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깊고 긴 골짜기」 이원규 (2019.11.13)

푸레택 2019. 11. 13. 18:24

 

 

 

● 깊고 긴 골짜기 / 이원규

 

며느리가 백일해 예방 접종을 시킨다고 아이를 업고 나간 뒤 집안은 고즈넉했다. 보자기만한 햇살이 아파트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거실의 잿빛 양탄자를 하얀 털로 짠 직물처럼 따뜻이 보이게 만들었다. 한명구 씨는 손에 든 조간신문을 밀어 놓고 허리를 폈다. 겨울이 눈앞에 보일 때쯤이면 심해지는 신경통, 그는 한 손을 뒤로 돌려 톡톡 허리를 두드리다가 왼쪽 허벅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쉰아홉 살 나이, 아홉 수를 넘기느라 그런지 금년엔 잔병치레가 많아 아들의 의료보험 카드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려야 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정년퇴직으로 갑자기 일손을 놓았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홀아비가 된 때문이니 새 장가를 들어야 한다고 말들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늙은 몸을 괴롭히는 신고가 모두 젊은 시절에 몸을 험하게 굴린 까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 월남해 와서 따뜻한 잠자리에서 제대로 자지 못했고, 군대생활을 하며 고생한 결과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총을 멘 채로 6.25동란을 시작부터 끝까지 겪은 터였고, 왼쪽 허벅다리에 관통상까지 입었던 몸이었다.

 

명구 씨는 고개를 들어 일곱 층 아래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땅 위를 가득 메웠던 승용차를 몰고 나갔기 때문인지 아파트 앞 마당은 텅 빈 채로 휑뎅그렁하게 누워 있었다. 잔디밭 옆 화단에는 며칠 전 이삼 일을 기온이 급강하했던 까닭인지 화사하게 피었던 국화들이 죽은 동물의 시체들처럼 허리를 뒤로 꺾고 꺼멓게 죽어 자빠져 있었다. 그는 가슴을 메우는 고적감에 시선을 거두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탁자 위의 전화기가 집 안의 정적을 혼들며 울기 시작했다. 그는 앉은걸음으로 움직여 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십 년을 귀에 익어 온 목소리가 조금 들뜬 억양으로 수화기에서 울려나왔다. 진남포중학 동창인 윤형국 교감이었다.

 

"한 국장, 자네 산동리 출신 김홍식이 생각나나?"

그의 친구들은 우체국장으로 정년퇴직한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는 까마득하게 먼 기억을 더듬었다.

"나지. 소학교를 같이 다녔구. 거기 출신 중학 동창은 우리 둘뿐인데 생각 안 날 리가 있나."

"놀라지 말게. 그 친구가 지금 서울에 와 있네."

"무슨 소리야, 사십 년 동안 소식 없던 친구가 아닌가?"

"나두 깜짝 놀랐어. 동란 때 인민군으로 나와서 포로가 됐다가 중립국을 선택해서 브라질서 살았다는 거야."

"브라질? 허, 꿈같은 일이군. 그래, 그 친구와 연락이 닿았단 말인가?"

"응, 용강군민회에다 우리 중학 동창이 혹시 있는가 문의했나 봐. 그래서, 내가 호텔루다 전활 걸었지. 대뜸 자네 소식부터 묻길래 서울에 있다구 했더니 오늘 만나자구 하더군. 저녁 일곱시에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루 오라구 했어. 남대문시장 박윤갑이나 마포 윤두성인 중병 환자니까 알리나마나구, 서울에서 만날 사람은 우리 둘뿐이야."

"알았어. 난 당장 가서 만나구 싶다구, 어느 호텔인가?"

"남산에 있는 태평양호텔이야, 허지만 지금은 안 돼. 낮에 딴 데 볼 일이 있다구 했으니까는. 아무튼 이따가 삼십 분쯤 앞두구 만나서 같이 가세. 자네가 내 학교루 와."

명구 씨는 통화를 끝내고 한참 동안을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십 년 만에 어릴 적 친구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진남포 북쪽 용강군 대면의 산동소학교 동창인 김홍식은 명구 씨처럼 두어 섬지기 논농사를 부치는 중농의 아들로서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나란히 진남포중학에 유학한 친구였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중학의 두 학년 아래인 명구 씨의 아우와 함께 같은 집에 하숙한 사이이기도 했다. 이제, 얼굴은 소년 시절의 모습으로 윤곽만이 떠오를 뿐이지만 잊을 수 없는 고향의 한 부분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중략)

 

명구 씨는 그 앞으로 걸어갔다. 메워버린 굴의 입구는 쌓인 흙과 굴 천장 사이에 작은 틈이 벌어져 있고, 팔뚝만큼 굵은 난쟁이 소나무, 도토리나무, 진달래나무와 억새풀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나무들은 모두 마치 맷돌의 손잡이처럼 ㄴ자의 반대 형상으로 구부러져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굴속으로 뿌리를 뻗어 자양을 빨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시 눈물이 솟아나서 앞을 가렸다. 명구 씨는 한 걸음 더 내디뎌 앞으로 가서 자신의 가슴께로 옆가지를 뻗치고 있는 도토리나무의 가지를 어루만졌다. 눈물로 인해 굴절되어 보이는 그 가지 끝깍지 속에 열매가 박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뽑아내 손에 움켜쥐었다. 윤형국 씨가 소주병과 플라스틱 잔을 그의 발 앞에 놓았다. 명구 씨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고 무릎을 끓어 잔에 술을 부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 곁으로 다가온 두 친구와 함께 고개 숙이고 눈을 감았다.

