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학마을 사람들」 이범선 (2019.12.13)

푸레택 2019. 12. 13. 20:03

 

 

 

● 학마을 사람들 / 이범선(李範宣)

 

자동차 길엘 가재도 오르는 데 십 리, 내리는 데 십 리라는 영(嶺)을 구름을 뚫고 넘어, 또 그 밑의 골짜기를 삼십리 더듬어 나가야 하는 마을이었다. 강원도 두메의 이 마을을 관(官)에서는 뭐라고 이름지었는지 몰라도 그들은 자기네 곳을 학마을[鶴洞]이라고 불렀다. 무더기무더기 핀 진달래꽃이 분홍 무늬를 놓은 푸른 산들이 사면을 둘러싼 가운데 소복이 일곱 집이 이 마을의 전부였다. 영마루에서 내려다보면 꼭 새 등우리 같았다. 마올 한가운데는 한 그루 늙은 소나무가 섰고, 그 소나무를 받들어 모시듯, 둘레에는 집집마다 울안에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때때로 목청을 돋우어 길게 우는 낮닭의 소리를 받아, 우물가 버드나무 밑에서 애들이 부는 버들피리 소리가 피리 피리 필릴리 아득히 영마루에까지 아지랑이를 타고 피어 올랐다. 이 학마을 이장(里長)영감과, 서당의 박훈장(朴訓長)은 지팡이로 턱을 괴고 영마루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둘이 다 오늘 아침 면사무소 마당에서 손자들을 화물자동차에 실어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왜놈들은 끝내 이 두메에서까지 병정을 뽑아 내었던 것이었다.

두 노인의 흐린 눈들은 꼭 같이 저 밑에 마을 한가운데 소나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부터 지금 낮이 기울도록 삼십 리 길을 같이 걸어오면서도 거의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이윽고 이장영감이 지팡이와 함께 쥐었던 장죽으로 걸터앉은 바윗등을 가볍게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학이 안 오는 지가 벌써 삼십 년이 넘어."

"그렇지, 올에 삼십육 년짼가?"

박훈장은 여전히 마을을 내려다보는 채였다.

"내가 마흔넷에 나던 해니까, 그렇군 꼭 서른여섯 해째군. 하."

이장영감은 장죽에 담뱃가루를 담으며 한숨을 쉬었다. 또다시 그 느릿느릿한 잠꼬대 같은 대화마저 끊어졌다.

꼬꾜--

또 한번 마을에서 닭이 울었다. 다음은 고요하다. 졸리도록 따스한 봄 햇빛이 휜 무명 주의 등에 간지러웠다. 이장영감은 갓끈과 함께 흰 수염을 한번 길게 쓸어 내렸다.

 

학마을. 얼마나 아름답고 포근한 마을이었노.

이장영감은 어느새 황소 같은 더벅머리 총각으로 돌아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톳불을 돌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옛날 학마을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한쌍의 학이 찾아오곤 하였었다. 언제부터 학이 이 마을을 찾아오기 시작하였던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올해 여든인 이장영감이 아직 나기 전부터라 했다. 또 그의 아버지가 나기도 전부터라 했다. 씨 뿌리기 시작할 바로 전에 학은 꼭 찾아오곤 하였었다. 그리고는 정해 두고 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노송 위에 집을 틀었다.마을 사람들은 이 노송을 학나무라고 불렀다.

학이 돌아온 날은 학마을의 가장 큰 잔칫날이었다. 학나무 밑에선 호기롭게 떡을 쳤다. 서당에는 어른들이 모여 앉아 술상을 앞에 놓고 길고 느린 노래를 흥얼흥얼하였다. 그러나 가장 즐겁기는 젊은이들이었다. 이 마을 젊은이들이 마음놓고 술을 마실 수 있는 날은 이날뿐이었다. 그 외에는 혼인잔치에서까지도 젊은이들은 술을 마셔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이 학마을의 율법이었다.

