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수난 이대」 하근찬 (2019.12.12)

푸레택 2019. 12. 12. 11:37

 

 

 

● 수난 이대(受難 二代) / 하근찬(河瑾燦)

 

진수가 돌아온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온다.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고, 아무개 아무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이 없는데, 우리 진수는 살아서 오늘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어깻바람이 날 일이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 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 채고 말았다. 가슴이 펄럭거리고, 허벅지가 빼근했다. 그러나 그는 고갯마루에서도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 건너 멀리 바라보이는 정거장에서 연기가 물씬물씬 피어 오르며 삐익 기적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아들이 타고 내려올 기차는 점심때가 가까워야 도착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해가 이제 겨우 산등성이 위로 한뼘 가량 떠올랐으니, 오정이 되려면 아직 차례 멀었다. 그러나 그는 공연히 마음이 바빴다. 까짓것, 잠시 앉아 쉬면 뭐 할 끼고.

만도는 손가락으로 한쪽 콧구멍을 찍 누르면서 팽! 마른코를 풀어 던졌다. 그리고 휘청휘청 고갯길을 내려간다. 내리막은 오르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고 팔을 흔들라치면 절로 굴러 내려가는 것이다. 만도는 오른쪽 팔만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왼쪽 팔은 조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있는 것이다. 삼대 독자가 죽다니 말이 되나, 살아서 돌아와야 일이 옳고말고, 그런데 병원에서 나온다 하니 어디를 좀 다치기는 다친 모양이지만, 설마 나같이 이렇게사 되지 않았겠지. 만도는 왼쪽 조끼 주머니에 꽂힌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 소맷자락 속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었다. 그저 소맷자락만이 어깨 밑으로 덜렁 처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상 그쪽은 조끼 주머니 속에 꽂혀 있는 것이다. 볼기짝이나 장딴지 같은 데를 총알이 약간 스쳐갔을 따름이겠지. 나처럼 팔뚝 하나가 못땅 달아날 지경이었다면 엄살스런 놈이 견뎌 냈을 턱이 없고 말고. 슬며시 걱정이 되기도 하는 듯 그는 속으로 이런 소리를 주워섬겼다.

내리막길은 빨랐다. 벌써 고갯마루가 저만큼 높이 쳐다보였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이제 들판이다. 내리막길을 쏘아 내려온 기운 그대로, 만도는 들길을 잰걸음쳐 나가다가 개천 둑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외나무 다리가 놓여있는 조그마한 시냇물이었다. 한여름 장마철에 들어설라치면 배꼽이 묻히는 수도 있었지마는, 요즈음엔 무릎이 잠길 듯 말 듯한 물이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부터 물은 밑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아져 갔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절로 이가 시려 온다.

만도는 물기슭에 내려가서 쭈그리고 앉아 한 손으로 고의춤을 풀어 헤쳤다. 오줌을 찌익 깔기는 것이다. 거울면처럼 맑은 물 위에 오줌이 가서 부글부글 끓어 오르며 뿌우연 거품을 이루니 여기저기서 물고기떼가 모여든다. 제법 엄지손가락만씩 한 피리도 여러 마리다. 한 바가지 잡아서 회쳐 놓고 한잔 쭈욱 들이켰으면... 군침이 목구 멍에서 꿀꺽 했다. 고기떼를 향해서 마른코를 팽팽 풀어 던지고, 그는 외나무 다리를 조심히 디뎠다. 길이가 얼마 되지 않는 다리였으나, 아래로 물을 내려다보면 제법 아찔했다. 그는 이 외나무 다리를 픽 조심했다.

언젠가 한번 읍에서 술이 꽤 되어 가지고 홍청거리며 돌아오다가 물에 굴러떨어진 일이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보았더라면 큰 웃음거리가 될 뻔했었다. 발목 하나를 약간 접쳤을 뿐,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이른 가을철이었기 때문에 옷을 벗어 둑에 널어 놓고 말릴 수는 있었으나, 여간 창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옷이 말짱 젖었다거나 옷이 마를 때까지 발가벗고 기다려야 한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팔뚝 하나가 몽땅 잘려 나간 홈측한 몸뚱어리를 하늘 앞에 드러내 놓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나치는 사람이 있을라치면 하는 수 없이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얼굴만 내놓고 앉아 있었다. 물이 선뜩해서 아래턱이 덜덜거렸으나, 오그라붙는 사타구니께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쥐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늘로 쳐들린 콧구멍이 연방 벌름거렸다. 개천을 건너서 논두렁길을 한참 부지런히 걸어가노라면 읍으로 들어가는 한길이 나선다. 도로변에 먼지를 부옇게 덮어쓰고 도사리고 앉아 있는 초가집은 주막이다. 만도가 읍내에 나올 때마다 꼭 한 번씩 들르곤 하는 단골집인 것이다. 이집 눈썹이 짙은 여편네와는 예사로 농을 주고받는 사이다.

