 돼놔서 꽤 인색해졌지만 그래도 하루에 어수룩한 놈 하나씩만 잘 주무르면 달러 다섯 장은 고스란히 떨어지는 것이다. 오늘은 단골 양키라도 꾀내야지... 생각하는 동안 쑈리는 부대 앞에 이르렀다.

캠프마다 조용하다. 마당에 차가 없는 걸 보니 또 물건을 싣고 전방에 가서, 저녁때가 다 됐는데도 아직들 안 돌아온 모양이다. 드럼통을 세워 만든 정문 앞에 보초병 혼자 하품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은 하모니카 잘 부는 뾰죽코가 보초다. 뾰죽코는 혼자 심심했던 판에 너 잘 왔다는 듯,

“쑈리 킴!”

하고 어깨를 쓸어 주며 청하지도 않은 담배까지 준다. 검둥이들이 잘 피우는 꺼먼 잎담배다. 이게 다 따링 누나에게 꿍꿍이셈이 있어 제딴엔 한턱 쓰는 걸 게다.

“땡큐!”

하며 받아 넣고 쑈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중략)

 

쑈리는 한참 마주 쏘아보기가 싱거워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이 때, 저 아래 아까 엠피가 왔던 곳으로부터 쩔뚝이가 땅구덩이로 가는 게 보인다. 놈은 서슴지 않고 구덩이로 들어간다.

“저 자식이...”

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 치며 쑈리는 쫓아 내려갔다. 딱부리는 뒤따라 내려왔다.

찔뚝이는 구덩이에서 뭣을 움켜쥐고 나오며 쑈리를 보자 씽긋 웃는다. 따링 누나가 꼭 가지고 오라던 그 팔백 달러 뭉치를 움켜쥐고 있다.

“남의 것 왜 훔쳐 가느냐.”

고 쑈리는 앞을 막아섰다.

“이게 양키 물건이지 네 것이냐.”

고 비쭉이면서 놈은 달아나려 한다. 쑈리는

“이 도둑놈의 자식, 이리 내라."

고 욕을 하며 놈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랬더니 놈도 눈을 부릅뜨며

“이 새끼가 왜 귀찮게 구느냐.”

고 주먹으로 내지르고는 쩔뚝거리며 달아난다. 얻어맞은 코에서 금세 피가 주르르 쏟아져 쑈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고만 있던 딱부리가 제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주며,

“우리 함께 패 주자.”

고 외려 더 분해했다. 정말 둘이 덤벼 죽여 버리고 싶다. 아마 저 놈이 이럴려고 엠피에게 따링 누나를 잡아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때 진짜 총만 있다면 놈을 쏴 죽이고 싶도록 분하다. 문득 즈봉 주머니에 아까 던질까 말까 하다가 넣어 둔 돌멩이 생각이 난다. 쑈리는 냉큼 돌을 꺼내 저만치 가는 놈에게 힘껏 던졌다. 바로 뒤통수에 정통으로 맞았다. 놈은 그 자리에 풀썩 고꾸라진다. 그거 쌤통이다, 했더니 고꾸라졌던 놈이 이내 목덜미랑 피투성이가 된 상판을 해 가지고,

“이놈 죽인다!”

하며 덤벼든다. 피투성이가 된 상판이 도깨비같이 무섭다. 도망쳐야겠다. 그러나 웬셈인지 다리가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리기만 하고, 뛴다는 게 겨우 엉금엉금 기어지기만 하여 이내 놈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놈은 덜미를 잡아 메다꽂고는 사정없이 차고 짓밟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뭣인지 땅바닥에서 버쩍 쳐든다. 큼직한 돌덩이다. 아아, 놈이 정말 이것으로 내려칠 셈인가... 이젠 죽나 보다고 쑈리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외려 놈이 먼저,

“으악!”

