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등신불」 김동리 (2020.02.05)

푸레택 2020. 2. 5. 15:45

 

 

 

 

 

● 등신불(等身佛) / 김동리

 

등신불(等身佛)은 양자강(楊子江)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金佛閣) 속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佛像)의 이름이다. 등신금불(等身金佛) 또는 그냥 금불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니까 나는 이 등신불, 등신금불로 불리어지는 불상에 대해 보고 듣고 한 그대로를 여기다 적으려 하거니와 그보다 먼저, 내가 어떻게 해서 그 정원사라는 먼 이역의 고찰(古刹)을 찾게 되었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해야겠다.

 

내가 일본의 대정대학 재학중에, 학병(태평양전쟁)으로 끌려 나간 것은 일구사삼년 이른 여름, 내 나이 스물세 살 나던 때였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북경(北京)서 서주를 거쳐 남경(南京)에 도착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부대가 당도할 때까지 거기서 머무르게 되었다. 처음엔 주둔이라기보다 대기에 속하는 진이었으나, 다음 부대의 도착이 예상보다 늦어지자 나중은 교체 부대가 당도할 때까지 주둔군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대체로, 인도지나나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가게 된다는 것으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남경에 더 머물면 머물수록 그만치 우리의 목숨이 연장되는 거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체 부대가 하루라도 더 늦게 와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빌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

실상은 그냥 빌고 있는 심정만도 아니었다. 더 나아가서 이 기회에 기어이 나는 나의 목숨을 건져 내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런 기회를 위하여 미리 약간의 준비(조사)까지 해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불교학자로서 일본에 와 유학을 하고 돌아간-특히 대정대학 출신으로-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해 둔 일이 있었다. 나는 비장(秘藏)의 작은 쪽지에서 남경 진기수(陳奇修)란 이름을 발견했을 때, 야릇한 홍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며 머릿속까지 횡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낯선 이역의 도시에서, 더구나 나 같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국 출신 학병의 몸으로서, 그를 찾고 못 찾고 하는 일이 곧 내가 죽고 사는 판가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들 또 내가 평소에 나의 책상머리에 언제나 걸어 두고 바라보던 관세음보살님이 미소로써 나를 굽어보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던들, 그때의 그러한 용기와 지혜를 내 속에서 나는 자아내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 부대가 앞으로 사흘 이내에 남경을 떠난다고 하는 -그것도 확실한 정보가 아니고 누구의 입에선가 새어 나온 말이지만- 조마조마한 고비에 정심원(靜心院) ㅡ남경에 있는 중국인 불교 포교당ㅡ에 있는 포교사(布敎師)를 통하여 진기수 씨가 남경 교외의 서공암이라는 작은 암자에 독거(獨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내가 서공암에서 진기수 씨를 찾게 된 것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나는 그를 보자 합장을 올리며 무수히 머리를 수그림으로 절박한 사정과 그에 대한 경의를 먼저 표한 뒤 솔직하게 나의 처지와 용건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평생 처음 보는 타국 청년ㅡ그것도 적군의 군복을 입은ㅡ에게 그러한 협조를 쉽사리 약속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눈이 약간 찡그려지며 입에서는 곧 거절의 선고가 내리려는 순간 나는 미리 준비하고 갔던 흰 종이를 끄집어내어 내 앞에 폈다. 그리고는 바른편 손 식지 끝을 스스로 물어서 살을 떼어 낸 다음 그 피로써 다음과 같이 썼다.

 

願免殺生 歸依佛恩 (원컨대 살생을 면하게 하옵시며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코자 하나이다).

 

나는 이 여덟 글자의 혈서를 두 손으로 받들어 그의 앞에 올린 뒤 다시 합장을 했다. 이것을 본 진기수 씨는 분명히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것은 반드시 기쁜 빛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조금 전의 그 거절의 의향만은 가셔진 듯한 얼굴이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진기수 씨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를 따라오게."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깊숙한 골방이었다. 진기수 씨는 나를 컴컴한 골방 속에 들여보낸 뒤, 자기는 문을 닫고 도로 나가 버렸다. 조금 뒤 그는 법의(法衣, 중국 승려복) 한 벌을 가져와 방 안으로 디밀며,

"이걸로 갈아입게."

