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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읽기] 「학자의 황혼」 최창학 (2020.01.29)

푸레택 2020. 1. 29. 11:54

 

 

 

● 학자의 황혼 / 최창학

 

아마 세상이 점차 콘크리트화해 가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 또한 메마를 대로 메말라 간다고 생각되어서였을 것이다. 한때 신문이며 잡지며 방송에서 서로 다투듯이 전원(田園) 캠페인을 벌인 일이 있었다. 전원이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갖가지 제목으로 시골에 사는 유명인들의 생활을 취재하는 데 열을 올렸었던 것이다. 소설을 쓴다고는 하지만 결코 유명인은 못 되는 내가 어떻게 되어서 그 대상 중의 하나에까지 끼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군청까지 있는 읍내니까 시골은 시골이라도 감히 전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못 되는데 잡지사에서 다녀간 한 달 후 또 신문사에서도 다녀갔다. 산을 배경으로 한 나의 전신 사진과 함께 원고지 네댓 장 분량의 기사까지 곁들여 실려 나온 것이다. 기사는 나의 신변 이야기와 함께 내가 잡지에 쓴 일이 있는 전원에세이 중 다음 구절에서 몇 마디를 요약해 쓰고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난 건 스스로 떠난 게 아니라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나고 만 것이라는 게 오히려 더 솔직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일의 터전이 없다거나 집 한 칸 마련할 수 없다거나 하는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방엘 가도 술집엘 가도 구석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내 의식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버터 가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젊어 덮어놓고 살 때는 잘 몰랐는데 이것저것 생각해 가며 살 나이가 되자 그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 하나하나, 귀에 들리는 소리 하나하나, 의식을 건드리는 현상 하나하나가 모두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면 결국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또는 이미 미쳐 버린 나를 다스리기 위해 서울을 떠나와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확실히 신문이란 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마자 나한테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수십 통이나 되는 편지가 날아든 것이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별별 이상스런 내용의 사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경치 좋은 곳에 사시면서 소설만 쓰신다니 얼마나 행복하시냐, 언제 한번 찾아가 뵐 테니 많은 도움을 주시기 바란다….

선생님의 소설집을 사려고 책방을 뒤졌으나 이곳에선 한 권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라...

앞으로 저도 소설을 써보고 싶은데 현재로선 편지 한 줄 제대로 못 쓰고 있다. 선생님께서 문장 지도를 좀 해주실 수 없겠느냐...

신문에 난 사진을 보니까 굉장히 미남이신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져 있어 보였다. 어디가 아프시거나 또는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어 숨어 사시는 게 아니냐…

미친병을 앓으신 적이 있다면서 요즈음은 괜찮으시냐, 저도 실은 육 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 대화나 나누고 싶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편지들이 날아든 건 어쩌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너절너절한 편지들 속에 대학교 때 은사이신 성준식 교수님의 편지까지 끼어 있다는 건 정말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성교수님의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崔君

新聞에 난 자네 記事를 읽었네, 자네가 그런 田園에 살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네.

나는 停年退職을 한 후 집에서 줄곧 쉬어 오고 있네. 언제 그곳이나 한번 訪問해 볼까 하니 車便과 詳細한 略圖를 그려 보내 주게.

健筆을 비네.

1980년 5월 24일 成俊植

 