그날은 밤이 깊도록 학나무 밑에 화톳불이 이글이글 탔다. 아직 추운 삼월이라 불에 둘러앉은 젊은이들이 탁배기를 사발로 마구 들이켰다. 그러면 마을 처녀들은, 이 억배로 마셔 대는 탁배기와 안주를 떨어지지 않게 날라 와야 했다. 그런 때면 그 처녀가 화톳불을 싸고 빙 둘러앉은 청년들 중에 누구의 어깨 너머로 술이나 안주를 가운데 상에 넘겨 놓는가가 문제였다. 처녀가 술이나 안주를 누구의 어깨 너머로든지 살짝 넘겨 놓으면 그때마다 일제히 와 하고 함성을 올렸다. 술에 단 젊은이들의 검붉은 얼굴들이 와그르르 웃으면, 처녀들은 불빛에 빨가니 단 얼굴을 획 돌려 치마폭에 쌌다. 그때 탄실이는 꼭 억쇠- 지금 이장영감의 어깨 너머로 듬뽁듬뿍 안줏거리를 날라다 놓곤 했다. 그러면 또 와아 함성을 올렸다. 억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탄실이는 긴 머리채를 흔들며 달아나면서도 억쇠를 향하여 눈을 흘기기만은 잊지 않았다. 억쇠는 그저 즐거웠다.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억쇠는 일어나 춤을 추었다. 젓가락으로 두들기는 사발 장단에 맞추어 덩실덩실 돌았다. 어느 해엔가는 잔뜩 취하여 잠방이 띠가 풀린 것도 모르고 춤을 추다 웃음판에 그대로 나가넘어진 일도 있었다.

학으로 하여 즐거운 이야기는 마을 처녀에게도 있었다. 처녀들도 역시 학이 좋았다. 그네들은 물을 길러 뒷산 밑 박우물로 갔다. 그러자면 꼭 학나무 밑을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어쩌다 학의 똥이 처녀들의 물동이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러면 그 처녀는 그해 안에 시집을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이 찬 처녀들은 물동이를 이고 학나무 밑을 지날 때면 걸음걸이가 더욱 의젓하였다. 한 해에 한둘은 꼭 물동이에 흰 학의 똥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틀림없이 그해 안에 시집을 가곤 하였다.

탄실이가 시집을 가던 해에도 그랬다. 물방앗간 옆 대추나무 밑에서 자근자근 빨간 댕기를 씹으며,

"학이..."

하고 탄실이가 고개를 숙였을 때, 억쇠는 구름 사이 으스름 달을 쳐다보았다. 탄실이는 이미 아버지가 정해 놓은 곳이 있었다. 한참 만에 억쇠는 탄실이의 보등한 손목을 꽉 붙들었다. 그들은 그 길로 영을 넘었다. 호 호, 호호호. 길가 나무 꼭대기에서 부엉새가 울었다. 그래도 억쇠의 굵은 팔에 안겨 걷는 탄실이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서였던지 다음날 아침 그들은 탄실이 아버지한테 붙들리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가을에 탄실이는 울며 단풍 든 영을 넘어 이웃 마올로 시집을 가고 말았다. 다음해부터는 학날이 와도 억쇠는 춤을 추지 않았다.

"학이 안 오던 그핸 가물도 심하더니."

"허 참, 나라가 망하던 판에 오죽해."

이장영감은 장죽과 쌈지를 옆의 박훈장에게 건네 주었다.

이장이 마흔네 살 나던 해였다.

씨 뿌릴 준비를 다 해놓고 마을 사람들은 학을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계절이 다 늦도록 학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학 없이 씨를 뿌렸다. 가물이 들었다. 봄내 여름내 비 한 방울 안 왔다. 모든 곡식은 바삭바삭 말라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헛되이 학나무만 쳐다보았다. 학나무에는 지난해에 들었던 학의 둥우리만이 빈 채 달려 있었다.

"학만 있었으면."

마을 사람들은 여느 해에 그렇게도 영험하던 학의 생각이 몹시도 간절하였다. 이런 때면 학은 늘 하늘과 그들 사이에 있어 주었었다. 가물이 들어도 그들은 학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학이 그 긴 주둥이를 하늘로 곧추고 비오- 비오- 울어 고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또 하늘은 꼭 비를 주시곤 했다. 장마가 져도 그들은 또 학을 쳐다 보았다. 이번엔 학이 가 가 길게 울어 주기만 하면 비는 곧 가시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 것도 그들은 미리 알 수 있었다. 학이 삭은 나뭇가지를 자꾸 둥우리로 물어 올리면 그들은 곡식을 빨리 빨리 거두어들여야 했다.

