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회색의 손」 고원정 (2019.11.16)

푸레택 2019. 11. 16. 18:12

 

 

 

● 회색의 손 / 고원정

 

예감이라고 할까.

동표가 교단 위로 올라섰을 때 나는 왠지 기척 없이 높아진 밀물이 섬뜩하게 발목을 적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일에 휘말려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다음에도 나 혼자 낯설고 참담한 모습으로 남겨져 있으리라는, 어떤 계시 와도 같은 감정이었다. 나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만큼만 몸을 떨었다.

 

두 손으로 교탁을 짚고 선 동표의 얼굴은 주체할 수 없는 홍분과 긴장으로 해서, 팽팽하게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끈적한 두 손을 허벅지에다 대고 꼼꼼하게 문질렀다. 두터운 정적이 교실 구석 T석 부겁게 내려덮이고 있었다. 웅성거리며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반 아이들의 목소리는 떠도는 먼지와도 같이 스산했다. 그 먼지들을 흩뜨리면서 키드득 하고 한 꼬리의 흐드러진 웃음 소리가 달려갔다.

"개자식들."

 

복도 쪽의 간유리를 흘겨보면서 동표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나는 이상한 쾌감과 쑥스러움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다른 교실에서는 아무도 흑관 앞에 나가 서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 아이들은 마치 줄을 맞춰 심어 놓은 묘목처럼 가지런히 어깨를 굳히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나무라듯, 아니면 재촉하듯 똑 똑 똑 똑 손톱으로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 왔다. 그리고 아직 첫 시간도 시작하기 전에 누구일까, 음악실 쪽에서 피아노 소리가 아득한 종소리처럼 울려 오고 있었다. 침묵에 싸인 우리 교실은 갑자기 세상의 한구석으로 뚝 떨어져 나온 것만 같았다. 윤기나는 시선으로 아이들 하나하나의 표정을 훑으면서 동표의 얼굴은 차츰 평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 하고 나는 망연히 생각했다. 내가 저렇게 반 아이들의 얼굴 모두를마주하고 서 있다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을까. 그런 일이..... 하고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끈끈하게 남았다. 누군가의 손에 밀려서. 머지않아, 이윽고 언제나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동표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들 생각하니?" 대답이 없었다.

"참아야 한다고들 생각하니?"

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쓴웃음을 빼어 무는 동표의 얼굴을 나는 더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앞의 빈 의자에다 눈을 내 리깔았다. 동표의 자리였다. 사실 나는 동표가 일어서서 나간 자리이렇게 내려다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린 속은 거야."

피아노 소리가 그쳤다.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속이는 학교를 상상할 수 있겠니?

 

(중략)

 

준형이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왠지 이 일의 끝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 이름을 써라."

담임선생은 책상 위에 두 장의 시험지를 밀어 놓았다. 교무실 안의 모든 시선이 따갑게 준형이와 나의 뒷덜미에 쏟아지고 있었다.

"......"

눈자위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군데군데 옷이 찢어진 준형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험지를 끌어당겨 천천히 이름을 썼다.

오준형.

"자, 이젠 네 차례다."

담임선생은 한껏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넌 뭐냐.

나는 준형이가 건네 주는 볼펜을 받지 않았다.

넌 뭐냐.

천근 만근의 무게로 느껴지는 시험지를 나는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곤 좌아악 반으로 찢어 냈다. 다시, 다시, 다시 쨍 하고 또 한번 하나의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끝이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나는 보았다. 두 개의 토막난 손이 허공을 끝없이 떠다니고 있는 것을.

 

나는 무기 정학을 당했다.

물론 시험은 다시 치러지지 않았다. 준형이와 동표의 화학 점수는...... 80점이 나왔다고 했다.

(『거인의 잠』, 현암사, 1988 발췌)

 

● 권력의 추상화의 희화화 / 문홍술(문학평론가)

 

권력은 국가나 중앙집권적인 구조에만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 다층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힘의 그물망이다. 그러한 권력은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결정체가 아니라, 인간 의지와 그 신체를 세밀한 부분까지 통제하는 전략이다. 인간은 권력과의 관계·자리에 의해 구성되고 그 기능이 변하는 '기호'일 뿐이다.