술방 문턱을 들어서며 만도가,

"서방님 들어가신다."

하면, 여편네는,

"아이 문둥아, 어서 오느라."

하는 것이 인사처럼 되어 있었다. 만도는 여간 언짢은 일이 있어도 이 여편네의 궁둥이 곁에 가서 앉으면 속이 절로 쑥 내려가는 것이었다. 주막 앞을 지나치면서 만도는 술방 문을 열어 볼까 했으나, 방문 앞에 신이 여러 켤레 널려 있고, 방 안에서 웃음 소리가 요란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했다.

신작로에 나서면 금세 읍이었다. 만도는 읍 들머리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정거장 쪽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거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진수가 돌아오는데 고둥어나 한 손 사가지고 가야 될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장날은 아니었으나, 고깃전에는 없는 고기가 없었다. 이것을 살까 하면 저것이 좋아 보이고, 그것을 사려 가면 또 그 옆의 것이 먹음직해 보였다. 한참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결국은 고등어 한 손이었다. 그것을 달랑달랑 들고 정거장을 향해 가는데, 겨드랑 밑이 간질간질해 왔다. 그러나 한 쪽 밖에 없는 손에 고등어를 들었으니 참 딱했다. 어깻죽지를 연방 아래위로 움직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거장 대합실에 들어선 만도는 먼저 벽에 걸린 시계부터 바라보았다. 2시 20분이었다. 벌써 2시 20분이라니, 내가 잘못 보나... 아무리 두 눈을 씻고 보아도 시계는 틀림 없는 2시 20분이었다. 한쪽 걸상에 가서 궁둥이를 붙이면서도 곧장 미심쩍어했다. 2시 20분이라니, 그럼 벌써 점심때가 지났단 말인가. 말도 아닌 것이다. 자세히 보니 시계는 유리가 깨어졌고, 먼지가 꺼떻게 앉아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엉터리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여보이소, 지금 몇 싱교?"

맞은편에 앉은 양복쟁이한테 물어 보았다.

"10시 40분이오."

"예, 그렁교"

만도는 고개를 굽실하고는 두 눈을 연방 껌벅거렸다. 10시 40분이라, 보자 그럼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구나. 그는 안심이 되는 듯 후유 숨을 내쉬었다. 궐련을 한 개 빼물고 불을 당겼다. 정거장 대합실에 와서 이렇게 도사리고 앉아 있노라면, 만도는 곧잘 생각하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 등골을 찬 기운이 쫙 스쳐 내려가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시퍼렇게 굳어진, 이끼낀 나무토막 같은 팔뚝이 지금도 저만큼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바로 이 정거장 마당에 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만도도 섞여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모두 자기네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저 차를 타라면 탈 사람들이었다. 징용에 끌려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3,4년 옛날의 이야기인 것이다. 북해도 탄광으로 갈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틀림없이 남양군도로 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는 만주로 가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만도는 북해도가 아니면 남양군도일 것이고, 거기도 아니면 만주겠지, 설마 저희들이 하늘 밖으로사 끌고 가겠느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들창코로 담배 연기를 푹푹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좀 덜 좋은 것은 마누라가 저쪽 변소 모퉁이 벚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서 한눈도 안 팔고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머니 속에 성냥을 두고도 옆사람에게 불을 빌리자고 하며 슬며시 돌아서 버리곤 했다.