그러던 그들은 학이 없던 그해, 그렇게 가물이 심해도 어떻게 하늘에 고해 볼 길이 없었다. 그저 그들은 저녁때 들에서 돌아오다가는 빨간 노을을 등에 지고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서 빤히 석양을 받은 학의 빈 둥우리를 오랜 버릇으로 한참씩 쳐다보고 섰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리던 비 대신 기막힌 소문이 날아 들어왔다. 왜놈들이 이 나라를 빼앗고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며칠 동안 김을 맬 생각도 않고 학나무 밑에들 모여 앉아 멍히 맞은편 산만 바라보고들 있었다.

그런데 또 한겹 더 덮쳐 마을 안에 열병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한집 두집, 꼭 젊은 일꾼들이 앓아누웠다. 거의 날마다 곡소리가 들렸다. 학마을은 그대로 무덤이었다.

다음해 봄도, 또 다음해 봄도 학은 돌아오지 않았고 흉년만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제 학이 버리고 간 이 학마을에서는 살 수 없으리라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부터인지 퍼져 나왔다.

한 집이 떠났다. 또 한 집이 떠났다.

그들은 영마루에 서서 한참씩 학나무를 내려다보다가는 드디어 산을 넘어 어디론지 떠나가곤 하는 것이다. 근 이십 가구나 되던 마을이 겨우 일곱 집만이 남았다.

그 동안 이장영감도 몇 번이나 밖으로 나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그는 이 학마을을 버리지 못했다. 무쇠 같은 그의 가슴에 첫사랑이 벌겋게 달아 오르던 곳이라서만은 아니었다. 그저 어쩐지 이 학마을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이었다. 빈 둥우리나마 아직 남아 있는 학나무 밑을 떠나서 왜놈들이 들끓는 마당에 어딜 가면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남아 있는 딴사람들도 그랬다.

학은 오지 않고 이름만 남은 학마을은 말할 수 없이 고달팠다. 그래도 해마다 봄은 찾아왔다.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타기 시작하면 그들은 양지쪽에 앉아 수숫대로 바자를 엮으며 어린것들에게 가지가지 학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이었다. 어린애들에게는 그건 해마다 들어도 재미있는 옛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야기하는 어른들에게는 그건 슬픈 추억이었고 또 봄마다 속아 벌써 삼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끝내 아주 버릴 수는 없는 희망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학이 어딜 갔을까?"

"알 수 없지."

"살아 있기는 살아 있을까?"

"학은 장생불사(長生不死)라지 않아?"

"장생불사."

이장영감은 또 한번 천천히 수염을 내리쓸다 그 끝을 쥐고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쾡, 쾡, 쾡, 쾡, 쾡, 쾡, 쾡, 쾡.

바로 그때였다. 저 밑에 마을에서 꽹과리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 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신호였다.

 

(중략)

 

구월이 되었다. 이제 학의 새끼는 수월히 건너편 낭에까지 날았다. 아침에도 이장영감은 일어나는 길로 앞문을 열었다. 학나무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학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상한 예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좀더 자세히 둥우리를 살펴보았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날기 연습을 하는가 했다. 그런데 학은 낮이 기울도록 안 보였다.

"갔구나!"

이장영감은 긴 한숨을 쉬었다. 노해서 간 학은 앞으로 영영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방에 들어와 목침을 베고 누웠다,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르 귀로 흘러내렸다. 한창 농사 때에 석달 동안을 볶여 난 그해는 농작물이 볼 게 없었다. 그대로 겨울은 닥쳐왔다. 사면의 높은 영은 흰 눈으로 덮였다. 빈 학의 둥우리에도 소복이 휜 눈이 쌓였다.

