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천사의 날개」 이원규 (2019.11.13)

푸레택 2019. 11. 13. 22:24

 

 

 

● 천사의 날개 / 이원규

 

그날 오전, 장 목사가 전화를 걸어 온 것은 뜻밖이었다. 내가 여직원에게서 전화를 넘겨받아 “총무부장입니다" 하고 말하자, 그는 정중한 어조로, 주월 백마사단 장거리 정찰대 출신 박광현 씨가 아니냐고, 자신은 군목으로 종군한 장선목이라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화기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국내에 계셨군요. 제가 목사님을 잊을 리가 있습니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사실 나는 그 고통스런 전쟁에서 돌아온 뒤, 그때의 일을 잊으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참전 경험이 내 인생을 불행하게 몰고 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때 일이 불쑥불쑥 떠오를 적마다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내가 그 동안 11명의 동료 중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 것은 나의 망각도 원인이지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장 목사는 그 시절 우리에게 각별한 애정을 준 군목이었다. 열두어 해 전인가 막 대리로 승진했을 무렵, 나는 그를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자신이 베트남에서 겪은 일 때문에 한동안 목회일도 못하고 무기력상태에 빠졌었다고 고백처럼 말했다. 그리고 곧 뉴기니로 선교활동차 떠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나와 단짝이자 우리들의 우상이었던 신태민 하사가 사는 곳을 찾아갔었다고 말했다.

 

"결혼해서 남매를 낳고 김포 고향 마을에서 양계를 하면서 살아요"

나는 군복무중 나와 특별히 가까웠고 베트남 전쟁에선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신 하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근처에 가면 한번 찾아보겠다고 말하고 내 명함과 장 목사가 급히 신 하사의 주소까지 적어준 명함을 교환했었다. 그 뒤 십여 년이 지난 것이었다.

 

장 목사가 전화선 저쪽 끝에서 다시 말했다.

"난 지난 봄에 귀국했어요. 다른 게 아니라 어저께 신태민 씨가 죽었어요. 발인이 내일인데 빈소와 장지 모두 김포군 대곶면 약암리래요. 오늘 오후 상가에 갈까 합니다."

내 입에서는 마치 미리 준비한 대답인 것처럼 한마디가 홀러나왔다.

"저두 가겠습니다. 저녁 다섯시쯤 만나서 같이 가기루 하죠."

 

오후 늦게 나는 장 목사를 만나 내 차에 태우고 김포로 떠났다. 어언 오십대 초반에 이른 장 목사는 옛날보다 군살이 약간 붙은 체구와 백발이 듬성듬성 섞인 머리칼을 보이고 있어 문득 흘러간 세월을 아쉽게 했지만 아직도 눈빛은 그 시절처럼 형형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결코 허술하게 목사 노릇을 해오진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자신이 종사하는 일과 가정에 대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곧 신태민 씨의 불행을 이야기하게 되고 이내 침울해졌다.

 

"신태민 씨는 어떻게 죽었답니까?"

내 말에 장 목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농업용 동력 전기선에 감전돼 죽었답니다. 고인의 동생하구 전화 통화하며 느낀 건데 아무래두 자살인 거 같아요. 정신질환에 시달렸다고 했거든요."

"아, 그랬군요. 지금 마흔여섯이니까 한창땐데 안됐군요. 허지만 정신병 알았으면 뭐 사는가 싶게 살았겠어요. 진작 찾아보지 않은 게 후회됩니다. 사실 김포라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찾지 못했죠,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는 방어의식 때문이었어요."

 

장 목사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나두 마찬가집니다. 때때로 그때의 일들이 괴물처럼 두 팔을 벌리고 덤벼들었지요. 난 열심히 기도했어요. 뉴기니로 간 것두 그 때문인지두 몰라요. 난 선교활동에 온몸을 던짐으로써 나 스스로 딴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바쁘게 만들었어요. 난 목사이면서두 결국 나 자신만 지키기에 급급했지. 태민 씨를 잊었던 겁니다. 태민 씨에 대해 완전히 안심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신태민 씨에게 사과하며 오늘은 빈소에서 밤샘을 해야겠어요."

 

장 목사의 말에 나도 같이 밤샘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장 목사가 나처럼 그 시절의 기억에 시달리며 살아왔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그러나 그가 목사로서 우리 정찰대에 끼여들어 절망에 빠졌다가 조기 귀국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가 양심 때문에 괴로워한 목사였음을 생각하니 당연한 것으로 느껴졌다.

 

퇴근 무렵이라 차들이 길을 메우고 거북이걸음을 하여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김포 양곡까지 가려면 두 시간은 걸릴 것 같았으므로 나는 창고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필름을 꺼내 돌리듯이 옛날을 더듬기 시작했다. 장목사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불쑥 말했다.

