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까치소리」 김동리 (2020.02.05)

푸레택 2020. 2. 5. 15:58

 

 

 

 

 

 

 

 

 

● 까치 소리 / 김동리

 

단골 서점에서 신간을 뒤적이다 「나의 생명을 물려 다오」하는 얄팍한 책자에 눈길이 멎었다. '살인자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생명을 물려준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무심코 그 책자를 집어 들어 첫 장을 펼쳐 보았다. '책머리에'라는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몇 줄 읽다가 나도 어릴 때는 위대한 작가를 꿈꾸었지만, 전쟁은 나에게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어 주었다는 말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비슷한 말은 전에도 물론 얼마든지 여러 번 들어 왔던 터이다. 그런데도 이날 나는 왜 그 말에 유독 그렇게 가슴이 뭉클해졌는지, 그것은 나도 잘 모를 일이다. 위대한 작가를 꿈꾸었다는 말에 느닷없는 공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나는 그 책을 사왔다. 그리하여 그날 밤, 그야말로 단숨에 독파를 한 셈이다. 그만큼 나에게는 감동적이며, 생각케 하는 바가 많았다. 특히 그 문장에 있어 자기 말마따나 위대한 작가를 꿈꾸던 사람의 솜씨라서 그런지 문학적으로 빛나는 데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다음에 그 수기의 내용을 소개하려 하거니와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문학적 표현을 살리기 위하여 본문을 그대로 많이 옮기는 쪽으로 주력했음을 일러 둔다. 특히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소위 그의 문학적 표현으로서 그의 본고장인 동시, 사건의 무대가 된 마을의 전경을 이야기한 첫머리를 거의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을 한복판에 우물이 있고, 우물 앞뒤엔 늙은 회나무 두 그루가 거인 같은 두 팔을 치켜든 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몇 아름씩이나 될지 모르는 굵고 울퉁불통한 밑둥은 동굴처럼 속이 뚫린 채, 항용 천 년으로 헤아려지는 까마득한 세월을 새까만 침묵으로 하나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밑둥치에 견주어 가지와 잎새는 쏠쓸했다. 둘로 벌어진 큰 가지의 하나는 중둥이가 부러진 채, 그 부러진 언저리엔 새로 돋은 곁가지가 떨기를 이루었으나 그것도 죽죽 위로 벌어 오른 것이 아니라 아래로 한두 대가 잎을 달고 드리워진 것이 고작이었다.

둘 중에서 부러지지 않은 높은 가지는 거인의 어깨 위에 나부끼는 깃발과도 같이 무수한 잔가지와 잎새들을 하늘 높이 펼쳤는데, 까치들은 여기만 둥지를 치고 있었다.

앞나무에 둘, 뒷나무에 하나, 까치 둥지는 셋이 쳐져 있었으나 까치들이 모두 몇 마리나 그 속에서 살고 있는지는 아무도 똑똑히 몰랐다. 언제부터 둥지를 치기 시작했는지도 역시 안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무와 함께 대체로 어느 까마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이거니 믿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초상이 나고... 한다는 것도, 언제부터 전해 오는 말인지, 누구 하나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까치가 유난히 까작거린 날엔 손님이 잦고, 저녁 까치가 꺼적거리면 초상이 잘 나는 것이라고 그들은 은근히 믿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

그런대로 까치는 아침 저녁 울고, 또, 다른 때도 울었다.

까치가 울 때마다 기침을 터뜨리는 어머니는 아주 흑흑 하며 몇 번이나 까무러치다시피 하다 겨우 숨을 돌이키면 으레 봉수(奉守)야 하고, 나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것도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여 다오'를 붙였다.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이렇게 쿨룩은 연달아 네 번, 네 번, 두 번, 한 번, 한번, 여섯 번, 그리고 또다시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두 번이고 여섯 번이고, 종잡을 수 없이 얼마든지 짓이기듯 겹쳐지고, 되풀이되곤 했다.

그 사이에 물론, 오오, 아이구, 끙 하는 따위 신음 소리와 외침 소리를 간혹 섞기도 하지만, 얼마든지 '쿨룩'이 계속되다가는 아주 까무러치는 고비를 몇 차례나 겪고서야 겨우 아이구, 봉수야, 한다거나, 날 죽여 다오를 터뜨릴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침병(천만)은 내가 군대에 가기 일년 남짓 전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이때는 이미 삼 년도 넘은 고질이었던 것이다. 내 누이동생 옥란(玉蘭)의 말을 들으면, 내가 군대에 들어간 바로 그 이튿날부터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침 아침 까치가 까작까작 울자, 어머니는 갑자기 옥란을 보고,

"옥란아, 네 오빠가 올라는가 부다.”

하더라는 것이다.

"엄마도, 엊그제 군대 간 오빠가 어떻게 벌써 와요?"