마을 사람들은 산에 가 나무를 해다 며칠에 한 번씩 장거리로 지고 나갔다. 그들은 그저 어서 봄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섣달 접어들면서부터 멀리 북녘 하늘에서 때때로 우르릉 우르릉 천둥소리가 들려 왔다. 필시 그건 무슨 흉조라고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장거리에 나무를 지고 나갔던 마을 사람 한 사람이 헐레벌떡거리며 이장네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장님, 큰일났습니다. 장거리에서들은 지금 피난을 간다고 야단들이야요. 오랑캐가 새까맣게 밀고 들어온다고 지금..."

"음."

이상영감은 수염 속에서 입을 꼭 한일자로 다물었다. 한번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스르르 눈을 감으며 벽에다 뒷머리를 기대었다.

"덕이야, 펭과리를 쳐라."

이윽고 이장영감은 덕이를 불렀다.

다음날은 흐릿한 하늘에서 솜 같은 눈송이가 펄펄 내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해뜰 무렵에 학나무 밑으로들 모였다.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어린것들은 싸 업기도 하였고 또 손목을 잡고 걸리기도 했다. 이장영감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일 만해서 밖으로 나왔다. 토시로 손바닥에까지 끌어 내려 지팡이를 싸쥐었다.

"다들 모였나?"

"네, 그런데 저 박선생님께서는..."

덕이가 어깨에 진 지게를 한번 추어 올리며 대답했다.

"음."

이장영감은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박훈장이 이장영감 곁으로 걸어갔다.

"영감!"

박훈장은 지팡이 꼭대기에 올려놓은 이장영감의 손등을 두 손으로 꼭 싸쥐었다. 두 노인 손둥에 사뿐사뿐 흰 눈송이가 날아와 앉았다.

"알지. 내 다 알지."

이장영감은 고개를 수그린 채 주억주억하였다.

"그래도 내겐 그놈 하나밖에... 혹시나 돌아올까 해서."

"그럼, 그렇구말구. 내 다 알지."

이장영감은 그저 고개만 자꾸 주억거렸다. 박훈장은 이장영감의 손을 다시 한번 쓸어 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털썩 이장네 마루에 수저앉아 버렸다. 으흐흐흐 하는 박훈장의 울음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듯이 이장영감은 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섰다.

"그럼 가자."

이장영감은 봉네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한 손에 들고 선두에 섰다. 그 뒤를 한 줄로 마을 사람들은 따라 걸었다.

박훈장은 비틀비틀 학나무 밑으로 갔다. 그리고 어린애 모양 으흐흐 으흐흐 울며 눈발 속에 사라져 가는 행렬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남자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생전 처음 마을 밖으로 나가는 그들이었다. 정작 영마루에 올라선 그들은 한참이나 마을 쪽을 향하여 서 있었다. 펄펄 날리는 눈발 속에 앞이 뽀얗다. 마을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울며 영을 넘어 내려갔다.

팔십 리를 걸었다. 그리고 겨우 화물차 꼭대기에 기어 올랐다. 빈대처럼 달라붙어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부산이었다.

부산은 강원도 두메보다 봄이 일렀다. 한겨울을 그 속에서 난 창고 모퉁이에 파릇한 풀 싹이 돋아 올랐다. 그들은 잊어버렸던 것처럼 새삼스레 마을이 그리웠다. 저녁때 모여 앉으면 그들은 은근히 이장영감의 얼굴을 살폈다. 이장영감은 그저 가느스름히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따스한 날 그들은 떠났다. 행장들이 마을을 떠날 때보다 더 초라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사람 수효가 줄었다. 여섯 가구 스물세 사람이던 것이, 지금 조그마한 보따리를 지고 이고 나선 것은 열아홉 사람뿐이었다. 봉네의 남동생 하나는 병정으로 뽑혀 나갔고, 어린애 둘은 두부비지만 먹다 죽었다. 그리고 젤 큰 피해는 부두 노동을 하다 궤짝에 치여 죽은 덕이 아버지였다.

이번엔 기차를 탈 수도 없었다. 걸었다.

