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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읽기] 「가자, 우리의 둥지로」 윤정모 (2020.01.31)

푸레택 2020. 1. 31. 15:29

 

 

 

 

 

 

● 가자, 우리의 둥지로 / 윤정모

 

녀석은 탁자에 이마를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잔과 술병을 놓고 소리가 나게 위스키를 따랐다. 그래도 녀석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술 한잔이면 정신이 나겠다더니 어째 기척이 없을까. 머리가 벗겨져 민 듯한 속살이 보이는 녀석의 정수리엔 허연 비듬이 비늘처럼 일어나 있었다. 마흔도 안 된 자식이 벌써 늙은이 꼴이군.

녀석을 만난 것은 한 시간 전쯤 교회에서였다. 목사의 설교가 막 끝날 무렵 한 사나이가 뛰어들었다. 바로 녀석이었다. 녀석이 느닷없이 고함까지 질러 댔지만 나는 이 고향 친구를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목사! 내 아내를 내놔! 여긴 니가 믿는 하나님 앞이다. 어서 회개하고 내 아내를 돌려줘!"

"감히 신성한 성전과 하나님의 종을 모독하다니! 이(李)집사, 뭘 하시오? 어서 끌어내요."

장로가 벌떡 일어났다.

사나이가 목사를 향해 의자를 던졌다. 다행히 의자는 피아노 옆에서 박살이 났고, 때마침 달려든 이집사가 사나이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사나이는 집사의 손을 뜯어내면서 다시 소리쳤다

"남의 유부녀를 가지고 노는 놈, 그런 놈도 하나님 종이냐! 목사, 어디 니 입으로 말해 봐, 정말 그러냐!"

목사는 고개를 꺾고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이집사가 날 찾아와서 하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교회 허목사, 참으로 인격자입니다. 나이 서른넷인 젊은 목사인데 설교도 아주 신선해요. 더욱이 한국에서 어중이떠중이로 들어온 그런 목사가 아니라 미국에서 정규 코스로 신학을 공부한 진짜 실력파지요."

문간까지 질질 끌려가던 사나이가 한순간 집사를 획 뿌리치고 다시 뛰어드는가 했더니, 이번엔 신도들을 향해 외쳐 대는 것이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아시잖소? 날 좀 도와 주시오. 내 아내를 돌려주도록 목사를 좀 설득해 주시오. 제발! 제발 말 좀..."

"뭘 하시오. 저 미친 자를 썩 끌어내요!"

장로가 소리치며 사나이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집사와 합세해서 사나이를 끌고 나갔다. 사나이가 안 끌려나가려고 몸을 비틀 때 나는 비로소 그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었다. 멋대로 자란 수염과 초라한 몰골, 어디서 봤을까. 내 식당에는 가끔 알거지가 된 교민이 찾아온다. 그들은 거의 마리화나나 알코올 중독자들로서 한 끼의 식사나 몇 푼의 돈을 요구하지만 가끔은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구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그들 중 한 사람인가?

사나이가 획 몸을 젖히더니 이집사의 허리께를 걷어찼다. 집사는 바닥에 나동그라지면서 "폴리스! 폴리스!" 하고 악을 썼다. 참 이상한 분위기였다. 교회에서 경찰을 불러오란 것도 그렇지만 그 난동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 점도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잠시 후 집사가 다시 일어나 장로와 함께 사나이를 문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사나이는 땅바닥에 널브러지면서 복통이라도 온 듯이 도르르 허리를 말았다.

문득 사나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나는 집사가 막 끌어 닫는 문을 다시 밀고 밖으로 나갔다. 핏기가 가시고 수염이 더부룩한 사내, 그가 바로 10여 년 만에 만난 이 친구였다.

"태민이 아니냐. 니가 도대체 왜 이런..."

그가 가만히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트어택(심장발작)이야. 때때로 이런 증세가..."

"그럼 병원으로 가야지."

나는 녀석을 안아 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위스키 한 잔이면 풀릴 거야."

