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전야제」서기원 (2019.12.16)

푸레택 2019. 12. 16. 15:32

 

 

 

● 전야제 / 서기원

 

제1장

장작을 높이 쌓아 올린 트럭 위에 방한모로 얼굴을 가린 두 병사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둥을 맞대고 다리를 앞으로 뻗쳐 겨우 차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을 균형을 부지하고 있었다. 외투를 입었다기보다는 차라리 짐짝으로 포장된 것이었다.

"이게 와그르 무너지면 볼장 다 보는 거지."

허리통이 가늘게 뵈는 병사가 말했다.

"어떻게 뒈지건 어차피 한가지야."

어깨가 둥글넓적한 측이 가래침을 멀리 내뱉고 대답했다. 그의 입술은 붉은빛이 진하였다. 턱을 치켜올려 입을 벌리자 가래침을 칵 내뱉고는 다시 고개를 방한모 속으로 감추기까지 그 짧은 시간을 온통 빨강게 물들인 입술의 빛깔은 연지를 칠한 여자의 입술보다도 자극적이었다. 그것은 야생동물의 생명의 상징처럼 생생하였다.

진흙이 엉겨붙은 낡은 차체, 피로한 엔진 소리, 생채로 냉동된 장작, 파충류의 표피 같은 소나무 껍질, 때기름 위에 뽀얀 먼지가 얹힌 군복, 네이팜탄에 타죽은 소나무,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무거운 잿빛의 하늘, 이런 풍경 속에서 별안간 빨간 옷에 엉덩이가 퍼진 계집의 모습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잔등에 너무 힘을 주지 말게."

"포탄에 박살이 되면 그건 개죽음이 아닌가."

"어느 부대야?"

앉은키가 큰 편이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삼연대 삼대대"

"오리고지 전투 땐 굉장했다지?"

"삼땡인데두 별 수 없더군."

그러고는 껄껄대고 웃었다. 낮은 얼굴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독전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독전? 헌병들 말인가?"

"자네는 그 부대가 아니군."

그들은 한참 동안 말없이 몸뚱이만 추썩거렸다.

"난 김성호 일병. 자네 얼굴은 알지."

"난 박일병이야."

"그땐 팔자 좋게 구경만 하고 있었나?"

"아니 천만에, 중대장이 더러 애들을 죽였다더군."

일병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성호는 박의 넓적한 등허리로부터 듬직스런 친밀감을 느꼈다.

"독전이 처음 아니지?"

성호가 다시 물었다.

"난 첨이란 말야."

박이 성낸 목소리로 말했다.

"중공군은 독전대의 수가 반반쯤 된다는데?"

성호가 물었다. 박은 대답이 없있다. 트럭이 끊어진 다리 밑으로 말라붙은 내를 건너 네거리에서 멈춰섰다. 검문소는 판잣집이긴 했으나 양철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라디오의 음악이 새어 나왔다. 그 경쾌한 음악은 후방의 분위기를 강조했다.

 

(중략)

 

제2장

김성호 일등병은 출장 '임무'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왔다. 눈으로 덮인 전선의 산야는 며칠 전까지 밋밋하게 뇌리에 박혔던 풍경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서 영양부족으로 오그라든 소나무 가지, 붉은 황토 언덕의 단층, 멀리 바윗돌의 반질반질한 살결, 그러나 사납게 할퀴인 135고지, 그보다 멀리 북쪽으로 연이은 파란 산봉우리, 이처럼 눈익은 풍경은 지난 며칠 사이가 굉장히 먼 시간의 차단 속에서 신기스럽게 다시 태어나 있었다.

성호는 소나무로 덮인 벼랑 밑에 소대본부인 천막으로 들어갔다. 채소위는 불기 없는 천막 안에서 자그마한 책을 펴들고 나무궤짝에 걸터앉아 있었다.

성호는 귀대의 신고를 끝내고 채소위가 권하는 대로 야전용 침대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매씨 되시는 분에게 전했습니다."

"개밖에 없으니까."

채소위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저는 저 혼자뿐입니다."

성호가 말했다.

"알고 있어."