편지라기보다는 무슨 사무 서식 같은, 그렇게 간단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뒤통수를 크게 한번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원래 사람됨 자체가 게으르고 칠칠치 못해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 못 하고 살아온 거야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성교수님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런 편지를 보내 오시게까지 하다니. 그러고 보니 학교 졸업 후 십사오 년이 지난 이제까지 내가 성교수님을 찾아뵌 건 불과 서너 차례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졸업 직후 몇 년간, 처음엔 직장을 알선받기 위해, 그리고 나중엔 직장을 알선해 주신 것이 고마워서 설날 같은 때에 세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뵌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성교수님의 추천으로 나는 어떤 잡지사에 취직을 했었으나 병고와 실의,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 등등 누구나 한때 당연히 치를 수밖에 없는 홍역 때문에 곧 그만두고 잠적해 버렸었다. 서울에 살긴 살면서도 아무런 직장 없이 월셋방에만 숨어 살면서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뿐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는 그 당시 내게 있어 말 그대로 구원의 여자였었다. 직장을 나가 번 돈으로 내게 월셋방을 얻어 주고 밥을 먹여 주었으며, 한번 기도했다가 실패한 자살을 계속 꿈꾸던 내게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성교수님이라는 존재는 내게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아니, 내가 그 뒤 성교수님을 한 번도 찾아뵙지 않은 것은 성교수님이 내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서였다기보다 웃어른을 찾아가 인사드리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성교수님한테는 그분이 애써 알선해 주신 직장을 스스로 그만두고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사는 자신이 염치없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소설 나부랭이를 써 문단이며 세상에 이름을 내민 후에도 나는 한 번도 찾아뵙지 않았다. 찾아뵙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세 권의 소설집을 출간하고서도 소설집 한 권 보내 드리는 성의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대학 시절의 추억과 함께 이따금 문득문득 떠올리며 그분의 안부에 대해 마음속으로나마 궁금해한 적이 있었지만 근래에 와서는 그런 예의조차 갖추지를 못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다른 스승이나 마찬가지로 내게서 이미 까마득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뜻 아니한 편지를 받고 나니 그야말로 죽어 있다던 사람을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꽤 길게 답장을 썼다. 그 동안의 나의 그릇됨과 몰예의에 대해 누누이 사죄의 뜻을 밝히고, 기다릴 테니 꼭 찾아오시라는 간곡한 당부와 아울러 차편과 상세한 약도를 그려 드렸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어느 화창한 날 오후에 불쑥 들이닥쳤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더 글이 써지질 않아 오전 내내 책상 앞에서 꿍꿍거리기만하다가 입이 깔깔하여 마루에 나와 점심 대신 막걸리로 혼자 목을 축이고 있던 중이었다. 첫눈에 봐도 성교수님이 틀림없는 노신사가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씀 좀 묻겠소, 이 집이..."라고 말하다가 나의 시선이 마주치자 학문의 깊이만큼이나 두꺼운 안경알 저쪽의 눈을 경련하듯 깜빡거렸다.

 

(중략)

 

내가 미처 할 말을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엷은 웃음만 웃고 있자 성교수님은 혼자말처럼 절망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알다가도 모를 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정말 뭐가 뭔지 갈수록 모르겠어."

성교수님으로서는 그냥 가볍게 토해 놓은 말인지 모르나 나한테는 보통 충격적인 말이 아니었다. 사십 년간이나 인생에 대해서만 학문적으로 연구를 해온 분이 인생을 모른다면 도대체 그 누가 인생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날 나는 성교수님에게 더 많은 것들, 가령 요즈음의 집안 생활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부터 물어 보고 싶었으나 자칫하다간 괜히 심사만 산란케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아 가능한 한 참았다. 그런데 며칠 후 서울에 살고 있는 성교수님의 따님이 나를 찾아옴으로 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성교수님과 함께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않은 낚시를 하고 돌아온(알고 보니 낚시를 하자고 한 나의 제안부터가 잘못이었다. 그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도 찌는 커녕 낚싯대 끝도 안 보일 정도로 시력이 나쁘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이상하게 몸살기 같은 게 느껴져 자리에 누워 지내다시피 했다. 씌어지는 원고보다 파지가 훨씬 더 많은, 그 알량한 쓰는 행위마저 완전히 중단한 채 누워서 잡지 나부랭이나 펼쳐 보고 있었는데 지난번 성교수님이 우리집에 찾아왔을 때나 비슷한 시각에 따님이 찾아왔던 것이다. 낮이 익다는 것뿐 처음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으나 스스로 성교수님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곧 알 수 있었다. 아내 나이 또래이면서도 아내보다는 훨씬 여자 냄새를 짙게 풍겼다. 지상을 통해 나를 자주 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녀는 그 동안 아버님을 보살펴 주셔서 고 맙다고 말했다.