 

권력이 이처럼 인간의 자율의지를 조종하는 전략적 핵심요소로 부상하기 시작한 시기는 근대 이후이다. 푸코(M. Foucault)가 『감시와 처벌」에서 간파했듯이, 근대는 모든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권력이 씨줄과 날줄을 이루면서 유폐적인 그물망을 형성하고 구성원들의 일상의 세밀한 부분까지 지배하고 조작한다. 마치 원형감옥처럼, 사회구성원을 감방에 수감한 채 그들을 감옥의 제도에 맞도록 길들이고 조작한다. 구성원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권력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율적으로 행위한다 생각하지만, 실상 유폐적 그물망을 이루고 있는 각종 장치와 규율에 의해 원형감옥이 정한 틀에 꿰맞추어진다. 틀에 길들여지지 않는 구성원들은 처벌받고 유폐된다.

 

근대 이후의 권력은 이처럼 구성원을 억압하고 길들이는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 권력의 이러한 보편적인 특질 아래 특수자로서 이 여러 권력형태가 연결되어 있다.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권력구조, 그중 10월 유신과 5월의 광주로 상징되는 시기의 권력구조는 군사독재라는 또 다른 폭압성이 가미되면서 가히 가공할 만한 광폭성을 노출한다. 고원정 소설은 광기어린 권력이 지배하던 1980년대에 권력의 횡포와 그 구성원의 운명에 대한 문제를 들고 등장한 이후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오고 있다.

 

'정치적 허무주의' 혹은 '개인주의적 허무주의'로 명명되는 고원정 문학은 권력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권력에 대한 이러한 혐오감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다. 첫째 「등뒤의 살의」에서 보듯, 유년기의 개인적인 체험적 상처와 관련이 있다. 일등의 자리인 반장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친구의 답안지를 변조시켰던 국민학교 시절, 그로 인해 입게 된 정신적 외상 때문에 조회시간에 맨 첫줄에 서서 뒤통수가 뚫어질 것만 같은 아픔을 겪는다. 그 아픔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지속되는데, 그러한 정신적 외상에서 혐오감은 일차적으로 촉발된다.

 

둘째 고원정의 작품 전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배한 폭압적인 군사독재정권이라는 한국의 파행적인 권력구조를 들 수 있다. 실상 국민학교 교실에서 반장이라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답안지를 변조시키는 행위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보다 거시적이면서 파행적인 권력 구조에 의해 길들여진 부산물에 해당된다. 파행적인 한국의 권력구조와 유년기의 외상이 작가정신에 결합되면서 권력에 대한 혐오감이라는 고원정 문학의 뼈대가 구축된다.

 

(중략)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원정의 권력 혐오감이 1970~1980년대의 한국의 권력구조와 그로부터 잉태된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면서도, 그의 작품에는 한국의 권력과 관련된 특수한 현실이 거의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권력구조를 매개하지 않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추상화하여 권력일반으로 비약시킨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에서 한국적 특수현실은 회석화된다. 대신 개별적인 체험의 영역과 추상화된 권력의 영역이라는 두 축이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개별적 체험의 영역이 강조된 작품이 「등뒤의 살의」이고 추상화의 영역이 강조된 작품이 「거인의 잠」, 「칼 1」 등이다.

 

「거인의 잠」은 백인 지배하의 혹인 식민지라는 추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민족해방 투쟁전선에서 테러로 항거하는 과격파와 백인 지배 아래서의 흑인 지위 향상을 꾀하는 온건파라는 두 그룹이 있다. ㄷ파벌의 반목과 질시는 독립 이후에도 이어져 내전이 30년간이나 계속된다. 그 동안 승자의 위치가 여러 번 바뀌다가, 최후의 승자는 오건파의 우두머리인 흰 수염이 되고 과격파의 우두머리인 검은 수염은 처형당한다. 그러나 흰 수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패자인 검은수염을 닮은 사람들을 무대에 올려 죽이는 끔찍한 연극에 몰두하고 마침내는 발작한다. 이 작품은 권력쟁탈을 두고 벌어지는 복수심과 증오심에 기초한 광기어린 폭력을 제3세계라는 추상적인 무대를 통해 묘과하고 있다.