 

메마른 바람이 우수수 나뭇가지를 스치며 불었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뜨는 순간, 갑자기 꺼겅 껑 장끼 한 마리가 지척에서 솟아올라 붉은 털에 햇살을 받으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안내해 준 촌로와 헤어진 뒤, 그들은 극락정사를 찾아 산을 올라갔다. 암자는 산 중턱 깊은 숲속에 숨듯이 앉아 있었는데, 열댓 평 정도 되는 작은 법당과 한 개의 돌탑을 가진 작은 규모였다. 세 사람은 법당으로 들어가 불상을 향해 절했다. 그리고, 누가 제의한 것도 아닌데 각자 지갑을 꺼내 여비 정도만 빼고 나머지 돈을 시주함에 넣었다.

 

윤형국 교감이 계속 지켜보고 있던 승려에게 이곳을 찾은 연유를 밝히고 덧붙여 말했다.

"스님, 두 차례 싸움에서 남북의 군대가 사백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불쌍한 혼들의 명복을 빌어 주십시오." 승려는 염주를 굴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왼 뒤 말했다.

"소승은 늘 그분들의 극락왕생을 빌고 있습니다."

명구 씨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기진해 있었으므로 그들은 승방으로 들어가 두어 시간을 머물다가 산올 내려왔다. 길가에 서서 한동안을 기다린 뒤, 지나가는 마이크로버스를 손짓하여 세웠다.

 

두 친구는 명구 씨를 버스 뒤의 긴 좌석에 눕혔다. 그러나, 명구 씨는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까부라지듯 처지는 어깨를 일으켜 뒤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젊은 날 불행한 인연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깊고 긴 골짜기는 늦가을의 이른 낙조로 인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낙조 속에 열아홉 살 젊은 아우가 눈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두 손바닥을 차창에 붙였다. 아우의 환영은 점점 뒤로 물러나더니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가 그 깊고 긴 불행의 골짜기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손바닥과 이마를 유리창에서 떼지 못했다.

(『깊고 긴 골짜기』, 고려원, 1991)

 

☆ 이원규 소설가

1974년 인천시 연희동에서 출생

1966년 인천고등학교 졸업

1968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입학

1969년 육군에 입대. 단기복무하사관 교육을 받고 특전사에 배속됨. 중부전선 비무장지대에 파견 근무

1970년 지명차출되어 파월 백마사단에서 장거리 정찰대원으로 종군

1971년 귀국하여 잔여복무 끝내고 제대

1975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2년 교사직 사직하고 집필에만 몰두

 

● 분단의 상황, 바다의 삶 / 임진영(문학평론가)

 

이원규 소설의 인물들을 지배하는 시간은 과거의 역사이며, 그것은 대부분 '분단'이 준 기억의 시간이다. 한편, 그들의 삶의 공간은 대부분의 경우, '바다'이다. 이원규의 소설은 '분단의 기억을 되살리기' 혹은 '바다의 삶을 살아내기'라는 두 개의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그래서 이러한 소설적 특징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우리의 분단소설에서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던 어민들을 다루었다는 공적”을 낳은 것으로 평가(홍정선)되어 왔고, 어떤 면에서는 소재주의적 경향, 혹은 그의 작품을 단조롭게 하는 요소로도 지적(권성우)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바다'와 '분단'이라는 두 단어의 교직이 엮어 내는 우리 시대 삶의 무늬에 대해 그 이상의 평가를 시도해 보려 한다.

 

우리 소설사에서 분단문학과 바다의 관계는 아주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최인훈의 「광장」이나 이문열의 「영웅시대」의 주인공은 바다 한가운데 혹은 바닷가에서 죽음을 맞이 한다. 그들은 제3국행, 혹은 남한행을 거부하고, 망망한 바다 너머의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좌절의 상황 속에서 죽어 간다. 그들이 바다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 채 죽는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분단시대의 질곡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바다'는 분단시대 삶의 자리의 경계, 그 너머에 존재하는 자유의 지평을 보여 주는 상징적 공간이 된다.