플랫폼으로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마누라는 울 밖에 서서 수건으로 코를 눌러 대고 있는 것이었다. 만도는 코허리가 찡했다. 기차가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덜커덩!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 덜 좋았다. 눈앞이 뿌우옇게 호려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정거장이 까맣게 멀어져 가고, 차창 밖으로 새로운 풍경이 획획 날아들자, 그제야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를 본 것도 처음이었고, 그처럼 큰 배에 몸을 실어 본 것은 더구나 처음이었다. 배 밑창에 엎드려서 꽥꽥 게워 내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만도는 그저 골이 좀 띵했을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러는 하루에 두 개씩 주는 뭉칫밥을 남기기도 했으나, 그는 한꺼번에 하루 것을 뚝딱해도 시원찮았다.

모두들 내릴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사홀째 되는 날 황혼 때였다. 제각기 봇짐을 챙기기에 바빴다. 만도도 호박덩이만한 보따리를 옆구리에 덜렁 찼다. 갑판 위에 올라가 보니 하늘은 활활 타오르고 있고, 바닷물은 불에 독은 쇠처럼 벌겋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지금 막 태양이 물 위로 뚝 떨어져 가는 중이었다. 햇덩어리가 어쩌면 그렇게 크고 붉은지 정말 처음이었다. 그리고 바다 위에 주황빛으로 번쩍거리는 커다란 산이 둥둥 떠 있는 것이었다. 무시무시하도록 황홀한 광경에 모두들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만도는 어깻마루를 버쩍 들어 올리면서 히야, 고함을 질러 댔다. 그러나 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숨막히는 더위와 강제 노동과 그리고 잠자리만씩이나 한 모기떼... 그런 것뿐이었다.

섬에다가 비행장을 닦는 것이었다. 모기에게 물려 혹이 된 자리를 벅벅 긁으며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무릅쓰고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산을 허물어 내고, 흙을 나르고 하기란 고향에서 농사일에 뼈가 굳어진 몸에도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물도 입에 맞지 않았고, 음식도 이내 변하곤 해서 도저히 견디어 낼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병까지 돌았다. 일을 하다가도 벌떡 자빠지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만도는 아침저녁으로 약간씩 설사를 했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 물도 차츰 입에 맞아 갔고, 고된 일도 날이 감에 따라 몸에 배어드는 것이었다. 밤에 날개를 치며 몰려드는 모기떼만 아니면 그냥저냥 배겨 내겠는데, 정말 그놈의 모기들만은 질색이었다.

사람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그처럼 험난하던 산과 산 틈바구니에 비행장을 닦아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벅찬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합군의 비행기가 날아들면서부터 일은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산허리에 굴을 파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비행기를 집어넣을 굴이었다. 그리고 모든 시설을 다 굴 속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다이너마이트 튀는 소리가 산을 흔들어 댔다. 앵앵앵 하고 공습경보가 나면 일을 하던 손을 놓고 모두 굴 바닥에 납작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비행기가 돌아갈 때까지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이떤 때는 근 한 시간 가까이나 엎드려 있어야 하는 때도 있었는데, 차라리 그것이 얼마나 편한지 몰랐다. 그래서 더러는 공습이 있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때로는 공습경보의 사이렌을 듣지 못하고 그냥 일을 계속하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면 모두 큰 손해를 보았다고 야단들이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사이렌이 미처 불기 전에 비행기가 산등성이를 넘어 들이닥치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정말 질겁을 했다. 가장 많이 피해를 낸 것도 그런 경우였다. 만도가 한쪽 팔뚝을 잃어버린 것도 바로 그런 때의 일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굴 속에서 바위를 허물어 내고 있었다. 바위 틈서리에 구멍을 뚫어서 다이너마이트 장치를 하는 것이었다. 장치가 다 되면 모두 바깥으로 나가고, 한 사람만 남아서 불을 당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터지기 전에 얼른 밖으로 뛰어나와야 한다.

만도가 불을 당기는 차례였다. 모두 바깥으로 나가 버린 다음 그는 성냥을 꺼냈다. 그런데 웬 영문인지 기분이 꺼림칙했다. 모기에 물린 자리가 자꾸 쑥쑥 쑤시는 것이 아닌가 긁적긁적 긁어 댔으나 도무지 시원한 맛이 없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성냥을 득! 그었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불은 이내 픽 하고 꺼져 버렸다. 성냥 알맹이 네 개째에서 겨우 심지에 불이 당겨졌다. 심지에 불이 붙는 것을 보자, 그는 얼른 몸을 굴 밖으로 날렸다. 바깥으로 막 나서려는 때였다.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나운 바람이 귓전을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만도는 정신이 아찔했다. 공습이었던 것이다. 산등성이를 넘어 달려든 비행기가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 한 대가 뒤따라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만도는 그만 넋을 잃고 굴 안으로 도로 달려 들어갔다. 달려 들어가서 굴 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쾅! 굴 안이 미어지는 듯하면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졌다. 만도의 두 눈에서 불이 번쩍 했다.