 

「칼 l」 역시 기독교도의 지배 아래 그들과 맞서 싸우는 회교도 국가라는 추상적인 공간을 무대로 하여 권력 이면에 감추어진 추악한 측면을 폭로하고 있다. 회교도 전사인 이브라힘 알 무사는 조직 내에서 'K17로 기호화된 '회교 혁명의 순혈아'이다. 그는 종교와 혁명의 순수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의 가슴에서 뽑은 한 자루의 칼의 빛을 좇는 절대의 삶을 산다. 그는 그 칼로 기독교도의 수상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잠입하지만, 이때 기독교도와 회교도가 평화라는 미명 아래 타협한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그의 일가족을 학살한 장본인들이 기독교도들이 아니라 그의 동료인 회교도들이며, 그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조작된 만행임을 알게 된다. 권력의 이면에 내재된 폭력성을 깨닫지 못하고 겉으로 내세운 허울 좋은 명분에 휩쏠렸던 그는 결국 권력에 의해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성스러운 싸움에 던져진 도구'로서의 기호 'KI7'에 불과하다.

 

이저럼 추상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폭압적인 권력 역시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권력의 추상화는 역사의 추상화를 동반한다.

 

(중략)

 

여기서 역사는 특수자로서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일제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을 거쳐 저 먼 신라시대로까지 소급· 확장된 역사이다. 그것은 특수자로서의 역사가 갖는 질적 편차를 무시한 추상화된 역사개념이다. 특수자로서의 한국 권력구조를 매개하지 않고 추상적인 권력으로 비약한 것과 추상적인 역사개념으로 비약한 것은 일맥상통한다. 이 추상화된 역사와 권력에 대한 혐오감에 고원정 소설이 자리잡고 있다. 추상화의 자리에 근대 이후 파행적인 한국의 특수 역사와 특수권력에 대한 질적 천착이 스며들 틈은 없다. 다만 어느 시대이든 피상적으로 관찰된 추상적인 역사와 추상적인 권력만이 있고, 그 모두는 동일하게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자리잡는다.

 

역사의 추상화와 더불어 추상화된 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낼 때, 그리곤 대항권력이 부재할 때, 혐오스러운 권력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부재한다. 만약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권력을 매개한 보편자로서의 근대 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면, 일체의 권력을 부정한 자리에서도 도달해야 할 어떤 유토피아적인 대상을 근대 역사 자체 내 혹은 근대 이전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통해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유토피아적인 대상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로 나아간다면 고원정의 소설은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중략)

 

고원정 문학이 개별적 체험과 추상화라는 두 영역 사이에 자리잡고 그 나름의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종합적인 지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종합적인 지양에 이르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역사와 그 권력에 대한 천착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고원정의 소설이 깊은 울림을 갖기 위해 나아갈 자리는 특수자를 매개로 하여 개별자와 보편자가 지양된 곳일 것이다. 특수자를 매개하지 않는 보편자는 추상적일 뿐이다. 미학적 범주에서, 그런 추상화는 알레고리보다 질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보편적인 것의 특수한 것으로의 전이 속에 알레고리가 존재한다'는 괴테의 지적은 적어도 고원정 문학에서는 강조되어야 한다. 그의 데뷔작 「거인의 잠」이 '알레고리적'인 추상화의 영역에서 출발하였기에 그의 소설적 완성도는 특수보편자라는 '알레고리' 본연의 미학을 달성하는 정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원정 문학은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역사와 권력을 질적으로 깊이 있게 파악하기보다는 표층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개별적 체험과 추상적 영역을 상호분리시킨다. 여기에 폭력적인 권력과 그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개인이라는 작품구조가 반복되면서 그의 작품은 도식성을 띠게 된다. 추상화는 관념전달에는 유효하다. 그러나 그것이 특수보편자라는 알레고리 본연의 범주로 질적 이행을 하지 못한 채 그 상태에서 반복되면서 도식성을 지나치게 띠게 될 때, 소설은 삶의 구체적인 토양에 그 뿌리를 깊게 내린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닌 인위적인 알루미늄 나무를 대하는 느낌을 준다. 살아 있는 나무는 항상 신선감을 준다. 반면 조화류의 나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고원정의 소설이 계속 우리에게 신선감을 주기 위해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씌어지는 소설이어야 하며, 그런 소설은 관념에 구체적인 삶이 용해될 때이며, 그럴 때 소설은 풍성한 나뭇잎을 드리우고 우리를 그 세계 속으로 이끌 것이다. 광기어린 권력에 대한 비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함에 있어서 획일적인 창작방법이 지배적이던 1980년대에 '알레고리적'인 창작방법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들고 나온 고원정이 190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그 소설사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추상화와 희화화에 입각한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특수보편자라는 '알레고리' 본연의 미학으로 상승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