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정든 땅 언덕 위」 박태순 (2019.11.18)

푸레택 2019. 11. 18. 13:44

 

 

 

● 정든 땅 언덕 위 / 박태순

 

외촌동(外村洞)은 지난 봄철에 급작스럽게 생긴 동네였다.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서 무허가 집들을 철거한 시 당국은, 판자촌에서 살던 사람들을 위하여 새로이 동네를 만들어 증정했던 것이다. 시 당국은 '재건 토목주식회사'에 청부를 맡겨서 날림으로 공영주택을 지었다. 적당히 블록으로 칸을 막아 가면서 닭장 짓듯이 잇달아 지은, 겉으로 보자면 길다란 엉터리 강당과 같은 모습이었다. 또는 반듯하게 죽어있는 길다란 뱀과 같은 형국이었는데, 그렇게 본다면 형형색색의 비늘을 가지고 있는 이 뱀은 세 마리가 될 것이다. 즉 세 줄의 가동(家棟)이 개울 이쪽을 달리고 있었는데, 뱀의 비늘이라고나 할 가동의 옆구리에는 먼저 복덕방이라든가, 막걸릿집, 상점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 내부를 볼 것 같으면, 방의 골격울 갖춘 것 세 개마다 부엌 형태가 하나씩 달렸고 그것이 엉성하게 하나의 가옥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가옥 형태의 안쪽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어서 그 번호가 217호까지 나갔다. 즉 217호의 세대가 살게끔 되어 있었는데 이 숫자는 또한 모든 면에서 이 신식 동네 주민들의 개성을 나타냈으니, 예를 들자면, '74호 복덕방'이라든가, '193과부댁 술집'이라든가, '55상회'라든가 식으로 이웃 사람들을 호명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너나없이 억척스럽게 가난했기에, 그리고 우물과 변소를 같이 써야 했기 때문에 주인들의 사이는 우선 좋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확실하다. 우물은 대략 30여 미터의 사이를 두고 하나씩 만들어져 있고, 그리고 공중변소는 대략 45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치 초소인 양 세워져 있었다. 하나의 거드럭거리는 이방인으로서 당신이 이 동네에 들어선다면, 우선 대변 보는 곳으로 들어가서 10여 분쯤 앉아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변소간의 너덜거리는 썩은 나무판대기에서, 전혀 당신이 예상할 수 없었던 감동과 환희의 고함을 듣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영이 자지는 말방울 자지다.'

어느 위대한 화가도 그려 낼 수 없을 것 같은, 침을 묻혀 가면서 일부러 그렇게 삐뚤빼뚤 썼을 것임에 틀림없는 큼지막한 그림이 이렇게 주장하고 있음을 당신은 볼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진영이라는 어린이의 고추가 말방울처럼 삐져 나와서, 그리고 말방울처럼 명랑한 음향을 연주하고 있음을 듣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진영이의 말방울 음향뿐만 아니라, 이 동네 전체에서 무어랄까 생(生)의 요란스런, 그리고 점잔빼지 않는 낯선 음향이 들려 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공묵이 자지는 소방울 자지다.'

 

그러면 당신은 소방울의 음향을 들으면서, 이윽고 바깥으로 나오는 것인데, 이제 당신은 변소 옆 대략 두 평 정도의 공지에 고추밭이 있음을 보게 된다. 만약 당신이 이 동네를 시찰하기 위해 나온 중앙 관서의 관리라 할지라도, 땅을 사랑하는 밭 임자를 나무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우물 옆에 대여섯 명의 쪼글쪼글한 아주머니들이 멍청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슨 애기를 나누고 있음을 듣게 된다. 남정네들이야 장기를 두거나 소주를 마시면서 회동할 수 있지만, 안사람들은 도대체 우물가에서 만나곤 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이해해야 한다.

 

(중략)

그녀가 마음속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가위는 그녀의 머리를 푹 찌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솟아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금 뒤에 그녀는 굉장히 중요한 것을 뺏겨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무엇을 뺏겨 버렸는지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비록 그 누군가가 자기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 대고 있고, 그래서 몹시도 허전한 쏠쓸한 느낌이기는 했지만, 그런데 자기의 머리카락이었음이 분명한, 새까맣게 반들거리고 있는 혹진주가 불쑥 그녀의 코앞으로 내밀리어 왔고, 영곤이 엄마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돈이 왔고, 나종애는 너무 부끄러워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변소로 갔다. 이윽고 정신을 차려서 그녀는 너덜거리는 썩은 나무판대기로부터 전혀 그녀가 예상할 수 없었던 이런 낙서를 보았다.

'진영이 자지는 말방울 자지다.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 낙서의 문구가 하도 순진하게 보이고, 그리고 아주 마음에 들어서 한참 후에야 수줍음을 느꼈다.

 

썩은 나무판대기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면서, 그녀는 그런 채로 그리고 앉아 있었다. 자기의 머리카락이 달아나 버렸음을 그녀는 새삼 느꼈고, 그런 꼴을 해가지고 바깥으로 나갈 용기가 생기질 않았던 것이다. 바깥은 저쪽 유럽에 있을 어느 이름도 모르는 사내 편에 붙어 있는 듯싶었다. 마침 버스가 들어온 모양인지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이 동네보다는 내촌동이 나올 거 겉잖어?"