소리 치며 나자빠진다. 똑똑히 보니까 놈의 잔등에 자개무늬가 박힌 뾰족한 칼이 꽂혀 있다. 딱부리 솜씨였다. 놈이 내려치려던 돌덩이는 힘없이 옆에 떨어지고, 놈이 움켜쥐었던 달러 뭉치는 벌겋게 피가 배어 발발히 흩어져 가랑잎마냥 바람에 날아가고 있다. 놈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자빠진 채 눈을 희멀겋게 까뒤집으며 꿈틀거리기만 한다.

이것이 죽으려고 기를 쓰는 건지 지랄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쑈리는 겁이 덜컥 났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려니까 딱부리 놈도 겁이 났는지

“이 새끼야, 너 혼자만 도망가지 마, 이 놈이 살아나면 난 어떻게 해.”

하며 언젠가 고아원에서처럼 울먹울먹하며 따라온다. 그래서 자식을 앞세우고 그냥 내달렸다. 어디로 뭣하러 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쩔뚝이가 자꾸 덜미를 잡는 것만 같아 발걸음은 마냥 빨랐다. 쩔뚝이가 영 살아나지 못하게 돌덩이로 놈의 대갈통을 아주 바수어 놓고 가고도 싶었으나, 사방에 보이는 게 다 쩔뚝이같이만 보여 빨리 도망쳐야 했다.

이젠 이 곳 양키 부대도 싫다. 아니, 무섭다. 생각해 보면 양키들도 무섭다. 불독 같은 놈은 왕초보다 더 무섭고, 엠피는 교통 순경보다 더 밉다. 빨리 이 곳을 떠나 우선 서울에 가서 따링 누나를 찾아야겠다. 그 마음 착한 따링 누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야 까짓 달러 뭉치 따위, 그리고 야광 시계도 나일론잠바도 짬빵 모자도 그 따윈 영 없어도 좋다. 그저 따링 누나를 만나 왈칵 끌어안고 실컷, 실컷 울어나 보고, 다음에 아무 데고 가서 오래 자리 잡고 ‘저 산너머 햇님’을 부르며 마음놓고 살아 봤으면… 쩔뚝이가 죽지 않고 살아날까 봐 걱정이다. 그 놈이 살아나기만 하면 아무 데를 가도 아무 때고 그 놈의 손에 성해 나진 못할 것이다. 쑈리는 왜 그놈의 대갈통을 으스러 버리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 송병수 소설가

▲ 1932년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

▲ 1950년 군 입대 참전, 그후 한양대학교 졸업

▲ 1957년 《문학예술》에 단편「쇼리 킴」당선

▲ 1964년 「잔해」로 동인문학상 수상

▲ 1974년 「산골 이야기」로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 휴머니즘 옹호의 의미 / 신영덕(공군사관학교 교수)

 

1982년 3월 7일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송병수(宋炳洙)는 한국전쟁기에 종군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한 자료는 별로 없기에, 그가 실제로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단지 분명한 것은 그가 공식적인 종군작가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전쟁기 문인들의 종군활동에 관한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연보에 기록되어 있는 종군이란 한국전쟁에의 참여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어쨌간에 송병수는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작가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전쟁 피해자들의 삶을 그린 「쑈리 킴」으로 등단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또 그의 중요 작품들은 대부분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송병수는 한국전쟁을 제재로 한 전쟁소설을 다수 발표하였는데, 이들은 대체로 휴머니즘을 옹호하며 전쟁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있다. 이런 점에서 송병수의 전쟁소설은 한국전쟁기에 발표된 전쟁소설과 구분된다. 한국전쟁기에 발표된 전쟁소설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애국심 및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면서 전쟁을 독려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 하나이고, 전쟁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 전쟁기 현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고자 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박영준, 이무영 등이 전자를 대변한다고 한다면, 염상섭 등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이처럼 한국전쟁기 전쟁소설은 대부분 구세대 작가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한국전쟁기 이후의 전쟁소설은 주로 신세대 작가들에 의하여 창작되었고, 전쟁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송병수 문학의 문학사적 의의는 바로 이 점에서 찾을 수 있겠거니와, 구체적인 작품분석을 통해 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송병수의 전쟁소설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인간 신뢰」, 「탈주병」, 「잔해」 등을 들 수 있다. 「인간 신뢰」는 전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서 '췌유'라는 중국 인민의용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본래 지주의 집안일을 거들며 지주의 아들을 보살피고 있던 머슴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국민당이 쫓겨가고 공산당 천지가 되었을 때, 인민의 적으로 찍어 놓은 주인집 아들의 도피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자위대에게 붙잡힌다. 반동분자란 죄목으로 공사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중국 인민의용군으로 선발된다. 이후 숱한 전투에 참가 하게 되지만 정작 그는 이것도 고된 노역 중의 하나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다가 그는 미군의 포로가 되는데, 달아날 기회가 많았지만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부상당한 미군을 업고 미군이 원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결말이다.