채소위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성호는 새삼스럽게 채소위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하긴 그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채소위의 얼굴과 마주 앉은 일은 처음이었다.

성호는 채소위도 학도병 출신임을 알고 있었다. 성호는 소집으로 사병이 되었고 채소위는 먼저 지원했는지, 또는 사병으로 있다가 시험을 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장교가 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었다. 성호는 내심 장교가 된 학도병을 경멸하고 있었다.

 

(중략)

 

제 13 장

포성은 번번이 북쪽 하늘에서 울리게 마련이었다. 신문은 서부전선에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보도하고 있었지만, 아군이 하루하루 남으로 밀리고 있는 사실을 감추지 못했다.

중공군이 주동이 된 적의 춘계 공세라고들 했다. 원성은 포성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사뭇 긴장된 거리의 표정이었다. 시민들의 왕래가 뜸해지는 대신 군복과 군용차의 수효가 부쩍 늘고,살벌한 공기에 휩힙싸였다. 행인들은 입을 굳게 닫고 걱정스런 눈으로 변모해 가는 거리의 풍경에서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들은 신문이나 라디오를 믿기보다는 포소리를 듣는 그들 자신의 청각과 부대의 이동을 살펴볼 수 있는 눈을 더 믿고 있는 터이었다. 하긴 그처럼 훈련된 지도 퍽 오랜 일이다.

만일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적의 대공세를 견디지 못해 후퇴하고 전선을 훨씬 남쪽으로 재편(再編)하게 될 경우에는 원성의 머리 위를 홉사 선반처럼 매달고 있는 중부전선은 필경은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고립상태에 빠져 퇴로까지도 포위를 당하게 될는지 모를 일이었다.

성호의 지식으로도 그만한 사정과 전황은 능히 헤아릴 수가 있었다. 어쩌면 적의 공세의 목적은 서부에 압력을 주어 싸우지 않고 중부의 전략상 거점을 차지하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직 적군이 쳐들어오지 않았다고 방심할 것이 아니다. 비전투원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뜻밖에 빨리 내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밤이면 포성 더 크고 가까이 들렸다. 저건 아군측의 야포 소리라고 성호는 지숙에게 말해 주었다. 밤중에 지숙은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떨고 성호의 품을 찾곤 했다.

성호는 밤마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중략)

 

"화통이나 지붕 위에 매달려 가는 것보다는 걸어서 내려가는 편이안전하지."

성호가 트렁크를 들고 말했다.

"간단하네요."

그녀가 웃고 말했다. 성호도 따라 웃었다. 도시 짐이라고는 들고 짊어지고 할 무게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안집 마나님은 아들하고 벌써 떠났어요."

지숙이 턱으로 안을 가리키고 말했다.

"같이 가자고 안 해?"

"같이 가긴, 날보구 든든해서 좋겠다구 하던데요."

지숙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녀는 함께 떠나는 여행에 어떤 새로운 기대마저 걸고 있는 성싶은 맑은 표정이었다.

"그럼 이제 출발인가요?"

"영규한테 들러 봐야 해,"

성호가 지숙을 뒤돌아보고 말했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성호와 부부의 행색으로 영규 앞에 더구나 그의 어머니 앞에 나서기가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호의 목소리는 어떤 반대도 용납될 수 없나는 단호한 빛이 깃들여 있었고 그들 사이의 독특한 우정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듯했다.

짐작한 대로 영규네는 떠날 준비는커녕 아예 만청을 부리듯이 조용했다. 영규의 어머니는 아들이 누워 있는 곁에 쪼그려 앉아 한숨만 길게 내쉬고 있었을 것이다.

영규의 어머니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반겼고 영규도 지숙이 함께 온 것이 놀랄 일이 아니라는 눈치였다.

"나는 좀더 기다려 보겠네."

영규가 어머니를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큰일났다니까. 글쎄 큰 낭패라."

하고 어머니가 아들의 말을 받았다. 어머니는 별안간 자동차를 갖다 델 수도 없으니, 이제 꼼짝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만두세요, 어머니."

영규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우리하고 함께 가세."

성호가 바싹 다가앉았다.

"자네들이나 빨리 떠나."

영규는 기침을 참고 대답했다.