올 때만 해도 봉네가 옆에서 좀 거들기만 하면 되었던 이장영감이었으나, 돌아가는 길에는 덕이와 봉네가 양쪽에서 부축을 해야 했다. 처음 오십 리, 다음날 사십 리, 삼십 리 점점 줄어지다가는 하루씩 어느 마을에고 들어가 쉬었다. 그리고는 또 이장영감을 선두로 하고 걸었다. 이장영감은 점점 쇠약해 갔다. 수염이 기운 없이 축 늘어졌다. 푹 꺼진 두 눈만이 애써 앞을 더듬고 있었다.

"아가, 늙은 것이 공연히 널 고생을 시키는구나. 허허허.”

길가에 앉아 쉴 때면 혼자 돌아앉아 부어터진 발가락을 어루만지는 봉네의 등을 이장영감은 가엾게 쓸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봉네는 얼른 신을 신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으로 돌아앉는 것이었다. 웃어 보이려고 해도 어쩐지 자꾸 눈물이 쏟아져 나와 그네는 끝내 고개를 못 들곤 하였다.

보름째 되던 날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영마루에 섰다.

"야, 우리 마을이다."

애들이 제일 먼저 소리를 질렀다. 다들 바위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았다. 멍히 저 밑에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들의 눈에는 떠나던 날처럼 또 눈물이 징 소리를 내며 괴어 올랐다.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그저 여기저기서 코를 들이켜는 소리만 들려 왔다.

 

마을은 변해 있었다.

학나무는 홈싹 타 새까만 뼈만이 앙상하게 서 있었고, 또 이쪽 이장네 집과 봉네네 집터에는 아직 녹지 않은 흰 눈 가운데 깨어진 장독이 하나 우뚝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딴 집들은 다행히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단두 사람, 남겨 두고 갔던 바우 어머니와 박훈장은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빈 마을은 눈 속에 잠겨 있었다.

"갔지 갔어."

"바우녀석이 와서 데려갔을 테지."

"그러구 가면서 학나무하구 이장댁에 불을 놓았지 뭘."

마을 사람들은 모여 앉기만 하면 분해하였다. 이장영감은 박훈장이 쓰던 서당 글방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여든에도 능히 멍석을 메어 나르던 이장영감이었으나 이제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때때로 한숨을 길게 내쉬곤 하였다.

덕이는 이제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집을 다시 지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괭이를 들고 옛 집터로 갔다. 그날 덕이는 무너진 벽 밑에서 반 타다 남은 시체를 하나 파내었다. 박훈장이었다.

이장영감은 덕이에게서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을 뿐이었다. 그래도 눈물이 베개로 굴러 떨어졌다.

그날 밤 이장영감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덕이의 손을 더듬어 잡은 이장영감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간신히 입을 움직였다.

"학, 학나무를, 학나무를..."

이장영감은 잠들듯이 숨을 거두었다. 흰 수염이 길게 가슴을 내리덮고 있었다.

상여는 둘인데 상주는 덕이 한 사람이었다. 그날 마을 사람들은 다들 뒷산으로 따라 올라갔다. 피난을 가던 때처럼 이장영감이 앞서 갔다.

저녁때가 거의 다 되어서야 그들은 산을 내려왔다. 이번엔 덕이가 맨 앞에 두 주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걸었고, 그 바로 뒤를 봉네가 흰 보자기로 뿌리를 싼 조그마한 애송나무를 하나 어린애처럼 앞에 안고 따르고 있었다.

(『표구된 휴지』, 책세상, 1989)

/ 「학마을 사람들」 이범선(李範宣)

 

☆ 이범선(李範宣) 소설가

▲ 1920년 평남 안주군에서 태어남

▲ 1938년 진남포 공립상공학교 졸업

▲ 1949년 동국대 국문과 졸업

▲ 1958년 '갈매기'로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 1961년 '오발탄'으로 동인문학상 수상

▲ 1970년 '청대문집 개'로월탄문학상 수상

 

● 전후 리얼리즘의 외로운 명맥 / 하정일(문학평론가)

 

전후문학(戰後文學)에서 이범선이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그 독특성이란 그가 리얼리즘의 명맥을 이은 드문 작가 중의 하나라는 점에 있다. 전후문학의 대표적 작가들인 손창섭, 장용학, 김성한, 오상원 등의 문학세계를 보면 쉽게 확인되듯이 당시의 주류는 비(非)리얼리즘 문학이었다. 이렇게 된 일차적인 이유로는 주요 리얼리즘 작가들의 월북으로 남한 문학의 헤게모니를 '순수문학' 진영에서 쥐게 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리얼리즘적 전통의 이러한 단절은 전후작가들로