 

검둥이는 췌유가 안아 일으키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흐느껴 울기만 했다. 췌유는 그를 업고 가야 했다. 자기야 어찌 되든 좋았다. 이미 자기는 그 숱해 죽어 간 그 틈에 죽었어야 할 복숨이 덤으로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디로 가든 가야 했다. 지난날 밤이 새도록 주인도련님을 업어다 주었듯이 덤으로 살아온 자기 목숨이 다하는 데까지 검둥이가 바라는 곳으로 어디다 업어다 주리라…. (「인간 신뢰」, 48쪽)

 

이러한 결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작품에는 적에 대한 적개심이라든가, 전쟁의 당위성에 대한 주장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작품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전쟁의 비인간성이다. 포로를 벌거벗겨 거꾸로 매달아 놓고 총검술 연습삼아 찔러 죽이라고 할 때, 끔찍스러워도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행하면서 '전쟁이란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나 보다'고 생각하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이 곧 그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공포로 인해 '췌유'는 죽어도 사람 틈에 끼어야 마음 놓일 것 같아 적(미군)을 쫓아가게 되는 것이다.

 

(중략)

 

송병수의 전쟁소설은 이처럼 휴머니즘 옹호의 입장에서 전쟁의 비극적 성격과 그것의 비인간적 속성을 고발하고 있다.그런데 이러한 휴머니즘 옹호의 정신은 비단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전쟁소설은 아니지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쑈리 킴」과 「장인」은 그 대표적인 작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휴머니즘을 옹호하면서 이것을 억압하는 일체의 것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쑈리 킴」은 한국전쟁의 비극적 성격을 압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사람 사는 집이라곤 통 없는 일선지구 산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소년의 눈을 통해 전쟁 피해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 주인공 쑈리킴이라는 소년은 전쟁 고아이다. 아버지는 '빨갱이가 쳐들어왔을 때 다락에 숨어 있다가 잡혀' 갔고, 어머니는 애기 젖 먹이다가 폭격에 무너진 대들보에 깔려 죽었다. 소년은 그래서 청계천 다리 밑 '왕초' 밑에서 동냥질도 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다가 교통순경에게 붙잡혀 고아원으로 끌려가고, 보름간 지내다가 배고픔에 견디다 못해 다시 탈출하여 미군부대가 있는 일선 지역으로 오게 된다. 여기서 그는 양키들에게 양갈보나 붙여 주고, '그럭저럭 얼려 지내다가 하우스 보이라도 되기만 하면 팔자를 고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쑈리 킴은 동요 '저 산 너머 햇님'을 즐겨 부르는 순진한 면을 지니고 있는 소년이기도 하다. 중공군의 참호였던 땅구덩이에서 양갈보 노릇을 하는 '따링 누나'에게 미군을 붙여 주며 먹고 살지만, 그녀로부터 '보물섬'이나 '백설공주'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소년인 것이다. 이러한 순진한 구석이 있는 소년이기에 그의 생활상은 보다 비극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친구인 딱부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이는 경치게 먹어 열네 살이나 되지만 제 나잇값에도 못 가는 얼뱅이'로 표현된다. 피난 나오다 잃어버린 제 아버지 이름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똘만이' 적 돈 못 벌어 온다고 청계천 다리 밑 왕초한테 지독히 얻어맞으면서도 아예 도망칠 염도 못 내던 겁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하우스 보이'가 된 후, 미군 병사들과 어울려 독한 양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음란한 사진을 보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전쟁 고아들의 이러한 생활은 전쟁의 비극적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우수성은 이러한 주제의식을 뒷받침해 주는 작품 구성의 치밀함에서 찾을 수 있다. 