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동절작용」 김형경 (2019.11.14)

푸레택 2019. 11. 14. 22:21

 

 

 

● 동절작용(冬節作用) / 김형경

 

책상 위에 펼쳐진 사절지 크기의 흰 종이 위에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동료의 무리에서 이탈하여 공유했던 기억들에 대한 상실감에 홀로 메말라가는 한 마리 환형동물을 연상시켰다. 혹은 정신분석의가 제시한 얼룩그림의 한 부분인 양,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숨긴 채 놓여 있었다. 하잖은 머리카락 한 올을 두고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매달리는 터무니없는 생각들은 필경 내가 처해 있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뒷걸음질이었다.

 

"김만형 선생님, 학생 가장 추천서가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오늘내로 반드시 제출하고 퇴근하도록 하세요."

교감은 교무실을 나서며 책상 서랍의 시건장치를 확인하는 태도로 말을 던졌다. 탄탄하고 옹골차 보이는 상체에 비해 기형적으로 짧고 허약한 그의 하체를 무연히 바라보다 문득 그가 평형을 잃고 무너질 듯하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그 느닷없는 위기감은 마치 복병처럼 일상의 곳곳에 깃을 틀고 있다가 때로는 누군가의 뒷모습으로, 때로는 머리카락 한 올의 형태로 나타나 발을 걸곤 했다.

 

교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교감이 남항시 교감회의에 참석하러 간다는 사실을 아는 교사들은 그가 조촐한 회식을 거쳐 곧바로 퇴근하리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대부분 두툼한 경력을 낡은 학습교재처럼 지니고 있는 교사들은 새삼스럽게 학습준비를 할 것도, 사사로운 잡무로 골치 썩을 일도 없었다. 슬금슬금 교무실을 빠져나가며 내 뒤통수로 한 번씩 시선을 던지는 그들의 기미를 나는 머리카락 한 올을 주시한 채 낱낱이 느끼고 있었다. 지금쯤 여교사들은 매점 뒷방에 모여 앉아 오징어나 땅콩을 씹으며 더불어 교감과 동료 교사들을 씹고 있을 터였다. 남자 교사들은 숙직실에서 고스톱에 열을 올리고 있으리라. 텅 빈 교무실에는 입구에 궁색한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사환 아이만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피추천인 자리에 붙은 미자의 사진은 생활기록부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새학기가 시작되던 이른 봄, 광명사장의 배불뚝이 늙은 사진사는 아이들을 교사 담벼락에 일렬 횡대로 세우고 셔터를 눌러 댔다. 거칠고 황량한 회색 벽돌담을 등지고 아이들이 다섯 명씩 섰을 때 나는 느닷없이 영화의 총살 장면이 떠올라 진저리 같은 것이 등줄기를 옮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생활기록부에 붙은 아이들의 사진은 하나같이 어둡고 경직된 표정들이었다. 학교와 오래도록 계약을 맺고 소풍이나 운동회, 졸업앨범용 사진을 도맡아 찍어 온 늙은 사진사는 나름대로 노련한 태도로 아이들의 표정을 연출하려 했을 테지만 그의 노회함도 아이들의 정직함을 극복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조금쯤 왼쪽으로 꼰 채 그쪽으로 두고 있는 망설이는 듯한 시선은 비틀린 입매와 묘한 부조화를 이루었다. 미자는 카메라를 보며 나름대로 웃어 보이려 했는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풀어 보지 못한 입가의 근육은 느닷없이 강요된 웃음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뒤틀렸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진 어디에도 미자가 부모 없이 언니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는 혼적이 없다는 다행이었다.

그러나 과연 다행일까.

 

(중략)

 

나쁜 짓...

현수는 무엇을 나쁜 짓이라고 규정하는 걸까. 걸핏하면 불량 운운하며 서슬이 퍼런 말들을 휘둘러대는 어른들의 편견을 지적하는 건지도 몰랐다.

편지하련?"

현수는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지만 그 말은 마치 비행에 지친 어린 참새처럼 화들짝 내 귓바퀴로 떨어져 내렸다. 편지라니. 현수는 내가 걱정할까 봐, 혹은 자신의 독자적 결정에 대해 느끼게 될지도 모르는 낭패의 기색을 숨기기 위해 밝고 건강한 이야기만을 적어 보낼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내용에서 졸음이 쏟아지도록 힘겨운 현수의 일상을 읽어 내고 우울한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현수가 숨기고 싶어하는 내용을 모르는 체해 주는 답장을 보낼 테고 현수는 그 속에 숨겨진 나의 걱정을 읽으며 서러운 위안을 맛볼 것이다. 이 무슨 힘겨운 숨바꼭질인가.

 

막 여섯시가 넘었을 뿐임에도 창밖은 어두웠다. 이제 곧 온 세상에 살얼음이 끼는 계절이 다가오리라.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두 손을 들어 입을 막으며, 들먹이는 어깨를 조그맣게 오그리는 열여섯 살짜리 계집아이의 뒷모습이 어두운 창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단종은 키가 작다』, 고려원, 1991)

 

● 억압 없는 세상에 대한 꿈꾸기 / 신수정(문학평론가)

 