하여금 '순수문학'이나 모더니즘을 자신의 문학적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다. 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세례 또한 리얼리즘 문학이 힘을 잃게 만든 중요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삶의 우연성과 주관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는 필연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리얼리즘과 근원적으로 배치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에 깊이 침윤된 전후작가들이 리 얼리즘에서 멀어진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했다.

이범선은 이처럼 리얼리즘의 전통이 붕괴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리얼리즘의 명맥을 보존함으로써 이후 리얼리즘 문학이 재생하는 데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이범선이 리얼리즘의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으로는 두 가지 정도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서민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이것은 이범선 문학을 관통하는 중심적 문제의식인 동시에 리얼리즘의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이로써 이범선이 왜 리얼리즘의 기율에 충실할 수 있었는지가 분명해진다. 요컨대 이범선의 문제의식이 그를 리얼리즘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한 것이다.

하지만 이범선의 문학세계가 리얼리즘만으로 착색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진 「학마을 사람들」이나 「갈매기」 등은 서정적 단편소설로 리얼리즘의 세계외는 거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범선의 소설세계는 리얼리즘적 단편소설과 서정적 단편소설로 나누어긴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경향은 시기적으로 구분된다기보다는 거의 혼효되어 있는데, 이는 이범선이 양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 혹은 갈등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가 철저히 대립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리얼리즘적 단편소설과 서정적 단편소설 사이에는 어떤 공통항이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는 일종의 보편적 휴머니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범선의 보편적 휴머니즘은 때로는 서민의 소외된 삶에 대한 깊은 동정으로, 때로는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분노와 냉소로, 심지어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보편적 휴머니즘이 현실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보편적 휴머니즘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것은 현실을 추상화시켜 모순의 역동적 운동을 보기 어렵게 만든다. 보편적 휴머니즘이 종종 이상주의와 비관주의의 양극단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이범선의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서정적 단편소설의 경우 그 정도는 더욱 심하다. 그러나 보편적 휴머니즘이 리얼리즘과 결합할 때 그것은 강력한 비판적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의 리얼리즘적 단편소설이 거기에 해당한다.

 

2.

이범선의 서정적 단편소설들은 대부분 잃어버린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서정성의 본질이 원래 이것이거니와 그런 점에서 이범선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모티프는 가령 「갈매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교사 발령을 받아 들어온 남도 어느 섬에서의 일상을 잔잔한 톤으로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평범한 섬생활을 통해 잃어버린 아름다운 세계의 원형을 보여 준다. 물론 섬에도 갈등과 아픔이 존재한다. 다방 주인 부부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나 6.25로 아들과 헤어진 어느 거지 노인의 서글픈 생애가 그것이다. 하지만 다방 주인 부부의 죽음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미화되며, 거지 노인의 서글픈 삶은 아들과의 만남으로 끝이 난다. 다시 말해 섬에서의 갈등이나 아픔은 해결로 귀착되는 갈등이나 아픔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섬의 완전성을 돋보이게 해줄 뿐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이상향이 비현실의 세계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작품의 말미에서 주인공이 '어쩐지 자기도 이 포구를 떠나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독백하는 것이다. 섬을 떠나면 기다리는 것은 해결될 수 없는 갈등과 아픔이 난무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이상향의 세계를 떠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섬이 잃어버린 이상향, 즉 농경과 그리움으로만 존재하는 비현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섬은 실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아름다운 세계를 표상하는 일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범선의 서정적 단편소설이 목가적인 전원 문학으로 떨어지지 않고 아슬아슬한 서사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이처럼 이상향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긴장의 정도는 매우 위태로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학마을 사람들」은 돋보인다. 요컨대 「학마을 사람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을 학을 매개로 상징적으로 그려 내는 데 나름대로 성공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정적 상징인 학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한 마을의 파탄이라는 서사적 갈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데 기인한다. 다시 말해 「갈매기」의 갈등이 서정적 해결을 지향하고 있는 데 비해 「학마을 사람들」의 갈등은 서사적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서사적 갈등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성을 환기시켜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를 심정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데 그침으로써 서정적 주관성의 세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역사의 심정적 이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역사에 대한 운명론적 인식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이 인간의 주체적 실천이 아니라 학의 방문 여부인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학만 있었으면."

