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분례기」 방영웅 (2020.01.31)

푸레택 2020. 1. 31. 14:50

 

 

 

 

 

● 분례기 / 방영웅

 

제 1부

전불(典佛)에서 수철리(水鐵里)를 넘어가는 계곡을 따라 냇물이 은빛을 발하며 흘러내린다. 어떻게 보면 살얼음이 앉은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아침 햇살을 받아 그렇게 빛나는 것도 같다. 계곡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냇물은 조용히 흘러내린다. 골짜기에 죽죽 늘어선 쥐똥나무, 황칠나무, 자귀나무, 덧나무 등은 움이 트려고 가지마다 파란 순이 돋고, 똥예는 용팔을 따라가려고 바작바작 애를 썼으나 몸은 자꾸만 뒤로 처지고 하얀 고갯길이 까마득해지는 것이다.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쩐지 올겨울을 넘긴 것 같은, 어떤 골짜기에 지금도 눈이 쌓여 있어 그 눈 녹은 물이 이쪽으로 흘러내리는가. 그러나 올겨울 들어 눈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팥죽을 후후 불어 가며 언 동치미 국물을 훌쩍훌쩍 떠먹으면 한 살을 더 먹게 된다는 오늘은 동짓날. 그러나 화창한 봄날이다.

 

동예는 진달래를 보고 걸음을 멈춘다. 냇물 건너 양지바른 자그마한 바위 옆에 진달래가 곱게 피어 있지 아니한가. 한 가지에 달려 있는 몇 개의 노란 송이들은 부는 바람도 손대지 않는 곱디고운 분홍 꽃잎을 살짝 드러내고 막 피려 하고 있다. 놀랄 것은 없다. 전불에 들어섰을 때 한데 붙어 있는 서너 송이의 진달래를 보았고 이번이 두번째다.

 

똥예는 고개 중턱을 부지런히 올라가는 용팔을 힐끗 쳐다본다. 새끼로 휘감은 부대뭉치와 손갈퀴를 길바닥에 내려놓고 아래로 내려온다. 냇물을 뛰어넘는다. 씨근덕거리며 바위 쪽으로 기어올라가서 냉큼 꽃송이를 손아귀에 움켜쥔다. 공연한 질투가 불길처럼 솟아오른다. 숨구멍이 발딱발딱하는 것들이 벌써 바람을 피워... 젖내가 몰씬몰씬 난다, 야... 지금이 어느 땐 줄 알구. 동짓달 설한풍이 불 때란 말여…

 

똥예는 꽃잎을 발기발기 찢는다. 막 피려고 우쭐대는 꽃봉오리들도 으깨 놓는다. 똥예의 손엔 분홍 꽃물이 들었다. 이것을 보자 자신의 행동이 금방 후회된다. 전불에 피어 있던 진달래와 함께 가엾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손바닥의 꽃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런 짓을 다시 하다니... 이 가엾은 생각은 꽃잎들을 다시 줍게 한다. 똥예는 그것들을 양손에 펼쳐 놓고 유심히 쳐다본다. 부는 바람이 한 개의 꽃잎을 날려 보낸다. 그쪽으로 쫓아간다. 그것마저 집어 들고 냇물 쪽으도 내려온다.

 

그것들을 냇물 위에 뿌려 주며 뚱예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얼음처럼 차가운 냇물에 양손을 담그고 일렬로 떠내려가는 꽃잎들을 쳐다보며 분홍 꽃물을 황급히 씻어 낸다. 똥예는 마지막 꽃잎이 보이지 않자 일어난다. 꽃잎들이 떠나간 쪽을 쳐다보며 냇물을 뛰어 넘는다. 물 묻은 손을 바지 궁둥이에 썩썩 문지르며 엉금엉금 길 위로 올라온다.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부대뭉치와 손갈퀴가 남의 물건처럼 생소하다. 그것들을 마지못해 집어 들며 크게 한숨을 쉬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매일 넘어다니다시피 하는 이 고개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든다. 똥예는 양다리에 힘이 폭폭 빠지며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고 싶다. 그러나 용팔을 파라가야 한다. 겨우 이런 주제꼴로 고자(鼓子)를 따라다니며 나무를 하게 된 자신의 신세에 역정이 난다. 속바지만 하더라도 오줌구멍이 뽕 뚫린 남자옷을 입었으니 이건 너무 망측하다. 그걸 꿰매려고 생각해 보았으나 일손도 잡히지 않는데다 떨어진 곳이 너무 많아 그만두었다. 그뿐이라. 모두 아버지의 찌꺼기를 주워 입은 것이지만 작업복을 걸쳐 입고 신발까지 작업화를 신었으니 이건 꼭 머슴애 같다.

 

"아저씨 같이 가유..."

똥예는 고개를 홈씬 제치고 크게 소리친다. 산울림이 쩡 울리는 속에서 용팔은 고개를 돌리며 걸음을 멈춘다. 똥예는 궁둥이를 씰룩대며 쫓아 올라간다. 그러나 용팔은 걸음을 다시 옮길 눈치다. 똥예는 다시 고함을 친다.

 

"아저씨 더 가지 말구 거기 서 있유..."

