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친구는 멀리 갔어도」 정도상 (2019.11.10)

푸레택 2019. 11. 10. 22:37

 

 

 

● 친구는 멀리 갔어도 / 정도상

 

자대 배치를 받고 처음으로 보초를 나서는 길은 멀고 험했다. 길은 포대 행정반에서 나올 때부터 캄캄한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손톱 끝에서 위태위태하게 남아 있던 봉숭아처럼 보이던 그믐달이 오늘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원태는 앞서가는 고참들의 뒤만 보고 걸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원태를 괴롭힌 것은 철커덕컬커덕 엉덩이와 옆구리에 부딪치는 총의 반동이었다. 포대 행정반에서 보초 신고를 하며 실탄이 든 탄창을 삽탄했기 때문에 원태는 조심스럽게 어깨끈을 잡아당겨 총의 반동을 줄였다. 아주 캄캄한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고참들은 잘도 교대장의 뒤를 따라갔다. 원태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느라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 등허리가 뻐근했다.

 

드디어 대남방송이 제일 잘 들린다는 제5초소에 도착하여 보초를 교대했다. 수하(誰何)를 하고 원두막처럼 생긴 초소에 들어가며 원태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소매 끝으로 문질러 닦았다. 오병장이 보초근무의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했다. 원태는 점호시간에 암기했던 보초의 일반수칙과 특별수칙의 조항들을 순서대로 떠올리며 초소의 창턱에 설치된 새총 모양의 총받침대에 총을 얹었다. 초소의 창에서 바라보는 부대 밖의 풍경이 어슴푸레한 형태로만 보일 뿐이었다. 골짜기와 산등성이의 구별도 없었고 경사면에 서 있는 나무들의 검은 실루엣만이 남해안을 표시한 지도처럼 삐죽뼈죽 솟아 있었다. 원태는 이런 어둠이라면 보초 근무가 무척 어려울 것 같았다.

 

"야 임마, 너 오늘이 처음이지?"

오병장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원태는 질문의 의도를 몰랐지만 얼른 대답했다.

"예!"

오병장은 보름 남짓의 대기병 생활을 할 때 얼굴이 익은 고참이었다. 제대를 5개월 정도 남겨 두고 있는 것 같았는데 틈만 나면 군대를 저주했고 대대장을 증오했다. 5개월 남은 군생활이 5년이나 남은 것 같다며 늘 불평이었다. 군대 3년 썩어서 남긴 것은 포경수술한 것 하나뿐이라며 투덜거렸지만 제대만 하면 사회생활을 성실히 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오늘이 첫 보초라? 야 짜샤. 니 군대인생도 오늘부터 조지기 시작하는 거다. 씨발놈의 군대생활 보초 빼면 시체다 시체."

오병장은 야간 보초 근무 두 시간이 제일로 지겹고 미치고 환장할 시간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허수아비처럼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서 있기란 주간에 작업 열 시간 하는 것보다 더 지루하다는 거였다. 최전방에서 2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실탄을 장전하고 근무를 하긴 해도 군대생활 3년에 간첩 비슷한 건 씨알머리도 못 봤으니까 대충대충 시간만 때우면 된다고 오병장은 원태에게 보초 근무의 요령을 가르쳤다. 원태는 그런 오병장이 싫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그리 편치 못했다.

"야 심심하지. 너 사회에서 대학 다녔다며? 여대생 가시내들 몇 명이나 따먹었냐? ....."

 

(중략)

 

원태는 좁은 포대 행정반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산야로 나오니 휘파람새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일렬로 걸어가는 논배미의 두렁길 같은 옆에는 색색깔의 들국화와 개망초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원태는 여자애들처럼 들국화를 한 묶음 꺾어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걸어가니 어느새 논은 보이지 않고 무와 배추 그리고 빨갛게 익어 가는 고추밭이 보였다. 차가 올라가기에는 힘든 경사지에 화전으로 일군 밭들이었다.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길 양편으로는 철조망이 썩어가는 나무말뚝에 붙어서 녹슬어 가고 있었다. 철조망의 군데군데에는 해골 표시가 그려져 있는 빨간 글씨의 '통제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매달려 있었다. 언제 그쳤는지 서 상병의 휘파람 소리도 그쳐 있었다. 산의 7부 능선을 넘어 새로 매복진지를 만들 장소에 도착했다. 양편으로 가파른 산비탈이 있는 깊숙한 골짜기였다. 산비탈에는 침엽수와 활엽수가 서로 어울려 서 있었다. 활엽수들은 노랑과 갈색 그리고 빨강색으로 옷을 바꿔 입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성급하게 새빨갛게 변해 있는 단풍나무가 보였다.