마을 사람들은 여느 해에 그렇게도 영험하던 학의 생각이 몹시도 간절하였다. 이런 때면 학은 늘 하늘과 그들 사이에 있어 주었었다. 「학마을 사람들」

 

학이 나타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발상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주체적 선택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학마을 사람들」은 우리의 민족사를 운명에 종속시킨 채 학이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게다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하는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이다. 이 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심정적 이해와 결합하여 우리 근현대사의 객관적 실상을 상당 부분 은폐시키고 있는데,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직접적 개입이 문학에서 갖는 위험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학마을 사람들」이나 「갈매기」 등의 서정적 단편소설은 사라진 이상향과 전도된 현실 사이의 간극과 긴장을 강조함으로써 전후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려는 진지한 노력을 보여 준다.

 

3

이범선의 서정적 단편소설과는 달리 리얼리즘적 단편소설들은 전후의 경제적 궁핍상과 그것이 몰고 온 비극을 엄정하게 그려 냄으로 심적 모순들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역사의 진보에 대한 전망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당대의 사회는 이범선 개인의 한계라기보다는 역사의 한계에서 기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당시는 역사 진보의 구체적 계기를 찾아내 그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던 것이다. 이런 시대에 가능한 길은 부정성의 본질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범선의 리얼리즘적 단편소설은 비판적 리얼리즘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

「오발탄」은 한 월남 가족의 비극적 삶을 통해 전후 경제의 파탄상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전후 경제의 파탄상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월남민들의 경우 그 궁핍상은 생활 터전의 상실이라는 조건까지 겹쳐 더욱 심각했다고 할 수 있다. 가난에 찌들리면서도 사회적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전형적 소시민 '철호', 가족의 극한적 궁핍을 관습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해결하려다 마지막 순간 '양심선'에 걸려 구속된 영호',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양공주 노릇을 하는 '명숙', 가난한 삶에 함몰되어 과거의 재기와 발랄함을 잃어버리고 결국엔 애을 낳다 죽고 마는 아내, 그리고 이북에서의 풍족한 생활과 남한에서의 극한적 궁핍 사이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려 '가자' 소리만 되풀이하는 어머니-- 이들은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 신음하는 당대 민중들의 전형이다. 철호가 어떻게 보면 희화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냉철하게 추적하면서 「오발탄」은 한 가족의 비극이 단지 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비극임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이러한 삶의 모순이 반드시 끝장나야 함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강조한다.

 

"가자!"

철호는 또 한번 귓가에 어머니의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푹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차가 네거리에 다다랐다. 앞의 교통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다.

차가 섰다. 또 한번 조수애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죠?"

그러나 머리를 푹 앞으로 수그린 철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따르르룽 벨이 울렸다. 긴 자동차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호가 탄 차도 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행렬에 끼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오발탄」

 

'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차는 나아갈 방향을 확실히는 모르지만 '어디건 가긴 가야 하는' 1950년대의 절박한 상황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서 '가자'라는 외침은 소설 전체에 걸쳐 곳곳에 효과적으로 배치됨으로써 삶의 비극성과 변화의 절박성이라는 주제의식을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발탄」은 '부정적 전망'을 기반으로 한 비판적 리얼리즘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 준다.

한편 「오발탄」은 철호 일가의 비극이 당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매우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긴 하지만, 1950년대 문학의 전반적 성격을 감안할 때 이러한 통찰은 소중하다.