만도가 어렴풋이 눈을 떠보니, 바로 거기 눈앞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뚝이 하나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손가락이 시퍼렇게 굳어져서 마치 이끼 낀 나무토막처럼 보이는 팔뚝이었다. 만도는 그것이 자기의 어깨에 붙어 있던 것인 줄을 알자, 그만 으악! 정신을 잃어버렸다. 재차 눈을 떴을 때는 그는 푹신한 담요 속에 누워 있었고, 한쪽 어깻죽지가 못 견디게 쿡쿡 쑤셔 댔다. 절단 수술이 이미 끝난 뒤였다.

 

꽤애액 기적 소리였다.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오는가 보다. 만도는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서며 옆에 놓아 둔 고등어를 집어 들었다. 기적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대합실 밖으로 뛰어나가 플랫폼이 잘 보이는 울타리 쪽으로 가서 발돋움을 했다.

땡땡땡 종이 울리자, 잠시 후 차는 소리를 지르면서 들이닥쳤다. 기관차의 옆구리에서는 김이 픽픽 풍겨 나왔다. 만도의 얼굴은 바짝 긴장되었다. 시커먼 열차 속에서 꾸역꾸역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꽤 많은 손님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만도의 두 눈은 곧장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나 아들의 모습은 쉽사리 눈에 띄지가 않았다. 저쪽 출입구로 밀려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면서 걸어나가는 상이 군인이 있었으나, 만도는 그 사람에게 주의가 가지는 않았다.

기차에서 내릴 사람은 모두 내렸는가 보다. 이제 미처 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플랫폼을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놈이 거짓으로 편지를 띄웠을 리 없을 건데... 만도는 자꾸 가슴이 떨렸다. 이상한 일인데… 하고 있을 때였다. 분명히 뒤에서,

"아부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만도는 깜짝 놀라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만도의 두 눈은 무섭도록 크게 떠지고, 입은 딱 벌어졌다. 틀림없는 아들이었으나, 옛날과 같은 진수가 아니었다.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끼고 서 있는데, 스쳐가는 바람결에 한쪽 바짓가랑이가 펄럭거리는 것이 아닌가.

만도는 눈앞이 노오래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한참 동안 그저 멍멍하기만 하다가, 코허리가 찡해지면서 두 눈에 뜨거운 것이 핑 도는 것이었다.

"에라이 이놈아!"

만도의 입에서 모질게 튀어 나온 첫마디였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고등어를 든 손이 불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기 무슨 꼴이고, 이기."

"아부지!"

"이놈아, 이놈아."

만도의 들창코가 크게 벌름거리다가 훌쩍 물코를 들이마셨다.

진수의 두 눈에서는 어느결에 눈물이 꾀죄죄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나. 반도는 모든 게 진수의 잘못이기나 한 듯 험한 얼굴로,

"가자, 어서!"

무뚝뚝한 한마디를 던지고는 성큼성큼 앞장을 서 가는 것이었다.

진수는 입술에 내려와 묻는 짭짤한 것을 혀끝으로 날름 핥아 버리면서 절름절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앞장서 가는 만도는 뒤따라오는 진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눈을 파는 법도 없었다. 무겁디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땅바닥만을 내려다보며 이따금 끙끙거리면서 부지런히 걸어만 가는 것이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걷는 진수가 성한 사람의, 게다가 부지런히 걷는 걸음을 당해 낼 수는 도저히 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씩 뒤지기 시작한 것이 그만 작은 소리로 불러서는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진수는 목구멍에서 왈칵 넘어오려는 뜨거운 기운을 참느라고 어금니를 야물게 깨물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두 개의 지팡이와 한 개의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대는 것이었다.