"설마 그놈들이라구 해서 앓는 사람까지 죽이려구."

어머니가 호소하듯이 성호를 처다보았다. 피난민의 한 패가 지나가는지 문 밖이 떠들썩하다.

지숙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루에 앉아 있었다.

"영규, 그건 잘못이야, 설사 양식이나 땔것을 가뜩 채워 놨대도 안 될 얘기지."

성호의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영규는 대답이 없었다. 지숙은 오빠는 죽을 친구가 아니라고 하던 성호의 말을 되살려 보았다. 그리고는 이제 오빠로부터 성호에게로 옮겨진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난 안 간대두."

영규가 사납게 내뱉었다.

"정말이야? 자네가 안 간다면 나두 가지 않아!"

지숙은 귓전을 스치고 간 성호의 목소리에 소스라쳐 놀랐다.

"미친 소리 말아."

영규가 벌컥 화를 냈다.

"자네가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지 않으면 나두 안 간단 말이야. 알겠어? 자네 병이 여기 누워 있는다고 나아지지 않아. 내가 있지 않나. 내게 업혀서라도 왜 가자구 못 하느냐 말야."

성호의 홍분한 어조에,

"얘야, 암만해도 성호의 말대로 해야겠다."

영규의 어머니가 말했다. 잠시 후, 사내의 느껴 우는 소리가 홀러 나왔다. 커억, 키익, 흡사 짐승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고 멀리 달아나고 있는 듯한 소리가 간간이 새어 나왔다.

"자, 짐을 대강 꾸려 보세요."

성호가 어머니께 말했다.

포성의 꼬리가 철썩 하고 천장에 와 부딪쳤다. 자리만 잡으면 성호를 다시 숨어 살지 않을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지숙은 생각했다. 자신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무엇인가, 성호를 위하는 길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숙이, 들어와 영규한테 인사를 해야지,”

성호가 방문을 열고 반쯤 가린 얼굴로 말했을 때 그녀는 눈물이 맺힌 속눈썹을 껌벅이고 마주 웃어 보였다.

(『전야제」, 책세상, 1988)

/ 「전야제」, 서기원

 

☆ 서기원 소설가

▲ 1930년 서울 서대문구 송월동에서 출생

▲ 1948년 서울대 상대 입학

▲ 1960년 '오늘과 내일'로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 1961년 '이 성숙한 밤의 포옹' 동인문학상 후보상

 

● 허무와 환멸 혹은 풍자와 냉소 / 구재진(문학평론가)

1 머리말

우리 문학사에서 전후문학이 가지는 위치는 독특하다. 6.25라는 전쟁 체험을 근간으로 하는 전후문학은 역사와 이념의 문제를 다루었던 식민지시대의 문학이나 해방공간의 문학과는달리 개인과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역사와 이념이 한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임에 반해서 개인과 실존은 현대를 사는 세계사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1950년대 문학의 특수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전후문학의 특수성은 곧바로 전후문학의 한계로 연결된다. 1950년대, 즉 전쟁이라는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전후문학은 4·19 이후 1960년대라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 앞에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추상화하고 한국 상황의 세계사적인 보편의 차원으로 사고하고자 하였던 작가들은 1960년대의 가장 한국적인 상황 앞에서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후문학이 가지는 이러한 특질은 소위 전후세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더욱 잘 드러나는데 그 중 장용학, 손창섭 등은 알레고리나 아이러니 등 특유의 미학을 구성함으로써 전후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서기원 역시 전후세대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56년에 「안락사론」과 「암사지도」를 통해서 등단하였으며 그의 전후소설들은 소위 '아프레게르'적인 모랄을 추구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 더이상 그러한 경향을 소설로 쓸 수 없었던 서기원은 자신의 독자적인 소설 영역을 개척하게 된다. 서기원이 새로운 소설세계로서 선택한 것이 역사소설의 세계인데 그 분기점을 이루는 것이 「혁명」(1964~1965)이다. 그는 「혁명」이후 「김옥균」, 「조선백자 마리아상」, 「왕조의 계단」 등의 역사소설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서기원의 작품은 전쟁 체험과 전후의 상황을 그림으로써 소위 아프레게르적인 모랄을 추구한 전기 소설과, 역사소설이나 풍자소설 들을 통해서 사회와 역사라는 문제를 다룬 후기 소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 환멸과 허무, 그리고 역설의 미학

