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발자국 소리」 정도상 (2019.11.10)

푸레택 2019. 11. 10. 22:18

 

 

 

● 발자국 소리 /정도상

 

버스 종점의 주변에 들어선 골목시장으로 시나브로 어둠이 실려오고 있었다.

 

오후 다섯시의 애국가가 인월(引月)댁의 앞에 놓인 고무널벅지 가득 울려 퍼지고 난 후부터, 버스에 실려오는 어둠의 양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었다. 인월댁은 주섬주섬 고무널벅지를 챙겼다. 아직도 한 주발이나 까놓은 조갯살이 남아있긴 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일찍 들어가 눕고 싶었다. 그녀는 남아있는 조갯살을 주발에 놓인 그대로 비닐봉지에 넣고 쏟아지지 않게 갈무리를 했다. 조개껍데기 사이로 보이는 시커먼 물을 하수구 쪽으로 쏟았다. 빈 조개껍데기가 한쪽으로 몰리며 부스럭거렸다.

"휴우......"

조개껍데기처럼 텅 빈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한숨이 밀려 올라왔다. 인월댁은 한숨 끝에 자식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밖에서만 빙빙 돌며 있는 대로 속을 썩이고 있었다.

 

-빠앙 빵빵빵빵.

사람을 가득 싣고 종점으로 들어오던 버스가 길을 넓혀 달라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인월댁은 고무널벅지를 챙기다 말고 지금 막 들어오는 버스를 쳐다봤다. 자식들 중에서 누구든지 하나쯤은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버스는 사람들을 다 비우고 차고로 들어갔지만 인월댁이 기다리는 자식은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골목시장을 빠져나가자 인월댁은 고무널벅지를 챙겨 머리에 이고서 천근같은 발걸음을 떼었다. 하루 종일 먼지를 켜켜이 맞으며 쪼그려 앉아 있었던 까닭인지 무릎께가 빼근했다. 기름기와 먼지가 섞여 찐득찐득한 얼굴이 더욱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동짓날의 저녁 바람이 어깨로부터 허리, 무릎으로 불어와 온 삭신을 시리게 했다.

 

(중략)

 

인월댁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방 안에 형사가 있다고 알려줘야 하는데, 신호를 보냈다가는 눈치를 챌 것이 뻔하고, 인월댁의 가슴이 빠르게 두방망이질을 쳤다. 피가 모두 얼굴로 몰리는 듯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사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조금 덜 뚱뚱한 형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처벅 처벅 처벅.

발자국 소리는 벌써 가까이 와 있었다. 인월댁은 제발 은수가 아니길 빌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부엌문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인월댁의 심장도 멎는 듯했다. 형사들이 말없이 일어섰다.

 

"엄니"

은수의 목소리였다. 얼마나 듣고 싶은 목소리였던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아들여도 시원치 않을 자식이 왔는데도 인월댁은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인월댁은 대답 대신 형사들의 동정을 살폈다. 일어서서 바깥의 동정을 살피는 형사의 허리춤에서 수갑이 보였다.

"엄니이, 나요 은수우."

순간 두 형사가 방문을 벌컥 열어제쳤다. 동시에 인월댁은 두 형사의 다리를 끌어안고 악을 썼다.

"은수우야, 싸게 달아나 은수야. 너 잡을라고......"

타다다다닥.

골목길을 빠르게 달려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귀에 들렸다. 큰아들과 인월댁이 두 형사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아니, 이 늙은이가. 야, 둘 다 조져."

뚱뚱한 형사가 큰아들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은석의 코에서 피가 터져 흘렀다.

"으은석아, 야 이 백정놈들아...... 헉."

다른 한 형사가 팔꿈치로 인월댁의 야원 등을 깊숙이 내려찍었다. 다리를 부둥켜안고 있던 두 사람의 팔이 힘없이 풀리며 방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요 밑에 깔린 밥그릇이 덜커덕 넘어졌다.

(『친구는 멀리 갔어도』, 풀빛, 1988)

 

☆ 정도상 소설가

1960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남

1966년 마천국민학교 입학

1969년 전라북도 남원 인월국민학교로 전학

1971년 서울 남성국민학교로 전학

1976년 상도중학교 졸업

1979년 장훈중학교 졸업

1981년 전북대학교 어문계열 입학

1989년 전북대학교 독문과 졸업

 

수상내역

2008 제7회 아름다운 작가상

2008 제25회 요산문학상

2005 문화부장관 표창

2005 제3회 거창평화인권상

2003 제17회 단재문학상

 

☆ 정치적 문학의 깊이 / 백진기(문학평론가)

 

「친구는 멀리 갔어도」의 주인공 이름 역시 「십오방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김원태이다. 이름이 같아서가 아니라 이 두 작품을 하나의 연작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 실제로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가 구속이 되고 나서 강제 징집을 당한 인물이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인간의 실존적 자유의지를 극도로 제한하는 곳인 군대(「친구는 멀리 갔어도」)와 감옥(「십오방 이야기」)을 소설적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두 작품 사이엔 시간적으로 전후 관계가 치밀하게 연결돼 있는 셈이다.

 

주인공 김원태는 전방 철책에서 야간 근무를 서다가 오발 사고를 일으켜 같은 부대원을 죽이고 만다. 그는 곧 정치적 목적에 따라 보안사로 끌려가고 살인적인 고문에 시달리며 녹화사업을 받는다. 작품 속에서의 그는 '구타 회유 물고문 등의 극단적 상황 하에서의 심리적 갈등- 전기고문-항복-프락치-휴가-모교의 지하운동권의 조직표를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옛 동지들과의 접촉-귀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전과정을 작가는 상황과 인물, 인물과 인물의 갈등과 대립을 신랄하게 형상화함으로써 한 사회의 모순적 대립 상황과 그것의 구조적 단면을 전형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리얼리즘 창작 방법의 핵심에 상당히 육박하고 있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어떠한 소설적 타협도 거부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이 의문의 폭발 사고로 죽는 대단원 장면에서 소설적 안이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전편에 걸쳐 소설적 긴장을 지탱하는 데 효과적으로 성공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문 장면의 실감 있는 형상화와 주인공 김원태의 내면 묘사의 핍진성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정도상 초기 소설의 두드러진 복장은 무엇보다도 정치 권력의 구조적 폭력이 한 인간의 삶을 얼마만큼 파괴할 수 있는가를 추호의 낭만적 인식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는 데에 있다. 이 소설은 이것의 상당한 소설적 성과이다. 위의 두 작품은 정도상의 초기 작품이지만,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다.

 

우리는 지나온 1980년대를 기억한다. 그 1980년대를 소설로 가로질렀던 눈부신 젊은 작가들 역시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80년대를 1980년대답게 기억해 주는 표정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1980년대에 등장했던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그 미완의 표정을 가슴에 담아 낼 수도 있다. 그들의 소설적 재능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게 짓이겨지면서 이제 새로운 모습을 예고하고 있는 중이다. 그 속에 정도상도 함께 있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

 

"나는 슬픔을 아는 사람을 지지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 사람은 문재인이다."

- 정도상(2017.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