 

세상에는 이런 세 층의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 즉 돈을 모으기 위해서만으로 필요 이상의 돈을 버는 사람과, 필요하니까 그 필요하니만치의 돈을 버는 사람과, 또 하나는 이건 꼭 필요한 돈도 채 못 벌고서 그 대신 생활을 조리는 사람들. 신발에다 발을 맞추는 격으로, 형님은 아마 그 맨끝의 층에 속하겠지요. 「오발탄」

 

이처럼 「오발탄」은 칠호 일가의 삶이 한 사회계급의 삶의 일부이며, 그 계급의 삶은 사회적 생산관계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즉 철호 일가의 극한적 궁핍이 사회적 생산관계로 말미암은 결과라는 것인데, 이를 통해 「오발탄」은 철호 일가의 비극적 삶의 사회적 연관을 짚어 준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1950년대의 경제적 궁핍상을 월남 가족의 삶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분단 문제에까지 소설적 지평을 확대시키기도 한다. 장용학 같은 작가들도 분단 문제를 다루긴 했지만 그것을 비역사적 수준으로 추상화시켜 버린 데 반해, 이범선은 분단 문제를 일상의 구체적 삶 속에서 추적함으로써 추상성의 함정을 벗어난다.

아직까지는 분단 문제가 중심 주제가 아니라 소설적 배경으로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분단 소재 작품들과 대동소이하지만, 「오발탄」은 분단 문제를 어떤 측면에서 다룰 것인가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접점인 분단모순에 대한 총체적 형상화를 요구하는 것은 분단 체제와의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기에는 시기상조였던 1950년대의 상황에서는 무리한 기대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오발탄」의 등장인물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세계의 압도적 힘에 함몰되어 버린 존재들이다. 이들은 현실의 논리와 질서에 순응할 뿐 거기에 저항하는 법이 없다. 영호가 그 점에서는 약간 예외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그 역시 결국엔 '양심선'이라는 현실 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이러한 순응적 인물들로 작품이 구성될 경우 자칫하면 비관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종종 있는데, 「오발탄」은 그 같은 함정에서 벗어나 오히려 부정적 전망이란 형식으로 변혁의 당위성 혹은 필연성을 제시한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인물들이 구체적 삶과의 상호 연관 가운데서 유기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철호 일가의 비극이 구체적 삶과 유기적 연관을 맺으면서 개인사를 넘어 공동체의 역사로까지 상승할 수 있었고,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철호 일가의 비극이 조명됨으로써 1950년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드러내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인물 묘사의 치밀성과 절제력은 인물의 전형성을 강화시켜 주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생생한 현실성을 제공해 주는 기반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발탄」은 소설문학에서 리얼리즘에의 충실이 얼마나 긴요한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중략)

 

4.

이범선의 소설세계를 서정적 단편소설과 리얼리즘적 단편소설로 나누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이범선 문학의 본령이 리얼리즘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서정적 단편소설의 경우 사라진 이상향과 전도된 현실 사이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아 나가려는 작가의 진지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실상을 왜곡하거나 이상화시키고 있는 데 비해, 리얼리즘적 단편소설은 서민들의 구체적 삶에 대한 천착을 통해 경제적 궁핍화와 자본주의적 사물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범선은 비판적 리얼리즘 전통의 외로운 계승자라할 수 있다. 특히 전후문학의 반(反)리얼리즘적 경향을 고려할 때 이범선의 소설사적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물론 그의 소설들이 당대 사회의 총체적 형상화에는 이르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한계는 모순들의 중층적 연관관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 기인한 결과인데, 이와 관련하여 이범선이 우리 근대문학의 풍부한 리얼리즘적 전통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또한 소설 곳곳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도 현실의 총체적 인식을 부분적으로 방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체험으로부터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점도 원인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범선이 노골적인 반공주의자란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반공 이데올로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는 개인적 한계인 동시에 역시사적 한계이다. 분단이 고착화되고 파시즘적 독재가 횡행하는 한편 반공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다가 진보적 운동의 전통마저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삶의 총체적 연관을 인식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범선의 소설세계는, 루카치의 용어를 빌리면, '더 이상 아님(no longer)'의 시대에 나아갈 수 있는 한 최대치를 보여 준다. 그 이상은 1980년대 이후의 문학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고, 이범선의 리얼리즘적 단편소설은 양자를 이어 주는 디딤돌이었다고 있을 것이다.

 

/ 한국소설문학대계 (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