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수필산책] 「풍란」 이병기 (2020.03.30)

푸레택 2020. 3. 30. 18:30

 

 

 

 

 

 

 

 

 

 

 

 

 

 

 

● 풍란(風蘭) / 이병기

 

나는 난(蘭)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기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한다. 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건 서울 계동(桂洞)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독서(讀書)·작시(作詩)도 하고, 고서도 사들이고, 그 틈으로써 난을 길렀던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로운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無我無想)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에 피검되어 홍원·함흥서 2년 만에 돌아와 보니, 난은 반수 이상이 죽었다. 그해 여산(礪山)으로 돌아와서 십여 분을 간신히 살렸다. 갑자기 8.15 해방이 되자 나는 서울로 또 가 있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와 보니 난은 모두 죽었고, 겨우 뿌리만 성한 것이 두어 개 있었다. 그걸 서울로 가지고 가 또 살려 잎이 돋아나게 하였다. 건란(建蘭)과 춘란(春.蘭)이다. 춘란은 중국 춘란이 진기한 것이다. 꽃이나 보려하던 것이, 또 6·25 사변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해 여름에 가 보니, 장독대 옆 풀섶 속에 그 고해 (枯骸)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주로 와 양사제(養士齊)에 있으매, 소공(素空)이 건란 한 분(盆)을 주었고, 고경선 군이 제주서 풍란 한 등걸을 가지고 왔다. 풍란에는 웅란(雄蘭)·자란(雌蘭) 두 가지가 있는데, 자란은 이왕 안서(岸曙) 집에서 보던 그것으로서 잎이 넓죽하고, 웅란은 잎이 좁고 빼어났다. 물을 자주 주고, 겨울에는 특히 옹호하여, 자란은 네 잎이 돋고 웅란은 다복다복하게 길었다. 벌써 네 해가 되었다.

 

십여 일 전 나는 바닷게를 먹고 중독되어 곽란이 났다. 5,6일 동안 미음만 마시고 인삼 몇 뿌리 다려 먹고 나았으되, 그래도 병석에 누워 더 조리하였다. 책도 보고, 시도 생각해 보았다. 풍란은 곁에 두었다. 하이얀 꽃이 몇 송이 벌렸다. 방렬(芳烈)·청상(淸爽)한 향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밤에도 자다가 깨었다. 그 향을 맡으며 이렇게 생각을 하여 등불을 켜고 노트에 적었다.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瑛瓏)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玉)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청량(淸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은 하이하고도 여린 자연(紫然)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品)이며 그 향(香)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완당 선생이 한묵연이 있다듯이 나는 난연(蘭緣)이 있고 난복(蘭福)이 있다. 당귀자·계수(械樹)나무도 있으나, 이 웅란(雄蘭)에는 백중(伯仲)할 수 없다. 이 웅란은 난 가운데에도 가장 진귀(珍貴)하다.

 

'간죽향수문주인(看竹向須問主人)'이라 하는 시구가 있다. 그도 그럴듯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 인가를 알겠다. 고서(古書) 도 없고, 난(蘭)도 없이 되잖은 서화(書畵)나 붙여 논 방은, 비록 화려 광활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릿집에 불과하다. 두실와옥(斗室蝸屋)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 병을 두었다면 삼공(三公)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 작가 소개

이병기(李秉岐, 1891~1968) : 호는 가람. 전북 익산 출생. 한성 사범학교를 다녔음. 1920년대 초반부터 시조부흥운동에 가담하면서 전통시가 형태인 시조의 현대화 작업에 앞장선 바 있음. 그의 작품은 관념과 생경한 말씨를 걸러내고 말의 결을 이용한 가락과 선명한 심상이 대치되어 나타남, 또한 제재 면에서도 자연과 재래적인 입장을 취한 인간사 주변의 것들을 택하고 있음. 그의 시조의 미학은 우리말이 빚어내는 느낌이나 격조를 가능한 크게 살리는 방향에서 세워졌고, 두드러지는 것은 매화와 난초를 다룬 작품들임. 매화와 난초는 멋과 풍류를 즐기는 문인들이 많이 다루는 소재로, 가람의 정신 자세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았음. 이것은 그가 어려서 한문과 한시를 배우며 자랐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도 추측되는 일임.

 

♤ 작품 해설

이 수필은 1954년 《원광문화》에 발표한 작품이다. 가람 이병기에게 난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난은 가람의 정신 세계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자, 고결한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대상으로 이 글에는 존재한다. 이병기는 식민지 시대를, 그리고 해방 전후의 곤혹한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를, 이어서 궁핍한 전후의 시대를 난과 더불어 겪었으며, 난을 통해 뛰어 넘고자 하였다. 몇 분의 난, 고서 몇 권, 그에 덧붙여 농익은 술이야말로 가람 문학, 가람 생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은 난의 일반적인 생태를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살며, 물 거름 햇빛이 생태를 좌우하는 것이라는 지식이 피력되어 있다. 그러나 물·거름·햇빛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모두를 적절하게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글은 난의 아름다움, 방향을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순간을 기술함으로써 난과 자신의 생활을 관련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난을 미처 돌 볼 수 없었던 자신의 개인사가 조선어학회사건, 8. 15 해방, 6. 25사변 등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제대로 길러내지 못했던 일들을 전개하고 있다. 그후 또 다시 난을 기르게 되었고, 병석에서 난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절감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필자는 일반적인 교훈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글 전체에서 두드러진 것은 수필 속에 나타나는 시조와 수필의 전체적인 기품이 명료하게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난의 품(品)과 향(香)은 비록 감추어져 있어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자신과 존재는 비록 잘 알려져 있지 않아도 알아주는 이가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수필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전달한다고 할 때, 이 글은 자신과 난초와의 인연을 담담하게 기술함으로써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고결한 기품과 정신의 깊이를 나타내는 좋은 문학작품이라 할 것이다.

 

♤ 난초를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 난초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고결한 인간의 정신적 세계를 표상한다.

 

♤ 본문의 시조가 담고 있는 주제는 무엇인가?

시조는 두 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 연과 둘째 연의 첫 행은 난의 속성을 제시한다. 이어서 그 기품과 향기는 비록 눈에 띠지 않는 곳에 있어도 동일한 정신적 깊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안다는 것으로 정신적 삶의 소중함을 노래하고 있다. 시에서 대상은 그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의 면모임을 기억해야 한다.

 

[출처] 《고교생이 알아야 에세이》 발췌

 

/ 2020.03.30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