 

"박 부장이 날 처음 만난 게 파월 첫날이었죠?"

"그렇죠, 사단 인사처 앞에서였죠."

우리는 그러기로 합의하고 만난 사람들처럼 망각에 묻어 둔 20년 전의 기억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찾아 올리기 시작했다.

 

나트랑 군항(軍港)을 떠나 1번 공로(公路)를 쾌속으로 달려온 수송트럭들이 속도를 늦추고, 선도 지프들이 앵앵거리며 울려 대던 사이렌 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군악대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중략)

 

우리는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파월 기간을 채웠다. 그리고 취사반원으로 몹시 소심해진 신 하사와 함께 귀국선에 올랐다. 그는 귀국 즉시 제대했고 나는 남은 몇 달을 국내에서 참으로 어렵게 적응하며 복무를 했다. 그 후 그의 소식은 십 년 전 장 목사를 만나 들은 것밖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는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고인의 아우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래서 형님이 그런 그림을 그렸군요."

내가 물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를 했죠. 그리구 그 그림이 날개 달린 사람이라구 했던가요? 지금 그것이 남아 있습니까?"

"그럼요. 수백 장은 될 겁니다."

그는 안채로 가서 국민학교나 중학교 아이들이 미술시간에 쓰는 수채화용 도화지를 수십 장 안아 들고 왔다.

 

그것들은 크레용이나 물감으로 그린 것인데 한결같이 벌거벗은 남자가 몸에 두 팔 대신 날개를 달고 승천하는 조인(鳥人)의 형상이었다. 빈소의 영정마저도 흐린 태민 씨의 상가에 와서 내가 그의 생전의 숨결을 느낀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스무 해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가 어제까지 살고 숨쉰 흔적을 내게 보여 주는 것은 그림뿐이었다.

 

"태민이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인제 짐작이 가네."

그의 기억을 엿보지 못해 답답했던 친구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장 목사와 나는 장지까지 따라가서 입관을 지켜보았다. 고인의 옷과 이불 등 유품이 태워질 때 우리는 승천하는 고인의 그림들을 하나씩 불속에 던졌다. 나는 고인이 그 전쟁에서 진 빚 때문에 오랜 세월 고통의 짐을 지다 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던진 그림이 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문득 내 몫의 짐까지도 그림에 실려서 함께 타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우리 모두의 짐을 지고 싸운 태민 씨가 귀국해서도 혼자 짐을 지고 살다가 그 짐을 한꺼번에 안은 채로 죽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편으로, 그가 떠날 집에서 우리가 하룻밤을 지내고 땅속에 장사지내는 것을 지켜본 것이 신태민씨한테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까도 생각했다.

 

우리는 갈 때와는 달리 서울로 돌아올 때는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밤샘으로 인한 피곤 때문이기도 했지만, 태민 씨가 자기 어깻죽지에 붙인 날개에 우리 가슴에 쌓였던 옛 기억의 고통까지도 실어 날아간 것 같은 숙연함 때문이었다.

(『천사의 날개」, 문학과지성사, 1994)

 

 

● 분단의 상황, 바다의 삶 / 임진영(문학평론가)

 

이원규 소설의 인물들을 지배하는 시간은 과거의 역사이며, 그것은 대부분 '분단'이 준 기억의 시간이다. 한편, 그들의 삶의 공간은 대부분의 경우, '바다'이다. 이원규의 소설은 '분단의 기억을 되살리기' 혹은 '바다의 삶을 살아내기'라는 두 개의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그래서 이러한 소설적 특징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우리의 분단소설에서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던 어민들을 다루었다는 공적”을 낳은 것으로 평가(홍정선)되어 왔고, 어떤 면에서는 소재주의적 경향, 혹은 그의 작품을 단조롭게 하는 요소로도 지적(권성우)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바다'와 '분단'이라는 두 단어의 교직이 엮어 내는 우리 시대 삶의 무늬에 대해 그 이상의 평가를 시도해 보려 한다.

 

우리 소설사에서 분단문학과 바다의 관계는 아주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최인훈의 「광장」이나 이문열의 「영웅시대」의 주인공은 바다 한가운데 혹은 바닷가에서 죽음을 맞이 한다. 그들은 제3국행, 혹은 남한행을 거부하고, 망망한 바다 너머의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좌절의 상황 속에서 죽어 간다. 그들이 바다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 채 죽는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분단시대의 질곡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바다'는 분단시대 삶의 자리의 경계, 그 너머에 존재하는 자유의 지평을 보여 주는 상징적 공간이 된다.

 

그에 비해서, 분단문학의 역사 속에서 분단시대의 참혹함 그 자체를 상징하는 역사적 공간이미지는 바다라기보다는 산맥, '골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사목(枯死木)과 진달래로 표상되는 지리산, 김원일의 「겨울골짜기」가 재현해 낸 양민학살의 공간이 바로 '골짜기'이다. 그곳은 이념과 이념의 치열한 대결장이었으며, 이름없는 수많은 이들의 원한과 절규가 서려 있는 곳이다.