앞서간 만도는 주막집 앞에 이르자, 비로소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진수는 오다가 나무 밑의 그늘에서 오줌을 누고 있었다. 지팡이는 바닥에 던져 놓고, 한쪽 손으로는 볼일을 보고, 한쪽 손으로는 나무둥치를 안고 있는 꼬락서니가 올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만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으음 신음 소리 비슷한 무거운 소리를 토했다. 그리고 술방 앞으로 가서 방문을 왈칵 잡아당겼다.

기역자판 안에 도사리고 앉아서 속옷을 뒤집어 이를 잡고 있던 여편네가 킥 웃으며 후닥닥 옷섶을 여몄다. 그러나 만도는 웃지를 않았다. 방 문턱을 넘어서면서도 서방님 들어가신다는 소리도 내뱉지 않았다. 이처럼 뚝뚝한 얼굴을 하고 이 술방에 들어서기란 아마 처음 일일 것이다. 여편네가 멋도 모르고,

"오늘은 서방님 아닌가배."

하고 킬룩 웃었으나, 만도는 으음 또 무거운 신음 소리를 했을 뿐이었다.

기역자판 앞에 가서 쭈그리고 앉기가 바쁘게,

"빨리빨리,"

재촉이었다.

"핫다나, 어지간히도 바쁜가배."

"빨리 곱배기로 한 사발 달라니까구마."

"오늘은 와 이카노?"

여편네가 건네 주는 술사발을 받아 들며 만도는 후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얼른 사발로 가져갔다. 꿀꿀꿀 잘도 넘어간다. 그큰 사발을 단숨에 비워 버리고는 도로 여편네 앞으로 불쑥 내민다.

그렇게 거들빼기로 석 잔을 해치우고서야 으으윽 게트림을 했다. 여편네가 눈이 휘둥그래 가지고 혀를 내둘렀다. 빈속에 술을 그처럼 때려 마시고 보니 금세 눈두덩이 확화 달아 오르고, 귀뿌리가 발갛게 익어 갔다.

술기가 얼근하게 돌자, 이제 좀 속이 풀리는 것 같아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진수는 이마에 땀을 척척 흘리면서 저만큼 오고 있었다.

"진수야!"

버럭 소리를 질렸다.

"이리 들어와 보래."

진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다가와서 방문턱에 걸터앉으니까 여편네가 보고,

"방으로 좀 들어오이소."

한다.

"여기 좋심더."

그는 수세미 같은 손수건으로 이마와 코 언저리를 아무렇게나 훔친다.

"마, 아무 데서나 묵어라, 저 국수 한 그릇 말아 주소."

"곱배기로 잘 좀 참지름도 치소, 잉?"

"야아."

여편네는 코로 히죽 웃으면서 만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고는, 소 우리에서 삶은 국수 두 뭉텅이를 집어 든다.

진구가 국수를 훌홀 끌어 넣고 있을 때, 여편네는 만도의 귓전으로 얼굴을 살짝 갖다 댄다.

"아들인가?"

만도는 고개를 약간 끄덕거렸을 뿐 좋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진수가 국물을 훌쩍 들이마시고 나자 만도는.

"한 그릇 더 묵을래?"

한다.

"아니예."

"한 그릇 더 묵지 와?"

"고만 묵을랍니다."

진수는 입술을 썩 닦으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막을 나선 그들 부자는 논두렁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전처럼 만도가 앞장을 서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진수를 앞세웠다. 지팡이를 짚고 기우뚱기우뚱 앞서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뚝이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가 느릿느릿 따라가는 것이다. 손에 매달린 고등어가 곧장 달랑달랑 춤을 춘다. 너무 급하게 들이부어서 그런지 만도의 뱃속에서는 우글우글 술이 꿇고, 다리가 휘청거린다. 콧구멍으로 더운 숨을 훅훅 내뿜어 본다. 정신이 아른하다. 좋다.

"진수야."

"예.”

"니 우짜다가 그래 됐노?"

"전쟁하다가 이래 안 됐심니꾜. 수류탄 쪼가리에 맞았심더."

"수류탄 쪼가리에?"

"예."

"음......"

"얼른 낫지 않고 막 썩어들어 가기 땜에 군의관이 짤라 버립띠더. 병원에서예,"

"......"

"아부지."

"이래 가지고 나 우째 살까 싶습니더."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

"나 봐라, 팔뚝이 하나 없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와 못 살아."