하니까,

"그렇지만 까치가 울잖았냐?"

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엔 아침 까치가 울 때마다 얘가 혹시 돌아오지 않나 하고 야릇한 신경을 쓰던 어머니는 그렇게 한 반년쯤 지난 뒤부터, 그것 (야릇한 신경을 쓰는 일)이 기침으로 번져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략)

 

'정순이는 이런 여자였어. 총명하고 다정하고 신의 있는, 그러나, 강철같이 굳센 여자는 아니었어. 순한 데가 있었지. 환경에 순응하는, 물론 지금도 그녀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속 있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환경에 순응하고 있는 거야. 그녀를 결정하는 것은 그녀 자신의 의지이기보다 그녀를 에워싼 그녀의 환경이겠지."

나는 편지를 구겨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영숙을 불렀다.

"숙이 나한테 전한 편지 누구 거지?"

"언니 거예요."

영숙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대답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알지?"

영숙은 갑자기 얼굴이 홍당무같이 새빨개지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영숙일 옥란이같이 믿고 있어. 알면 안다고 대답해 쥐, 알지?"

"......"

영숙이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없더라도 옥란이하고 잘 지내 줘."

나는 무슨 뜻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를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곤 밖으로 훌쩍 나와 버렸다.

나는 어디로든지 가버릴 생각이었던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어디로든지 꺼져 버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여간 나는 방 안에 그냥 자빠져 누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막연히 정순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아니 막연히 정순이를 원망하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 자신이 세상에서 꺼져 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집 뒤를 돌아 나갔다. 우리집 뒤부터는 보리밭들이었다. 보리밭은 아스라이 보이는 산기슭까지 넓은 해면같이 출렁이고 있었다. 지금 한창 피어 오르는 보리 이삭에서는 향긋한 보리 냄새까지 풍겨져 오는 듯했다.

내가 보리밭 사잇길을 거의 실신한 사람처럼 터덕터덕 건고 있 때, 문득 뒤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뒤돌아볼 만한 관심도 기력도 잃고 있었다. 나는 그냥 걷고 있었다. 그렇게 걷는 대로 걷다가 아무 데나 쓰러져 버렸으면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검푸른 보리밭 위로 어스름이 덮여 왔다.

그 어스름 속으로 비둘기뗀지 다른 새뗀지 분간할 수도 없는 새까만 돌멩이 같은 것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문득 나는 내가 어쩌면 꿈속에서 걸어가고 있는 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발을 멈추고 섰다. 그리하여 아까 날아가던 새까만 돌멩이 같은 것들이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다.

"오빠."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잠긴 목소리였다. 영숙이었다. 나는 영숙의 얼굴을 넋나간 사람처럼 어느 때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슬프다는 거냐? 나하고 슬픔을 나누자는 거냐?

나는 혼자 속으로 영숙이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영숙도 물론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오빠, 제발 죽지 마세요. 제가 사랑해 드릴게요. 오빠를 위해서 오빠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오빠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요.'

영숙의 굳게 다문 입 속에선 이런 말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다음 순간 영숙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그보다도 내가 먼저 영숙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고 하는 편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자 영숙이 내 가슴에 몸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안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내가 영숙에게 갑자기 왜 다른 충동를 느끼기 시작했는지 그것은 나 자신도 해명할 길이 없다. 아니 그보다도 갑자기 야수가 돼버린 나에게, 영숙이 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 반항을 하지 않았는지 이 역시 해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하여간, 나는, 다음 순간, 영숙을 안고 보리밭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녀의 간단한 옷을 벗기고 그 새하얀, 천사 같은 몸뚱어리를 마음껏 욕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숙은 어떤 절망적인 공포에 짓눌려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야릇한 체념 같은 것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간혹 들릴 듯 말 듯한 가는 신음 소리를 내었을 뿐 나의 거친 터치에도 거의 그대로 내맡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이미 실신상태에 빠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도 역시 자기의 모든 것을, 생명을, 내가 그렇게 원통하다고 울어대던 것의 대가로 치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까치가 울었던 것이다. 까작 까작 까작 까작 하는, 어머니가 가장 모진 기침을 터뜨리게 마련인, 그 저녁 까치 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 나의 팔다리와 가슴속과 머리끝까지 새로운 전류 같은 것이 흘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까작 까작 까작, 까작 그것은 그대로 나의 가슴속에서 울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실신한 것같이 누워 있는 영숙이를 안아 일으키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그녀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하여 다음 순간 내 손은 그녀의 가느단 목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 김동리 소설가

▲ 1913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 1920년 경주 계남소학교 입학

▲ 1926년 대구 계성중학교 입학

▲ 1928년 서울 경신고등보통학교 전입학

▲ 1935년 단편 '화랑의 후예'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

 

♤ 2020.02.05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