 

이원규의 소설 중에서는 「깊고 긴 골짜기」가 이 전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곳은 그러나 현재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기억 속에 묻힌 과거의 역사적 공간이다. 그것은 '복원되지 않은' 묻혀진 세계였다가 이제야 새삼 끔찍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깊고 긴 골짜기」에서 그 기억과 역사를 복원시켜 주는 계기가 되는 인물은 주인공의 친구로서, 6. 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결국 중립국을 선택해 살다가 사십여 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인물이다.

 

월남해 살면서 두고 온 가족의 소식을 못내 궁금해 하던 주인공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이들 두 사람이 서로 적이 되어 전투를 벌였으며, 결국 그 피비린내나는 격전장에서 적군의 편이었던 동생이 죽었다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극적 설정은 형제가 남과 북으로 갈리어 싸워야 했던 동족상잔의 상황을 담고 있는 분단문학의 계열 속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깊고 긴 골짜기」의 주인공에게 있어서 역시, 분단의 상혼이 새겨진 '골짜기'는 지금 여기의 일상적 삶의 공간은 아니다. 소설은 어떤 돌연한 계기로 인해 과거의 장소 속으로 찾아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역사의 선연한 핏자국을 확인하게 되는 사건 그 이상을 넘어서서, 어떤 현재적 삶의 전망도 보여 주지 못하는데, 그것은 주인공이 직접 전쟁을 체험한 노인세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비하면 「신열」은 아들 세대가 아버지 세대의 기억-역사적 진실을 복원해 내는 이야기이다. 이념대림 속에서 약삭빠른 변신에 성공한 아버지가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건을 알고,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노인을 만나게 됨으로써, 아들은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역사니 분단이니 하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그는 진실을 아는 대가로아버지를 잃는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다시 이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외국으로 떠나고 싶어하던 그는, 데모를 하다 전경에게 끌려가는 어느 학생의 눈길이 자신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을 느끼면서, "내가 맞닥뜨렸던 절망의 벽이 나 자신 부딪쳐야 할 숙명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소설들에서 작가는 역사적 진실의 복원이라는 분단문학 고유의 전통적인 주제와 관습에 충실하며, 그만큼 그 이상의 진전을 이룩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다시 우리의 원래의 문제제기로 되돌아가 보면, 이원규는 '바다'와 '분단 문제'의 독특한 결합을 통해 분명 분단문학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준 작가이다. 「포구의 황혼」이 바로 그에 값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여기에 분단의 원인이 되었던 이념과 사상의 대립은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만큼의 낙관적 희망을 가능하게 한 데는 바로 1987년 이후의 상황이 작용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와 이원규의 「포구의 황혼」 사이의 거리는 일방적 반공논리의 퇴색과 통일론의 개방이라는 역사적 변화가 낳은 거리이다. 북한문학계에서는 그들의 통일문학의 경향이 이전의 '그리움의 문학'에서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만남의 문학'으로 변모되었다고 표현한다. 이원규의 소설은 이러한 흐름에 부옹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속에서 분단은 너무나 정서적인 것이고, 육친과 혈연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좌익의 누명을 쓰고 평생 감옥살이를 한 노인의 이야기를 담은 경우(「신열」)라 하더라도, 문제되는 것은 진실과 배반이라는 윤리의 차원이지 이념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이는 좌익 장기수 문제를 우리 소설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던 김하기의 소설과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지는 면모이다. 그의 소설 중에서 이념의 문제가 정면으로 조명된 경우는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황해」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보적 시각을 온건하게 표현해 낼 줄 아는 작가로 평가되어 온 반면, 한편에서는 그의 역사의식이나 분단 극복의식이 1980년대 진보적 사학계의 일반적 견해, 모범답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그의 소설 속에서 이념이 아직 적절한 형상의 옷을 입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념을 넘어서는 민족적 동질성의 회복이 분단극복의 전제이며 보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포구의 황혼」이라는 이 평범한 제목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감동은 비상한 수준의 것임에 분명하다. 현재와 회상의 거의 균등한 교직,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리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절정을 조금씩 예비해 가는, 정통적 구성방식에 충실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아주 작은, 개인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의 역사와 바다의 공간 속에 열려진 이야기이다.우리는 이만한 소설을 낳은 작가가 앞으로 내놓을 새로운 분단문학을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 기대는 이미 발표된 또 하나의 수작 「천사의 날개」에서 그가 보여 준 역사적 상황 속에 선 인간의 구원이라는 문제의식, 베트남 전쟁 체험의 소중함에 의해 더욱 든든하게 뒷받침 되고 있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