"차라리 아부지같이 팔이 하나 없는 편이 낫겠어예. 다리가 없어 노니 첫째 걸어댕기기가 불편해서 똑 죽겠심더."

"야야, 안 그렇다. 걸어댕기기만 하면 뭐 하노, 손을 제대로 놀려야 일이 뜻대로 되지"

"그럴까예?"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 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되겠나, 그제?"

"예"

진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만도는 돌아보는 아들의 얼굴을 향해서 지그시 웃어 주었다.

술을 마시고 나면 이내 오줌이 마려워진다. 만도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쭈그리고 앉아서 고기 묶음을 입에 물려고 한다. 그것을 본 진수는,

"아부지, 그 고등어 이리 주이소."

한다.

팔이 하나밖에 없는 몸으로 물건을 손에 든 채 소변을 볼 순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진수는 저만큼 떨어져 서서 지팡이를 한쪽 손에 모아 쥐고, 다른 손으로 고등어를 들고 있었다. 볼일을 다본 만도는 얼른 가서 아들의 손에서 고등어를 다시 받아 든다.

개천 둑에 이르렀다. 외나무 다리가 놓여 있는 그 시냇물이다. 진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물은 그렇게 깊은 것 같지 않지만, 밑바닥이 모래흙이어서 지팡이를 짚고 건너가기가 만만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외나무 다리는 도저히 건너갈 재주가 없고... 진수는 하는 수 없이 둑에 퍼지르고 앉아서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만도는 잠시 멀뚱히 서서 아들의 하는 양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진수야, 그만두고, 자아, 업자."

하는 것이었다.

"업고 건느면 일이 다 되는 거 아니가. 자아, 이거 받아라."

고등어 묶음을 진수 앞으로 내민다.

진수는 퍽 난처해하면서 못 이기는 듯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만도는 등어리를 아들 앞에 갖다 대고 하나밖에 없는 팔을 뒤로 버쩍 내밀며,

"자아, 어서!"

했다.

진수는 지팡이와 고등어를 각각 한손에 쥐고, 아버지의 등어리로 가서 슬그머니 업혔다. 만도는 팔뚝을 뒤로 돌리면서 아들의 하나뿐인 다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팔로 내 목을 감아야 될 끼다."

했다.

진수는 무척 황송한 듯 한쪽 눈을 찍 감으면서 고등어와 지팡이를 든 두 팔로 아버지의 목줄기를 부둥켜안았다.

만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끙 하고 일어났다. 아랫도리가 약간 우들거렸으나 걸어갈 만은 했다. 외나무 다리 위로 조심조심 발을 내디디며 만도는 속으로, 이제 새파랗게 젊은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을 잘못 만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이런 소리를 주워 섬겼고, 아버지의 등에 업힌 진수는 곧장 미안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럽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 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도는 아직 술기가 약간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며 아들을 업고 외나무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국일보>, 1957. 1. 1)

/ 수난 이대, 하근찬(河瑾燦)

 

☆ 하근찬(河瑾燦) 소설가

▲ 1931년 경북 영천읍 출생

▲ 1945년 전주사범학교 입학

▲ 1954년 부산 동아대학교 입학

▲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수난 이대」당선

▲ 1983년 「산에 들에」로 조연현문학상 수상

▲ 1984년「수난 이대」로 요산문학상 수상

▲ 1989년 류주현문학상 수상

 

● 수난의 슬픔과 낯선 근대 / 황국명(인제대 교수)

 