소위 '재수보기'는 이 작품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쑈리 킴은 매일 아침 언덕 위 길목에 벼락맞은 고목나무에다 돌멩이를 던져서 '재수 보기'를 한다. 돌을 던져 첫 번에 맞으면 그날 재수는 아주 '장맹'이고, 두 번이나 세 번에 맞으면 그저 그렇고, 세 번 다 안 맞으면 그날은 재수 옴붙은 날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첫 날은 세 번 던졌으나 한 번도 맞지 않는다. 쑈리 킴은 '오늘은 재수 옴붙은 날'이라고 생각한다. 이날 쑈리 김은 따링 누나를 붙여 달리는 '검둥이 중에서 제일 못생긴 검둥이'인 '불독'의 청을 거절하다가 그에게 몹시 얻어맞는다. 또 딱부리가 돈을 내밀면서 따링 누나의 몸을 요구하는 바람에, 그녀에게 함께 얻어맞는다. 두 번째 날은 첫 번째, 두 번째 돌이 실패하자 오늘도 어제 모양 재수 잡치는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 번째 돌은 둥글납작한 것이 손 안에 꽉 잡힌다. 요걸로 던지기만 하면 뭣이든지 정통으로 들어맞을 것 같으나 그렇게 그냥 던져 버리기가 아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돌을 그의 호주머니에 넣어 둔다. 이때 따링 누나가 숨어 있는 땅구덩이 근처에 미군 엠피차(헌병차)가 나타나고, 따링 누나는 엠피에 의해 붙잡혀 간다. 그리고 '쩔뚝이'는 그 땅구덩이에서 자신의 돈을 훔쳐 가지고 도망간다. 쩔뚝이는 버젓이 군복에다 상이군인 표까지 달고 행세하지만 진짜 상이군인은 아니다. 그는 병정 나가기 싫어서 양키부대의 이발쟁이로 있으면서 '뚜럭질'을 하다가 양키 총에 맞아 쩔뚝발이가 된 인물이다. 쑈리 킴은 조금 전 주머니에 넣어 둔 세 번째 돌로 달아나는 쩔뚝이의 뒤통수를 정확하게 맞춘다. 이에 피투성이가 된 쩔뚝이가 달려들어 쑈리 킴에게 바윗돌을 던지려고 하는데, 딱부리가 그의 등을 칼로 찍어 버린다. 쩔뚝이는 꿈틀거리며 죽어 가고, 두 소년은 공포에 떨며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이 작품의 결말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재수보기'라는 장치를 통해 미군부대 주변에 사는 인간들의 비참한 생활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종국적으로는 이러한 비극을 초래케 한 전쟁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재수보기'는 단지 사건을 암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 및 작품의 주제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한계는 그의 휴머니즘 옹호 및 전쟁 비판이 다분히 감상적이라는 점에 있다. 앞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주인공의 울음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젠 이곳 양키부대도 싫다. 아니, 무섭다. 생각해 보면 양키들도 무섭다. 불독 같은 놈은 왕초보다 더 무섭고, 엠피는 교통순경보다 더 밉다. 빨리 이곳을 떠나 우선 서울에 가서 따림 누나를 찾아야겠다. (중략) 그저 따링 누나를 올칵 끝어안고 실컷 실컷 울어나 보고, 다음에 아무 데고 가서 오래 자리잡고 '저 산 너머 햇님'을 부르며 마음놓고 살아 봤으면 (「쑈리 킴」, 30쪽)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송병수의 작품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전쟁에의 참여는 작가로 하여금 그것의 필요성을 보다 절실하게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전쟁과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송병수 자신의 전쟁 체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 송병수 문학의 값진 부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의 휴머니즘 옹호는 종종 감상주의에로 함몰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

 

♤ 2020.02.0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