1950년대의 전후소설들에서 전쟁 체험이란 원체험과도 같은 것이다. 당시의 소설들은 그 어느 것도 전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염상섭이나 황순원과 같은 소위 구세대 작가들에게 있어서나 전후세대 작가들에게 있어서나 예외는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은 당대 작가들의 작품 속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염상섭이 「취우」에서 전쟁을 일상성의 차원에서 형상화하고 한갓 지나가는 소나기로 비유했다 할지라도, 황순원이 많은 단편들을 통해서 전쟁으로 인하여 더욱 빛을 발하는 휴머니즘의 세계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소설세계를 이어 나갔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전쟁이 커다란 무게로 다가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무게는 전후세대 작가들에게 더욱 컸을 것인데, 식민지시대와 해방이라는 역사를 경험한 구세대 작가들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전쟁과 견줄 만한 역사의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전쟁은 그대로 무너짐이었고 전쟁이 '무엇을' 무너뜨렸는가보다는 전쟁이 '무너뜨렸다'는 사실 자체만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당대의 전후세대 자가들에게 한국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과 동일시되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무너짐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서기원의 초기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 모티프가 바로 이 '무너짐'이다. 무너짐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품에 따라서 모랄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실존 그 자체일 수도 있지만 '무너짐' 그 자체는 초기 소설의 핵심적인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암사지도」, 「이 성숙한 밤의 포옹」, 「박명기」등은 모두가 이러한 '무너짐'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서기원의 처녀작에 해당하는 「암사지도」는 상덕, 형남, 윤주를 통해서 전후의 젊은이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 준 작품이다. 법대생이었던 상덕과 미술대학생이었던 형남은 재학중 입대하였다가 제대 후에 상덕의 아버지가 남긴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그 집에서 상덕이 우연히 알게 된 윤주라는 여자와 셋이서 기묘한 동거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중학교 강사를 하던 상덕이 실직을 하면서 형남의 영화간판 작업으로 생활을 하던 중 상덕이 '윤주 공유설'을 제안한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형남은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러던 중 윤주가 임신을 한다. 이에 상덕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형남은 어정쟁한 태도를 보이자, 윤주는 집을 나간다. 이 작품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미 '어떠한 가치체계도 인정하지 않는, 마비된 윤리의식을 가진 젊은이들로서, 생활의 타성과 본능에 의해 삶을 영위해 가는, 전쟁으로부터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은 불행한 인물들'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상덕이나 형남이나 윤주는 모두 전쟁으로부터 정신적 상처를 입고 삶에 대한 뚜럿한 의욕 없이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을 윤리의식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하고 평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윤리의식이라는 표면적인 현상 이면에는 전쟁 대 일상 즉 생활이라는 대립구도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즉 전쟁으로 인하여 얼마나 철저하게 일상이 부서져 버리고 생활이 왜곡되어 버렸는가 하는 문제가 이 작품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 무너져 버린 현실을 이들이 기거하는 집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름드리 기둥이나 굵은 서까래, 그리고 푸르죽죽하게 칠이 벗어지긴 했지만 두툼한 현판이라든지 일견 규모 있게 꾸민 집으로 보였다. 상덕의 설명에 혹 부족이 있었다면 포탄에 지붕이 뚫어진 채로 있는 머릿방과 문간에 관한 얘기가 없다는 것쯤일까. 「암사지도」

 