1 낯선 근대

1960년대에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도 하근찬은 동시대의 다른 작가와 구분되는 작품세계를 보여 왔다. 1950, 60년대의 작품에서 하근찬은 도시와 동떨어진 궁벽한 산골이나 농촌을 주무대로 하고, 1970년대의 소설에서는 자전적인 형태로 과거를 회고하거나 도시의 인정세태, 소시민적 일상을 취급한다. 1970년대 후반 이후 1980년대에 들면서 주로 동양적 향토적인 것을 향한 회고적 그리움을 내보인다. 이는 지난 1930, 40년의 소설사로 볼 때, 문단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내용도, 각 시대의 주류를 이룰 문학이념도 아니다. 그러면 전 작가생활을 통해 하근찬이 일관되게 추구하고 형상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 삶의 형언할 수 없는 슬픔 혹은 한(恨)이다. 한 수필에서 하근찬은 민족적 슬픔 혹은 한이 사기 문학의 저류라 하고, 그것의 역사적 연원을 밝히는 것이 그의 소설적 목표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이 갖는 문단적 비주류성으로 그의 작품을 덜 가치롭다고 판단할 수 없음이 자명해진다. 하근찬의 문학적 목표는 그가 시류에 편승하는 경박한 작가가 아님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을 민족의 수난에 관한 기록으로 읽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러면 그 슬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그것은 동질적 자연적인 세계가 이질적이고 인공적인 것에 의해 훼손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다. 이 낯선 존재를 그가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왕았지만, 범박하게 말해 근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에게 이질적인 것과의 만남은 근대의 이름을 빌린 야만의 체험이었다. 물론 이런 체험이 하근찬만의 것일 수 없다. 우리가 그의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는낯선 근대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방식에 있다.

 

2 육체의 불완전성

하근찬의 전 작가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야만적 근대는 일제의 강점과 6. 25전쟁, 전통적 동질적 세계를 파괴하는 외래문물, 진보의 명분을 앞세운 산업화 등이다. 그에게 야만의 첫 체험은 고향에서 쫓겨남 혹은 가족과의 분리라는 고통을 이룬다. 1950년대의 초기작에서 이런 추방과 분리 체험은 신체적 분리 곧 육체의 절단이나 기형으로 나타난다. 「수난 이대」에서 아비는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나가 폭발 사고로 팔을 잃고, 아들은 6·25로 인해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흰종이 수염」에서 동길의 아버지는 6.25 때 노무자로 나갔다가 팔 하나를 잃고 귀향한다. 「나룻배 이야기」에서 마을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가 죽거나 괴물처럼 온몸이 부서져 돌아온다.

 

그것은 두칠이가 아니었다. 도깨비였다. 눈이 하나밖에 없었다. 코가 대추같이 녹아 붙었고, 귀도 한 개는 고사리처럼 말려들었다. 온 얼굴이 서투른 다리미질을 해놓은 것 같았다. 뻔들뻔들 윤이 나는 별건 살점이 목덜미까지 흘러내렸다. 후줄근한 군복을 걸치고 있었고, 이 좋은 봄날에 무슨 놈의 장갑을 한 짝 끼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개라도 때려눕힐 그런 몽둥이를 지팡이삼고 있는 것이었다. 「나룻배 이야기」

 

'돌아온 탕자'의 뒤집힌 꼴인 그들의 귀향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괴로운 시작이다. 육체적 불완전은 그들을 마을에서 낯선 존재로 만든다. 도깨비처럼 그들은 괴물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육체의 괴물스런 불완전에서 하근찬은 전쟁이라는 '잔인하고 거대한 괴물'을 보고 또한 민족의 암담한 운명을 읽는다.

괴물스러움은 이질성의 체험이다. 그런데 전쟁의 괴물스러움을 다루면서 하근찬은 이질적인 전쟁 자체를 취급하기보다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를 먼저 주목한다. 그래서 작중인물들의 수난의 경험을 다루면서 하근찬은 대부분 인물시점을 유지한다. 수난을 수난당한 사람의 시점으로 기술할 때, 그리고 그들이 이질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 회생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즉 그 불구는 자기 밖의 낯선 운명, 팔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팔자소관이 아니라면 그들의 불구적 존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육체의 불완전도 일종의 결여 형태일 것이다. 이런 결여와 결핍의 상황에서 인간은 대체로 그 충족 대상을 향한 욕망을 급진적으로 추진시킨다. 그러나 하근찬의 소설에서 그런 욕망을 찾을 수 없다. 육체의 불완전이라는 낯선 것이 자기 운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또 신체적 불구가 민족사적 공동체험의 물리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들의 불구는 궁극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껴안을 수밖에 없는 보호와 연민의 대상이 된다. 그들을 위험하거나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것은 단지 근대의 지배적 가치체계에 근거할 때뿐이다. 낯선 근대의 가치체계로부터 이들의 불구를 분리시킬 때, 기이하고 기형적인 육신이 오히려 인물을 보다 무후한 존재로 만든다. 친구의 유골을 보고 하나 남은 눈에 눈물을 담는 두칠이, 아들의 난폭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아비, 다리를 잃은 아들을 외팔 아비가 등에 업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장면 등은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흉한 몰골의 육신이 아름다운 영혼의 옷을 입는 것이다.