 

"저는 최선생님 댁에 함께 계시는가 했는데 그렇지 않으시다니 다행이군요. 함께 계셔 글 쓰시는 데 방해가 되면 어떻게 해요? 아버님이 옛날 같지 않으시고 요즈음엔 많이 달라지셨거든요 학교에서 명예교수직을 주겠다고 해도 마다하시고 이러시는 거예요. 아마 평생동안 학자 노릇 해오신 걸 후회하시나 봐요."

따님은 여러 가지 구구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가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아들 내외는 미국에 가 살고 있으며 자기는 결혼해 시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버님은 현재 혼자 살고 있는데 가정부를 얻어 드려도 당신 스스로 내보내시고 혼자 사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들 내외가 미국에서 오시라고 초청장까지 보내 왔는데도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이 마당에 그곳에 가면 뭘 하겠느냐면서 안 가셨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별로 그러시는 것 같지 않았는데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죽음에 대해서 부쩍 많이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텔레비전 같은 걸 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는 일이 많고 밤에 주무시지 않을 때도 불을 끈 채 어둠 속에 앉아 계시는 일이 많으며 지난번에 죽은 친구를 꿈에 보았는데 어떤 꼴올 하고 있더라는 등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도 누가 찾아온 것 같으니 문을 열어 보라는 등 당신이 죽으면 관에 넣지 말고 수의만 입힌 채 묻되 염포로 묶는 짓을 하지 말라는 둥의 엉뚱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곤 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바람이나 쐬러 가게 애 아빠랑 함께 나오라고 하더니 산으로 데리고 가 엉뚱하게 남의 집 산역(山役)하는 광경을 보여 주시더라고 했다.

 

"평소에 우리에게 사람은 삶 못지않게 죽음도 깨끗한 죽음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거든요. 그래서 그러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이곳에 와 산에 계시는 것도 죽음에 대한 어떤 연습을 하시기 위해서인지도 몰라요."

죽음에 대한 연습이라는 말이 우습게 들렸으나 나는 웃지 않았다. 자살미수사건 소동을 벌였었던 옛날의 나를 잠깐 떠올렸을 뿐이었다. 아니 내 주변에서 죽어 간 몇몇 사람들의 죽음을 떠올렸을 뿐이었다. 따님은 가능하면 아버님을 모시고 갈까 하고 왔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따님 말대로 정말 죽음에 대한 연습을 하는 것인지 어떤지 아무런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도 성교수님은 따님이 떠난 후 일 주일 가량이나 더 있다가 떠나갔다. 떠나가는 날 버스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어 드리자 성교수님은 얼굴에서 거머리를 잡아 내는 그 동작과 함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살 걸 그랬어. 늙은 사람들 표는 함부로 끊어 주는 게 아냐. 이 표가 저승으로 가는 표가 되면 어쩌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으나 그래도 나는 그것이 단순히, 비록 몇 푼 되지 않는 돈이라고 해도 나로 하여금 그것을 쓰게 한 것이 미안해서 그런 것으로만 가볍게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불과 닷새 후에 알았다. 성교수님이 묵고 있었던 집의 주인아주머니로부터 성교수님이 이곳을 떠나가기 전날 만화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혼자 미소를 지었는데, 바로 그때 서울로부터 병사인지 횡사인지 자살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성교수님의 부음(訃音)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 최창학 소설가

▲ 1941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 1948년 오산남국민학교 입학

▲ 1954년 이리로 이사 이리동중, 남성고

▲ 1960년 고려대 국문학과 진학

▲ 1968년 중편「창」을 <창작과비평>에 발표

 

[출처] 한국소설문학대계 (1995년) 발췌


/ 2020.04.05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