하고는 또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사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나의 가슴속을 후끈하게 적셔 주는 듯했다

옷을 갈아입고 났을 때, 이번에는 또 간소한 저녁상이 디밀어졌다. 나는 말없이 디밀어진 저녁상을 또한 그렇게 말없이 받아서 지체없이 다 먹어 치웠다. 내가 빈 그릇을 문 밖으로 내어놓자 밖에서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이내 진기수 씨가 어떤 늙은 중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분을 따라가게, 소개장은 이분에게 맡겼어. 큰절[本刹]의 내 법사 스님한테 가는..."

나는 무조건 네, 네, 하며 곧장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를 살려주려는 사람에게 무조건 나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길은 일본 병정들이 알지도 못하는 산속 지름길이야. 한 백 리 남짓 되지만 오늘이 스무하루니까 밤중 되면 달빛도 좀 있을 게구... 불연(佛緣) 깊기를... 나무 관세음보살."

그는 나를 향해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수그렸다.

"......"

나는 목이 콱 메여 옴을 깨달았다. 눈물이 굉 돈 채, 나도 그를 향해 잠자코 합장을 올렸다. 어둡고 험한 산길을 경암(鏡岩)ㅡ나를 데리고 가는 늙은 중ㅡ 거침없이 걸었다. 아무리 발에 익은 길이라 하지만 군데군데 나뭇가지가 걸리고 바닥이 패고 돌이 솟고 게다가 굽이굽이 간수(澗水)가 가로지른 초망(草莽) 속의 지름길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잘 뚫고 나가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믿는 것은 젊음ㅇ하나뿐이련만 그는 이십 리나 삼십 리를 걸어도 힘에 부치어 쉬자고 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쉴 새 없이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가며, 그의 뒤를 따랐으나 한참씩 가다 보면 어느덧 그를 어둠 속에 잃어버리곤 했다.

 

(중략)

 

대공양(大供養: 분신공양을 가리킴)은 오시 초에 장막이 걷히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백을 헤아리는 승려가 단을 향해 합장을 하고 선 가운데 공양주 스님이 불 담긴 향로를 받들고 단 앞으로 나아가 만적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와 동시 그 앞에 합장하고 선 승려들의 입에서 일제히 아미타불이 불려지기 시작했다.

만적의 머리 위에 화관같이 씌워진 향로에서는 점점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오랜 동안의 정진으로 말미암아 거의 화석이 되어 가고 있던 만적의 육신이지만, 불기운이 그의 숨골(정수리)을 뚫었을 때는 저절로 몸이 움칠해졌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눈에 보이지 않게 그의 고개와 등, 가슴이 조금씩 앞으로 숙여져 갔다.

돌기름에 결은 만적의 육신이 연기로 화하여 나가는 시간은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오백의 대중(승려)은 아무도 쉬지 않고 아미타불을 불렀다.

신시(申時) 말(末)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단 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만적의 머리 위로는 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염불을 올리던 중들과 그 뒤에서 구경하던 신도들이 신기한 일이라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만적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머리 뒤에는 보름달 같은 원광이 씌워져 있었다.

이것을 본 대중들은 대개 신병을 고치고, 따라서 이때부터 새전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 뒤 삼 년간이나 그칠 날이 없었다. 이 새전으로 만적의 타다가 굳어진 몸에 금을 씌우고 금불각을 짓고 석대를 쌓았다…

원혜 대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맘속으로 이렇게 해서 된 불상이라면 과연 지금의 저 금불각의 등신금불같이 될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부처님(불상) 가운데서 그렇게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그대로 지닌 부처님(등신불)이 한 분쯤 있는 것도 뜻있는 일일 듯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난 원혜 대사는 이제 다시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는 않았다.

"자네 바른손 식지를 들어 보게."

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가 이야기해 오던 금불각이나 등신불이나 만적의 분신 공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엉뚱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달포 전에 남경 교외에서 진기수 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고 내 입으로 살을 물어 떼었던 나의 식지를 쳐들었다. 그러나 원혜 대사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 더 말이 없다. 왜 그 손가락을 들어 보이라고 했는지, 이 손가락과 만적의 소신 공양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겐지, 이제 그만 손을 내리어도 좋다는 겐지 뒷말이 없는 것이다.

“....."

“....."

태허루에서 정오를 아뢰는 큰 북소리가 목어(木魚)와 어우러져 으르렁거리며 들려 온다.

 

☆ 김동리 소설가

▲ 1913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 1920년 경주 계남소학교 입학

▲ 1926년 대구 계성중학교 입학

▲ 1928년 서울 경신고등보통학교 전입학

▲ 1935년 단편 '화랑의 후예'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

 

♤ 2020.02.05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