 

인솔자인 인사계가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교통호를 파라고 지시다. 원태는 산비탈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를 선정받았다. 바로 옆에 녹슨 철조망이 둥글게 뒤엉켜 있었다. 철조망의 가운데에 통제구역의 표지판이 떨어져 비와 바람에 퇴색해 가고 있었다. 지뢰탐지기는 애초부터 고장인 듯 사용을 않고 무전기와 같이 놓여 있었다. 작업을 시작했다. 원태는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선정받은 위치로 갔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거리는 30여 미터 정도 돼 보였다. 실장갑을 손에 끼고서 곡괭이 자루에 침을 뱉고는 곡괭이를 등뒤로 치켜올려 힘껏 땅을 찍었다. 땅은 의외로 쉽게 파졌다. 별로 다져지지 않은 땅이었다. 50센티쯤 파고 원태는 곡괭이를 놓았다. 자갈이나 돌이 없어 삽으로 파는 것이 나올 성싶었다.

 

원태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수통에다 술을 넣어 왔는지 서로 돌려가며 통째로 마시고 있었다. 원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술을 한잔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원태를 부르지 않았다. 원태는 영주 녀석과의 술자리를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문득 영주가 보고 싶었다. 영주 외의 다른 동지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배중사에게 그려 준 엉터리 그림이 동지들을 위험에 빠뜨리진 못할 거였다.

 

원태는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끄고는 삽을 들어 땅에다 대고 힘차게 밟았다. 반쯤 들어가던 삽이 커다란 돌에 걸렸는지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반대편을 찔러 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원태는 삽을 놓고 다시 곡괭이를 잡았다. 두 손바닥 크기의 돌쯤이야 두서너 번 찍어 버리면 산산이 부서질 것이었다. 원태는 등뒤로 곡괭이를 젖혀 땅을 찍었다.

꽈과쾅-

거대한 폭음이 온 산에 쩌렁하게 울려퍼지고 철조망 사이에 버려진 표지판 위로 엄청난 흙이 쏟아져 내렸다.

(『친구는 멀리 갔어도』, 풀빛, 1988)

 

☆ 정도상 소설가

1960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남

1966년 마천국민학교 입학

1969년 전라북도 남원 인월국민학교로 전학

1971년 서울 남성국민학교로 전학

1976년 상도중학교 졸업

1979년 장훈중학교 졸업

1981년 전북대학교 어문계열 입학

1989년 전북대학교 독문과 졸업

 

수상내역

2008 제7회 아름다운 작가상

2008 제25회 요산문학상

2005 문화부장관 표창

2005 제3회 거창평화인권상

2003 제17회 단재문학상

 

☆ 정치적 문학의 깊이 / 백진기(문학평론가)

 

「친구는 멀리 갔어도」의 주인공 이름 역시 「십오방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김원태이다. 이름이 같아서가 아니라 이 두 작품을 하나의 연작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 실제로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가 구속이 되고 나서 강제 징집을 당한 인물이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인간의 실존적 자유의지를 극도로 제한하는 곳인 군대(「친구는 멀리 갔어도」)와 감옥(「십오방 이야기」)을 소설적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두 작품 사이엔 시간적으로 전후 관계가 치밀하게 연결돼 있는 셈이다.

 

주인공 김원태는 전방 철책에서 야간 근무를 서다가 오발 사고를 일으켜 같은 부대원을 죽이고 만다. 그는 곧 정치적 목적에 따라 보안사로 끌려가고 살인적인 고문에 시달리며 녹화사업을 받는다. 작품 속에서의 그는 '구타 회유 물고문 등의 극단적 상황 하에서의 심리적 갈등- 전기고문-항복-프락치-휴가-모교의 지하운동권의 조직표를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옛 동지들과의 접촉-귀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전과정을 작가는 상황과 인물, 인물과 인물의 갈등과 대립을 신랄하게 형상화함으로써 한 사회의 모순적 대립 상황과 그것의 구조적 단면을 전형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리얼리즘 창작 방법의 핵심에 상당히 육박하고 있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어떠한 소설적 타협도 거부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이 의문의 폭발 사고로 죽는 대단원 장면에서 소설적 안이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전편에 걸쳐 소설적 긴장을 지탱하는 데 효과적으로 성공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문 장면의 실감 있는 형상화와 주인공 김원태의 내면 묘사의 핍진성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정도상 초기 소설의 두드러진 복장은 무엇보다도 정치 권력의 구조적 폭력이 한 인간의 삶을 얼마만큼 파괴할 수 있는가를 추호의 낭만적 인식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는 데에 있다. 이 소설은 이것의 상당한 소설적 성과이다. 위의 두 작품은 정도상의 초기 작품이지만,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다.

 

우리는 지나온 1980년대를 기억한다. 그 1980년대를 소설로 가로질렀던 눈부신 젊은 작가들 역시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80년대를 1980년대답게 기억해 주는 표정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1980년대에 등장했던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그 미완의 표정을 가슴에 담아 낼 수도 있다. 그들의 소설적 재능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게 짓이겨지면서 이제 새로운 모습을 예고하고 있는 중이다. 그 속에 정도상도 함께 있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

 

"나는 슬픔을 아는 사람을 지지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 사람은 문재인이다."

- 정도상(2017.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