이 녀석이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나? 그래, 한 번씩 고향에 갈 때마다 녀석 대신 여기저기서. 만나지던 소문... 태민이 그 자식 영등포 역전에서 깡패짓을 한대... 그렇다면 중독 중세를 은폐하기 위해 심장통이란 말을 주워 대는지도 모르겠군. 나는 그런 이유로 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 대신 하루 휴업중인 내 식당으로 녀석을 데려온 것이다.

"자, 술이다."

나는 술병을 만지작대다 녀석의 어깨를 혼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술잔을 당겼다. 때묻은 소맷자락이 손등까지 밀려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그것도 미국 땅에서 만나는 고향 친구가 이런 꼴을 하고 있다니... 녀석이 잔을 비웠다. 엷은 갈색의 술이 그의 얼굴로 흡수된 듯 조금씩 화색이 돌아왔다.

"여기가 니 식당인가?"

녀석이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했구나,"

 

(중략)

 

그의 가족이 비행기를 타기 위해 막 출구로 나갔다. 녀석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돌아보며 말했다.

"임야를 사둘 게."

나흘간 우리집에 머무는 동안, 그의 아내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었고 아이들은 제 집으로 돌아온 듯 활기를 보였다. 특히 은희는 화장실까지 제 아빠를 따라다녀 내 집사람 마음을 울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석이야말로 기막힌 접착제구나 싶어 혼자 웃었다.

어젯밤 나는 녀석과 가까운 바에서 이별주를 나누었다.

'그래, 귀국하면 뭘 할 텐가?"

"팔지 않고 온 밭이 있으니까..."

녀석은 병원에서 지어 온 하트어택 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잘 먹고 쇼크받을 일만 없으면 녀석의 병도 점차 좋아질 거라고 의사는 말했었다.

"다시 꽃농사를 해보겠다..."

"헛수고하는 일만 없다면 그것도 괜찮아."

그래, 제발 이젠 꽃처럼 피어라. 우리는 다시 말없이 술을 마셨다.

한참 후 내가 다시 물었다.

"만약 은희 엄마의 과거가 자꾸 생각나면 어쩔 텐가?"

"새끼들을 낳아 준 사람인데, 그런 건 잊어야지."

고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한 친구가 이녀석에게 “야, 니동생 공장에 갔다더니 기껏 헬로 달링으로 풀렸다며?" 하고 비아냥거렀다. 그러자 녀석은 그 친구의 입을 갈기면서 "닥쳐, 새꺄! 그래도 넌 안 쥐!" 하고 되받았다. 그래, 이녀석은 그런 놈이다. 상투를 튼 제 가족인데 잘 이끌어 나가겠지. 행여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고향엔 총이나 칼 따위를 휴대하는 곳이 아니니까, 그런 게 없는 자기 둥지니까 불뚝 성질을 죽여 가며 잘 삭여 나갈 것이다.

"누이한테 연락 안 할 거야?"

내가 물었다.

"전화했어. 울더군. 살 만하면 불러들여야지."

그때 나는 미리 바꾸어 온 여행자 수표를 녀석 앞에다 내놓았다. 5만 불이었다.

"기껏 고국에 뼈나 묻겠다는 게 우습지만... 우선 이 돈으로 사업해라. 성공하면 조그만 야산 하나 사주고... 내가 묻힐..."

녀석이 물끄러미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술잔을 들었다. 우리는 스카치 위스키 한 병을 비웠지만 아무도 취하지 않았다.

출국할 사람이 다 나갔는지 출구에 리미트가 걸렸다. 나는 돌아서서 공항 대합실을 둘러보았다. '소매치기를 조심하시오.' 누가 썼는지 더럽게도 못 쓴 한글이군. 나는 전화 박스 옆에 붙은 그 종이를 북 떼어내고 유유히 공항건물을 빠져나왔다.

 

 

☆ 윤정모 소설가

▲ 1946년 경북 월성에서 출생

▲ 1951년 나원국민학교 입학

▲ 1965년 부산 혜화여고 졸업

▲ 1970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1981년 여성중앙에 중편 바람벽의 딸들 당선

▲ 1985년 「가자, 우리의 둥지」로 발표

▲ 1988년 「빛」으로 신동엽 문예창작기금 받음

▲ 1993년 「들」로 단재문학상 수상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

 

♤ 2020.01.31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