과거에는 단단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제는 포탄에 지붕이 구멍이 뚫어져 버린 집은 바로 이들의 삶을 말해 준다. 이미 야망도 의욕도 잃어버린 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야말로 그 집과 같다. 이들은 이미 전쟁터에서 박격포탄을 쏘던 군인들이 아니며 중학교 강사든 영화간판 그리는 일이든 무엇이든지 일을 해서 생활을 꾸려야 하는 생활인인 것이다. 전쟁은 이들의 생활의 기반을 무너뜨렸고 가족을 앗아갔고, 생활의 기반과 함께 이들이 윤리의식도, 삶의 의욕도 무너뜨려 버렸다. '윤주 공유설'도 형남이 생계를 꾸리게 되면서 제기된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삶의 형태는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로 인한 것이기 이전에 전쟁으로 인해서 상실된 생활의 기반, 다시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일상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서기원은 전쟁을 한갓 소나기에 비유한 염상섭과는 대척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암사지도」가 전쟁으로 인해서 정상적인 생활과 일상이 무너져 버리고 아울러 윤리의식마저 거부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 성숙한 밤의 포옹」은 실존 자체의 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점이 문제적인데 실존의 위기에 대한 인식이란 생활이나 일상의 위기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는 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입대하여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나'는 애인 상회의 폐병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체 없이 탈영을 한다. 그러나 산에서 무고한 여자를 죽인 바 있는 나는 탈영 이후에도 상희를 찾아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내가 찾아간 곳은 사창가이다. 그곳에서 선구를 만나 나는 그의 쓰레기통 같은 방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된다. 선구는 진숙이라는 창녀와 연애를 하며 무위도식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나는 자신의 파멸이 이미 구제될 수 없는 지경임을 느끼며 자살을 감행하지만 깨어나고, 나는 상희를 만나기 위해 중심을 잡을 수조차 없는 몸을 움직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전쟁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리고 삶에의 의욕조차 상실해 버린 인물들이다. 그들은 정상적인 삶에서 멀어져 자학과 나태 속에서 무위도식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즉 스스로를 더욱더 무너뜨림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실존을 확인한다. '나'와 선구가 일종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상황에 빠져 있음은 바로 그들이 의미를 들 수 있는 것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게 유일한 나의 저항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그 밖엔 반항할래야 대상이 없어.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세상인가. 누구에게 무얼 어떻게 반항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일선에선 동족끼리 서로 죽이고, 도시에선 식욕과 성욕과 그리고는 허영밖엔 남지 않았어. 오줌이라도 이런 데 누지 않는다면 다른 축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나. 「이 성숙한 밤의 포옹」

 

내가 처음 선구의 방에 갔을 때 침대 밑에 꽉 들어찬 오줌 든 맥주병을 보고 놀라자 선구가 한 말이다. 나는 '그의 시선 속에서 나는 그 나름으로의 오만함과 파격적인 생활태도에 대한 긍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선구는 자신의 비정상적인 삶의 모습에 대해서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선구의 말 속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염오와 환멸이 담겨 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며 혐오스러울 때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을 비하함으로써 오히려 자존심을 지켜 나가는 모습,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부정과 환멸의 표현이다. 그것이 선구와 나의 모습이다. 자신이 상희와 같은 어떤 여인을 죽였다는 생각에 상희를 만나지 못하고, 선구의 집에 머물며 자학적인 삶을 견뎌 내는 나의 모습은 철저하게 망가짐으로써만 정화될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실상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유인지도 모른다'는 나의 말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요컨대 전쟁터는 전쟁터대로, 후방은 후방대로 이미 인간적이거나 윤리적인 모든 것이 허물어진 상황, 어떠한 가치도 보존될 수 없는, 부정성으로 꽉 채워진 상황에서 나와 선구가 택한 삶의 방식은 자신을 모욕함으로써 실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세계에 대한 부정과 환멸이 자아에 대한 혐오로 전이되면서 이러한 역설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역설의 결과는 무엇인가? 자신을 모욕함으로써 실존을 확인한 그들의 삶이 나아갈 바는 어떤 것인가?

 

자네는 다만 살기 위한 목적이 없을 뿐이니까 죽음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죽어야 할 이유조차도 발견할 수가 없어. 「이 성숙한 밤의 포옹」

 

부대를 도망쳐서 이 도시에 도착한 그 길로 상희를 만났던들 다시 사람으로 변신할 기회가 생겼을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려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감조차 마비된 나는, 나를 향해서 밀려오는 시간의 감촉과 예감마저 마멸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 성숙한 밤의 포옹」

 