 

그에 비해서, 분단문학의 역사 속에서 분단시대의 참혹함 그 자체를 상징하는 역사적 공간이미지는 바다라기보다는 산맥, '골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사목(枯死木)과 진달래로 표상되는 지리산, 김원일의 「겨울골짜기」가 재현해 낸 양민학살의 공간이 바로 '골짜기'이다. 그곳은 이념과 이념의 치열한 대결장이었으며, 이름없는 수많은 이들의 원한과 절규가 서려 있는 곳이다.

 

이원규의 소설 중에서는 「깊고 긴 골짜기」가 이 전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곳은 그러나 현재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기억 속에 묻힌 과거의 역사적 공간이다. 그것은 '복원되지 않은' 묻혀진 세계였다가 이제야 새삼 끔찍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깊고 긴 골짜기」에서 그 기억과 역사를 복원시켜 주는 계기가 되는 인물은 주인공의 친구로서, 6. 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결국 중립국을 선택해 살다가 사십여 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인물이다.

 

월남해 살면서 두고 온 가족의 소식을 못내 궁금해 하던 주인공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이들 두 사람이 서로 적이 되어 전투를 벌였으며, 결국 그 피비린내나는 격전장에서 적군의 편이었던 동생이 죽었다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극적 설정은 형제가 남과 북으로 갈리어 싸워야 했던 동족상잔의 상황을 담고 있는 분단문학의 계열 속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깊고 긴 골짜기」의 주인공에게 있어서 역시, 분단의 상혼이 새겨진 '골짜기'는 지금 여기의 일상적 삶의 공간은 아니다. 소설은 어떤 돌연한 계기로 인해 과거의 장소 속으로 찾아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역사의 선연한 핏자국을 확인하게 되는 사건 그 이상을 넘어서서, 어떤 현재적 삶의 전망도 보여 주지 못하는데, 그것은 주인공이 직접 전쟁을 체험한 노인세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비하면 「신열」은 아들 세대가 아버지 세대의 기억-역사적 진실을 복원해 내는 이야기이다. 이념대림 속에서 약삭빠른 변신에 성공한 아버지가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건을 알고,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노인을 만나게 됨으로써, 아들은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역사니 분단이니 하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그는 진실을 아는 대가로아버지를 잃는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다시 이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외국으로 떠나고 싶어하던 그는, 데모를 하다 전경에게 끌려가는 어느 학생의 눈길이 자신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을 느끼면서, "내가 맞닥뜨렸던 절망의 벽이 나 자신 부딪쳐야 할 숙명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소설들에서 작가는 역사적 진실의 복원이라는 분단문학 고유의 전통적인 주제와 관습에 충실하며, 그만큼 그 이상의 진전을 이룩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다시 우리의 원래의 문제제기로 되돌아가 보면, 이원규는 '바다'와 '분단 문제'의 독특한 결합을 통해 분명 분단문학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준 작가이다. 「포구의 황혼」이 바로 그에 값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여기에 분단의 원인이 되었던 이념과 사상의 대립은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만큼의 낙관적 희망을 가능하게 한 데는 바로 1987년 이후의 상황이 작용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와 이원규의 「포구의 황혼」 사이의 거리는 일방적 반공논리의 퇴색과 통일론의 개방이라는 역사적 변화가 낳은 거리이다. 북한문학계에서는 그들의 통일문학의 경향이 이전의 '그리움의 문학'에서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만남의 문학'으로 변모되었다고 표현한다. 이원규의 소설은 이러한 흐름에 부옹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속에서 분단은 너무나 정서적인 것이고, 육친과 혈연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좌익의 누명을 쓰고 평생 감옥살이를 한 노인의 이야기를 담은 경우(「신열」)라 하더라도, 문제되는 것은 진실과 배반이라는 윤리의 차원이지 이념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이는 좌익 장기수 문제를 우리 소설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던 김하기의 소설과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지는 면모이다. 그의 소설 중에서 이념의 문제가 정면으로 조명된 경우는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황해」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보적 시각을 온건하게 표현해 낼 줄 아는 작가로 평가되어 온 반면, 한편에서는 그의 역사의식이나 분단 극복의식이 1980년대 진보적 사학계의 일반적 견해, 모범답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그의 소설 속에서 이념이 아직 적절한 형상의 옷을 입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념을 넘어서는 민족적 동질성의 회복이 분단극복의 전제이며 보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포구의 황혼」이라는 이 평범한 제목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감동은 비상한 수준의 것임에 분명하다. 현재와 회상의 거의 균등한 교직,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리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절정을 조금씩 예비해 가는, 정통적 구성방식에 충실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아주 작은, 개인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의 역사와 바다의 공간 속에 열려진 이야기이다.우리는 이만한 소설을 낳은 작가가 앞으로 내놓을 새로운 분단문학을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 기대는 이미 발표된 또 하나의 수작 「천사의 날개」에서 그가 보여 준 역사적 상황 속에 선 인간의 구원이라는 문제의식, 베트남 전쟁 체험의 소중함에 의해 더욱 든든하게 뒷받침 되고 있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