 

만도는 아직 술기가 약간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며 아들을 업고 외나무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수난 이대」

 

「수난 이대」의 결미에서 우리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고 순박한 희생자를 만난다. 말하자면 그들은 타인과의 관계에 파탄을 초래할 정도의 원한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우직함은 합리적인 타산, 당대적 편견, 근대적 가치체계를 이겨 내는 힘이 된다. 바로 이런 특성들이 하근찬 소설의 지배적 정서인 한을 순화시키고, 웃음 속에 삶의 비애를 담는 해학을 형성하는 것이다.

 

3 낯선 것의 대결적 병치

1960, 70년대 소설에서 하근찬은 친숙한 동질적 삶에 화해할 수 없는 낯선 외부를 대립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전쟁이라는 괴물이나 이질적인 것의 정체를 구체화하고자 한다. 즉 수난의 역사적 근거가 보다 구체적인 형상으로 인식된 것이다. 하근찬에게 낯선 침입자는 흔히 파괴의 폭력을 동반한다.

 

(중략)

 

6 근대의 초월인가 미달인가?

하근찬은 이질적인 근대의 불모성을 강조하되 사막화된 분열적 내면, 과장된 지적 절망 혹은 과잉된 자의식이나 형해화된 관념세계 등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또 유행에 혼들리지 않고 야만적인 근대에 의한 민족적 슬픔을 지속적으로 해명해 온 점도 우리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미덕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덕이 견고한 작가의식을 증거할 수 있지만, 변화하는 상황에 둔감하다는 결함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하근찬 소설에 관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해 볼 수 있다.

「수난 이대」의 부자(父子)나 장편 「야호」의 갑례처럼, 하근찬 소설의 인물들은 유사한 수난을 연속적으로 경험한다. 그런데 경험의 유사성이나 연속성이 강조될 때, 인물이 살아가는 상이한 시기의 시대적 정황이 무시되기 쉽다. 즉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에 충실하지도, 앞 시대와 구분되는 다른 문제를 지니지도 못한다. 이런 변별성이 간과되기 때문에, 작중인물은 지역적으로 고립된 동질적인 세계에 놓이고, 작가는 그들의 순박하고 우직한 삶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근대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비합리적 거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지나치게 단절적인 세계는 인간 혐오나 역사를 정지시키려는 비관적 욕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런 문제는 하근찬이 인물의 생활세계를 사회경제적인 혹은 정치경제적인 입장이 아니라 도덕적이거나 인정적인 차원에서 보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래서 수난을 당하면서도 작중인물들은 격렬하게 분노하거나 항거하지 않고 해학적인 태평함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유래나 원인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민족을 정태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음을 뜻한다. 인물이 내면적 자기 혁신을 꽤할 개별성을 갖지 못하는 한 낯선 근대에 맞섬은 근대의 초월이 아니라 미달로 귀결되기 쉽다. 따라서 동질적 세계나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도 근대의 괴물스런 위용에 대한 혐오일 수는 있으나 방향성을 지닌 대안일 수는 없다. 또 정태적인 관점에서 민족의 슬픔이나 한이란 소설의 논리와 분별력에 파탄을 초래한다. 그의 1970, 80년대 소설에 보여진 판단 유보나 인간이라는 추상적 존재의 운명 탐구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사실 이상과 같은 문제는 그가 단편소설이 미적으로 완미하다는 점과 연계되어 있다. 그의 단편은 독자에게 당위를 강요하지 않는 단문의 정직함, 정교한 기획 아래 구성되고 군더더기가 없는 형식상의 깔끔함을 강점으로 한다. 그런데 형식적 완결성이 높을수록 내용의 과격성을 담기고 현실과 동떨어지게 된다. 더구나 1970년대 이후 자전적 체험에의 높은 의존도는 사소설로 흐르거나, 회고의 경우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 사건의 중요성을 결정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은폐하거나 왜곡시킬 우려도 있다. 형식의 완결성에 작가 자신의 반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소설형식은 작가의 윤리가 작품의 미학적 문제로 되는 유일한 장르라고도 하는 것이리라.

 

/ 한국소설문학대계 (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