《국민일보>가 주관하는 장편소설 공모에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제1회 수상자가 된 김형경은 1990년대 들어 새로운 역량을 인정받고 있는 젊은 작가 가운데 하나라고 할 만하다. 이미 「모든 절망은 다르다』(1988)라는 시집을 갖고 있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1988년 《문학사상》에 중편 「죽음잔치」가 당선된 이래 수 편의 작품들을 모은 「단종은 키가 작다』(1991)라는 단편소설집을 상재한 바 있는 그녀에게 있어 199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표현은 사실 당연하고도 진부한 수사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자신의 문학적 이력의 첫발을 내디뎠던 일군의 작가들이 1990년대의 변화된 현실속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작품생산의 미비함을 생각한다면, 장편소설로 과감하게 자신의 길을 새로이 열어 가고 있는 김형경의 활약상은 놀라운 도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형경은 이를 뒷받침하듯 최근 「세월」(1984)이라는 세 권의 자전적 장편소설을 통해, 이제까지 여러 단편과 장편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오던 자신의 진솔한 삶의 경험들을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단계로의 모색을 보여준 바 있다. 김형경 문학이 한 고비를 넘어서고 있다는 평가는 이제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한 시대의 문학사적 의미를 묻는 일에 다름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다면 김형경 문학으로 하여금 1980년대를 넘어 190년대 우리 모하의 한 경향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이러한 질문에는 김형경 문학의 본질적인 특징이 1990년대 현실과 행복하게 만나는 지점에 대한 계보학적 관심이 투영되어 있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 문학사에서 1980년대 문학이 갖는 의미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는 오월 광주로 시작되는 거대한 야만의 시기였다. 1980년대 초반의 소설들은 이러한 야만적 정치권력에 의해 억눌리고 왜곡된 상상력의 한 극치를 보여 준다.

 

임철우의 「불임기」로 대표되는 이 시기 소설들은 강력한 집단적 힘에 대한 공포를 소설이라는 서사가 감당해야 하는 기본적인 현실성 대신에 알레고리와 파편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보여 주고자 한다. 이 시기 소설들은 너무나도 거대한 야만적인 폭력성에 의해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천착과 그 속에서의 새로운 전망을 가늠하고자 하는 의지가 무력화되는 장면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사회 각 부분 운동의 보다 조직적이고 과학적인 성숙과 더불어 1980년대 소설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유례없는 노동자문학의 전성기를 열어가게 된다. 노동현상을 소재로 한 소설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접적으로 그것과 무관한 다른 대부분의 소설에 있어서도 이 시기 우리 소설을 추동시켜 나간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민중적 전형에 대한 창조와 낙관적인 전망의 제시가 이 시기 소설들의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대두되면서 폭력적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힘에 대한 신뢰가 개인적인 회의와 불안을 대체해 나가게 된 것이다.

 

(중략)

 

수업시간에 교과과정에 없는 현실의 이면을 언급했다고 해서 특정 기관에 끌려가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당한 한 여자중학교 교사의 내면 풍경을 그리고 있는 「동절작용」이나, “어떤 집단적인 힘, 행운과는 무관한 어떤 필연적인 동기, 거스를 수 없는 힘의 원리”에 의해 자신의 일생을 마치고 마는 아버지를 다루고 있는 「경우의 수」, 그리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민중적인 축제인 ‘단종제'가 어떻게 왜곡되고 변형되는지를 그리고 있는 「단종은 키가 작다」 등은 모두 1980년대 문학에서 주로 다루었던 국가의 개인에 대한 억압을 다루고 있는 문제적인 작품들이다. 한편 이에 반해 한 잡지사의 파업투쟁을 일지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태풍주의보」나 한 민중가수의 영웅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헹가래치기」등은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고압성과 비민주성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뭇 특이한 데가 있다.

 

김형경 소설에 나타나는 이러한 양상은 그를 냉정한 균형감각의 소유자로 보이게 한다. '집'에 대한 이중적 갈망은 달리 해석하자면 현장에 대한 분열된 자의식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자의식은 당연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나. 김형경 소설의 균형감각은 어떤 집단의 이데올로기나 환상에도 쉽게 휩쓸리거나 도취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총체적인 집단에 대한 믿음을 함부로 내팽개치지 않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태도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중략)

 

돌멩이를 주워 강을 향해 던졌다. 물수제비가 떴다.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익사를 무릅쓰고 온몸을 던져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돌의 저 서슴없는 사랑. 돌이 익사하지 않도록 몇 차례나 물밖으로 튕겨 내는 물의 안타까운 사랑. 돌의 탄력도 물의 파문도 모두 사라진 강물의 냉혹한 수평 표면을 나는 눈이 시리도록 보아 두었다. (「돌의 사랑」)

 

서정적인 비유로 드러난 이 대목은 김형경 소설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진정한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자신을 서슴없이 버리는 돌의 사랑은 김형경 소설이 궁극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를 몇 차례나 물 밖으로 튕겨 낼 준비가 되어 있는 물의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돌의 회생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데는 이러한 물의 사랑이 전제될 경우에 한해서인 것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물의 사랑이 없는 돌의 사랑은 맹목이나 집단적인 억압으로 화할 가능성을 지닌 것일 것이다. 이러한 물의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돌의 희생정신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초월한 경지에서만 진정한 집단적인 이데올로기는 그 긴장력을 획득한다.

 

아울러 그 경우에 있어서만 개인은 그에 화합하고 응답하는 안타까운 사랑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김형경이 진정으로 원하는 집단 속의 개인의 주체성이 아닐 수 없다. 희생정신으로 꽃피운 집단의 정당성 속에서 개인의 가진 바 본분을 아낌없이 행하는 것. 서로의 길항력이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의 물수제비를 가능하게 하는 세상에 대한 꿈꾸기. 이것이 김형경 소설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