그러나 용팔은 더 올라간다. '혼자만 가면 워티기 헌댜.' 똥예는 중얼대며 고개를 부지런히 올라간다. 길 옆에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를 스치고 똥예의 그림자가 바쁘게 쫓아온다. 용팔은 고갯마루까지 올라가서 지게를 벗어 놓고 그 위에 앉아 뚱예를 기다린다. 똥예는 그곳에 거의 당도하자 숨이 턱턱 찬다. 그것을 가까스로 참아 가며 원망스런 목소리로 소리친다.

 

"아이구 진달래가 폈유..."

흰 바지저고리에 작업복을 걸쳐 입은 용팔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일어난다. 작대기를 양손에 받쳐 들고 머리에 맨 수건꼬리를 꿈틀거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달래야 달래야 진달래야

바위야 바위야 가새바위

구름 같은 말을 타고

수철리고개를 넘어가서

곱사대야 문 열어라

춘향이 얼굴 다시 보자

 

산 위에서 퍼지는 고운 목소리는 맑은 아침 공기를 뚫고 산속으로 잦아든다. 그 소리엔 무엇보다 신명이 넘쳐 있다. 이쁜 항아리처럼 깨끗한 용팔의 얼굴은 번들번들 아침 햇살에 빛나며 장대같이 큰 키는 하늘을 찌를 듯이 껑충껑충 뛰고 있다. 똥예는 벌써 손갈퀴와 부대뭉치를 내던지고 있다. 풀밭에 그대로 주저앉아 미친년 통곡하듯 마른 풀잎을 쥐어뜯으며 깔깔거린다. 얼마나 웃었던지 눈물이 찔끔거리며 목구멍이 아파 온다. 똥예는 꿈이 아닐까 의심하며 용괄을 쳐다본다.

 

너 죽어서 꽃이 되고

나 죽어서 나비 된다

나비 됐다 서러 마라

꽃밭으로 날아든다

 

춤이 끝나자 용괄의 얼굴엔 웃음기가 싹 사라져 있다. 그렇다고 화난 얼굴은 아니다. 내가 언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더냐, 그저 무표정한 평소의 모습이다. 용팔은 그런 모습으로 벌써 저 아래를 내려가고 있다.

 

산 위로 약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송림에 가리워져 용팔의 모습은 하얗게 입은 아래만 보인다. 흙 묻은 빨간 신바닥이 번갈아 뒤집히며 그것은 사라진다. 뚱예는 용팔을 따라갈까 하면서도 그가 사라진 쪽만 쳐다본다. 그의 여자같이 아름다운 목소리는 똥예의 마음을 산산이 헤쳐 놓았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겨울 속의 봄날에 그의 노랫소리가...

 

(중략)

 

삽티골을 빠져나와 시름이고개를 쳐다본다. 그러나 똥예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서야 용팔은 걸음을 크게 떼기 시작한다. 용팔은 시름이고개를 부리나케 올라가서 저 아래를 쳐다본다. 벌써 똥예는 고개를 다 내려가서 쪽 곧은 편편한 대로를 걷고 있다. 용팔은 똥예를 따를 수 없다. 똥예는 옆구리에 보틍이를 끼고 달려가듯 도망친다. 용팔이 그렇게 얼마를 쫓아갔을까. 저 까마득한 산 위에서 방금 해가 떠오르고 있다. 그것은 똥예의 그림자를 길게 만든다. 빨간 햇덩이가 점점 위로 치솟자 똥예는 미친 듯이 달려간다. 어디를 가는 중일까.

 

용팔은 말뚝처럼 서서 똥예를 바라본다. '수혼탑'이란 세 글자 외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싱거운 물건이 떠오른다. 그것은 장황한 비문도, 왜 세운다는 이유도, 언제 세웠다는 날짜도, '이놈아 너회들을 왜 잡아먹는지 아니?' 소나 돼지에 대한 저들의 변명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보면 무엇인가 써주려고 애쓴 백정들의 혼적은 보인다. 그것은 보면 볼수록 더 뚜렷하게 보인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옷음뿐이다. '수혼탑'이란 글자 외엔 더 못 쓰지 않았던가. 용팔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다만 잘 가라는 말은 할 수 있다. 용팔은 까마득하게 사라져 가는 똥예를 마지막으로 쳐다보며 양손을 입에 가져간다. 이것은 똥예에게 세워 주는 용팔의 '수혼탑'인지도 모른다.

 

"똥예야 잘 가라."

용팔의 음성은 넓은 벌판에 울린다. 그러나 똥예는 벌써 보이지 않고 용팔은 수철리를 향하여 흥얼거리며 걸어간다.

 

달래야 달래야 진달래야

바위야 바위야 가새바위

구름 같은 말을 타고

수철리고개를 넘어가서

곱사대야 문 열어라

춘향이 얼굴 다시 보자

너 죽어서 꽃이 되고

나 죽어서 나비 된다

나비 됐다 서러 마라

꽃밭으로 날아든다

 

☆ 방영웅 소설가

▲ 1942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

▲ 1948년 예산국민학교 입학

▲ 1954년 예산중학교 입학

▲ 1961년 휘문고등학교 졸업

▲ 1967년 장편「분례기」를 <창작과비평>에 연재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

 

♤ 2020.01.31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