첫 번째는 자신의 애인인 진숙이 동반자살을 제의하자 이에 냉소하며 선구가 나에게 한 말이고, 두 번째는 나의 서술이다. 선구는 다만 실존의 확인에 머물고 있을 뿐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세계에 대한 환멸과 자신에 대한 비하, 이것이 그것으로서 끝나 버린다면 그것은 일종의 니힐리즘이 될 수밖에 없다. 니힐리즘이란,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 정신상태이다. 니힐

리즘의 본질인 허무감이 중심의 상실, 무와의 조우, 권태로부터의 탈출 불능, 적합한 생활철학의 결여 등이라면 '죽어야 할 이유조차 발견할 수 없는' 선구야말로 이러한 허무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와는 다르다. 선구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오만한 긍지를 가지는 반면, 두 번째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장에서 죽인 여자에 대한 환영과 그에 대한 죄의식 속에서 자포자기한 삶을 살지만 한편으로는 그와는 다른 삶, 즉 '사람으로의 변신'을 열망하고 있다. 그 열망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을 때 내가 택한 방식이 바로 자살이다. 그 자살은 자기 비하를 통한 실존의 확인이 가져온 자기 혐오로 인한 것으로서 '사람으로 변신'하여 상희를 만나고 싶은 열망의 강렬함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나는 다시 깨어나서 상희의 집을 향해서 비틀거리며 가게 된다. 그것은 내가 전장에서 죽인 여자에 대한 죄의식, 모든 의식이 마비된, 스스로를 모욕하는 삶의 모습에서 기인하는 허무를 뚫고 나아가는 모습이다. 즉 서구가 세계의 부정성을 강조하면서 니힐리즘을 내세우고 있다면 나는 그 부정성 속에서도 긍정적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살이야말로 그러한 긍정성에의 회구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행위이며 상희를 찾아가는 결말의 모습 역시 그러하다.

결국 「이 성숙한 밤의 포옹」은 전장과 후방의 대비를 통해 전후세계의 부정성을 그려 냄과 동시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불안과 권태, 그리고 허무를 그려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니힐리즘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실존적 위기와도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여 주기도 한다. 결국 세계의 부정성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면서도 자아의 회복을 열망하는 것이다.

 

이 작품과 같은 해에 발표된 「박명기」는 전쟁이 어떻게 한 인간을 왜곡시켰으며, 한 가족을 파멸시켰는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성숙한 밤의 포옹」에서는 세계에 대한 부정과 환멸이 그려진 반면, 「박명기」에서는 그러한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전쟁통에 실명한 나는 중풍 걸린 아버지, 이들의 생계를 돌보는 나이 찬 여동생 진숙 등과 함께 살아간다. 전란중에 형이 총살당하게 되었을 때 나는 명령에 의해서 총검으로 형을 찔러 죽였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진숙이 자신의 삶에 대한 회망을 모두 포기한 채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것에 가슴 아파하던 나는 마침내 아버지의 숭늉에 약을 타서 아버지를 죽게 한다. 이 작품은 전후의 한 가족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오상원의 「부동기」나 이범선의 「오발탄」과 비견될 만하다. 그러나 동일하게 일가의 비극을 그리고는 있으나 각각의 작품이 나타내는 중심내용은 상이하다. 「박명기」는 ‘형을 죽였다'는 것과 '실명하였다'는 두 사실 사이에서 고통을 겪는 나를 중심으로 해서 전쟁으로 인하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된 젊은이의 내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이나 환멸, 그리고 허무로 이어지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대한 인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만하다.

 

1960년에서 1961년에 발표된 「전야제」는 서기원의 전후단편들의 문제의식이 집약되어 하나의 장편으로 탄생한 경우이다. 전술한 작품들에서 나타났던 세계에 대한 부정과 환멸은 물론이고 「암사지도」, 「이 성숙한 밤의 포옹」, 「박명기」 등에서 결말 부분에 언뜻언뜻 비추었던 긍정적 가능성과, 「오늘과 내일」에서 나타났던 극한상황에서도 살아있는 모랄의 문제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전야제」는 대조되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학도병으로 전장에 나간 성호이며, 다른 하나는 결핵에 걸려 입대하지 않고 기피하고 있는 영규이다. 채소위라는 학도병 출신 장교의 심부름으로 원성에 온 성호는 영규를 만나고 채소위의 여동생 지숙에게 돈을 전해 준다. 귀대한 후 성호는 채소위의 연락병이 된다. 전투가 계속되던 어느 날 적의 야습으로 인해서 성호는 인민군의 포로가 된다. 사회주의적인 교양을 주입당하고 땅파기를 강요당하는 포로생활에 염증을 느낀 성호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영규를 찾아간다. 한편 지숙을 자주 만나며 사랑을 느꼈던 영규는 성호야말로 지숙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서 성호와 지숙은 함께 피난길을 택한다. 성호는, 병세가 악화되어 피난을 포기한 영규와 그의 어머니에게 함께 가지고 설득한다.

이 작품은 성호를 중심으로 하면서 전장의 상황을 밀도 있게 그려나가는 한편, 영규를 중심으로 하여 전쟁의 와중에서도 후방에서 전개되는 사랑과 일상생활을 담담하게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전장은 대개의 전후소설이 보여주는 싸움터의 맹목과 권태에서 더 나아가 그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대립과 반목 그리고 갈등이 존재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전쟁이 일반적인 '전쟁'으로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동족끼리 싸운 특수한 전쟁'으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호는 설사 침략의 전쟁일망정, 다른 민족과 싸우고 있는 현실이라면 자기 희생의 벅찬 감동을 갈망하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영규는 우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홀로 다른 민족과 싸워 본 사실(史實)이 없다고 단정했다. 전쟁은 반드시 이기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지만, 승패를 초월해서 자기를 투신할 수 있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영규는 얼굴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 모두가 뒤집힌 시뻘건 눈으로 적개심과 중오에 미쳐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전쟁이 우리에겐 한 번쯤 필요하다! 인구의 반이 죽어 없어지는 패전이라 할지라도 그런 전쟁을 한 번쯤 겪지 않는 한 참된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고 영규는 말했다. 「전야제」

 

이는 한국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과 동일시하면서 '무너짐' 자체만을 그려 내고자 하였던 그의 전후단편들과는 달리 한국전쟁 그 자체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고 무너뜨리는 전쟁으로부터, 즉 개별성을 동반하지 않은 보편성의 차원에서의 전쟁으로부터, 동족상잔의 비극, 그래서 젊은이 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한국전쟁의 개별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 모습이다. 작가 자신이 참전의 경험이 있고 그로부터 허무와 환멸을 느낀 경험이 있었다는 점에서 대개의 작품이 다분히 경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면 「전야제」에 와서는 그 경험을 객관화하고 평가하며 정리하고자 하는 작가의식이 엿보인다. 초기 소설의 문제의식이 이 소설에서 집약되고 정리된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초기 소설의 핵심을 이루던 '전쟁으로 인하여 무너진 인간상'의 제시라는 주제는 「전야제」와 「박명기」에 와서 양상을 달리하면서 전쟁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식해 보려는 시도, 그리고 전쟁이 남긴 상처를 기정사실화하고 그로부터 다시 출발하려는 시도 등을 보인다. 그것이 각각의 작품에서 긍정성의 회구, 즉 모랄과 연결되어 있음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전야제」의 결말이나 「박명기」의 결말은 이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이후에도 「반공일」 등의 작품들로 연결된다. 「반공일」에서 나타나듯이 전후에도 전쟁의 조각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그 속에서 이제는 소시민이 되어 버린 전후 세대들의 모습이 어떻게 일그러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일은 전쟁의 후일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이건 격동기의 이후에는 후 남이 있게 마련이지만 「반공일」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소시민의 심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4 맺음말

서기원은 지금도 소설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여자의 다리」라는 장편을 발표한 바 있다. 그것은 다시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떠한 평가를 받았건 그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역사가 변화하듯이 한 작가의 소설도 변화하게 마련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역사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세월이 흐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전후의 좌절과 허무를 그린 소설에서 역사소설로 새롭게 번모하였듯이 그의 소설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다시 한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특히 전후소설에서 보여 준 날카로운 심리묘사와 역설의 미학이 다시 한번 작품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 서기원 소설 해설 발췌

☆ 한국소설문학대계 (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