"그래요, 내촌동이 훨씬 나올 거 겉애요."

동행인 듯싶은 여자가 말을 받았다. 아마 그들은 집구경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졌다. 정의도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낯선거리」, 나남, 1989)

 

● 진정한 삶을 위한 편력 / 김종철(아주대 교수)

 

해방 이후 우리의 현대사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본다면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을 것인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금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이름 그대로 난세(亂世)를 겪어 왔노라고 말할 정도로 개개인의 삶은 커다란 격류에 거듭 휩쓸려 왔던 것이다. 8·15해방과 좌우 대립, 6. 25의 동족 상잔, 4. 19혁명과 5·16, 경제개발과 급격한 도시화, 광주항쟁과 6월항쟁 등 격동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격동 속에 개개인의 삶은 온전한 지속과 발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고, 그 뿌리까지 뽑히기 일쑤였다. 분단과 전쟁이 수많은 난민을 낳았다면 급격한 도시화와 농촌의 피폐는 도시 변두리 빈민이나 또 다른 난민을 낳았다. 그런가 하면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시민사회의 가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사회변동에 따른 가치관의 혼란은 정신적 난민들을 만들어 내었다.

 

박태순은 바로 이러한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파행에 관심을 집중해 온 작가이다. 그리고 그의 전기적 사실 또한 그의 작품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의 가족은 그가 6세 때인 1947년 1월에 해주에서 서울로 내려왔으니 그가 유년기에 체험한 바 해방 이후의 다소 유동적이던 분단상황 아래에서의 월남민들의 생활은 실향사민(失鄕私民)을 다룬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된다. 대학 1학년 때 그는 4.19혁명에 뛰어들었고, 학우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 체험으로 그는 4.19에 직접 가담했던 사람의 목소리로 4.19의 본질을 그 내측에서 그려낼 수 있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우리의 현실과 삶의 기록자로서의 면모를 꾸준히 보여 왔다. 그는 1970년대를 여는 대표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전태일의 분신과 광주(廣州)단지 사건에 대한 보고문학을 제출한 바 있다. 이러한 민중의 현실과 그 삶의 본질에 대한 그의 탐구와 체험은 그 뒤 국토기행으로 이어져 「작가기행」과 「국토와 민중」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런가 하면 제3세계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파키스탄행 열차」(인도), 「민중의 지도자」(나이지리아)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문학의 사회적 책임만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매우 투철한 의식을 견지해 온 작가이기도 하다. 문인들의 사회적 발언에 적극적이었으며, 1974년 이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그 후 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을 비롯 인권운동협의회, 평화시장대책위원회 등에 참여해 왔다. 그는 스스로 “문학성명서'가 더 급하다면 그것부터 써야 할 일이고 잘못된 진상을 알리기 위해서는 현장 르포가 더 요청"된다고 하고, 나아가 소설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작가를 민중의 '입'으로 보았으며, 아울러 왜곡되고 은폐된 현실에 대한 정확한 귀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특정한 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 작가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스스로 작가는 특정한 계급적 사유의 고리에서 해방되어 사회, 민족,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감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했거니와 그가 작가를 민중의 대변자로 본 것 역시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태순은 창작집 「정든 땅 언덕 위」에 주로 수록된 이른바 외촌동 연작으로 작가적 명성을 얻었고, 이 작품들만으로도 소설사에 기록될 작가이다. 그리고 도시 빈민 문제를 다룬 이 작품들은 그의 국토기행에 이르기까지 민중현실에 대한 기록이라는 박태순 문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정신의 궤적을 염두에 둘 때 박태순 문학의 기본 축은 「무너진 극장」(1968)에서 「환상에 대하여」(1975), 「밤길의 사람들」(198)에 이르는 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무너진 극장」에서 「밤길의 사람들」에 이르는 길은 4.19에서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의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도정의 문학적 표현인 셈인데, 그 도정에 작가의 현실과 역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확대를 드러내는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분포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적 출발점은 4.19혁명의 실패와 좌절인 셈이다.

 

작가 자신이 대학 1학년 때 직접 체험한 이 미완의 혁명을 그는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무너진 극장」은 이승만 정권의 붕괴 전야인 4월 25일에 일어난 사건들을 그린 것인데, 4.19혁명의 횡단면을 날카롭게 부조해 낸 기념비적 작품이다. 4.19 때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가 나은 '나'는 친구 광득이와 함께 외출하다 금방 마포형무소에서 나온 융만이를 길거리에서 만나서는 망우리로 평길이의 무덤을 찾아 본다. 평길이는 시위를 하다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다시 이들은 서울의대 부속병원으로 부상당해 입원한 친구 혼수를 문병하고 문리대 쪽으로 가다가 대학교수단의 시위를 보고는 저녁부터 술집에 앉아서 침통하게 자유와 행복 등을 주제로 토론을 한다. 밤중에 밖으로 나온 그들은 분노한 시위대의 물결에 합류하여 임화수의 평화극장을 부수러 간다. 시위대는 무질서에 환장해 버린 듯이 기괴한 소리를 뱉으며 극장의 내부를 모조리 파괴하고 불까지 질렀다.

 

평화극장이란 무엇인가. 독재정권의 하수인인 정치깡패 임화수의 것이기에 파괴되었지만 그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근대사회 도시의 주요한 공간의 하나인 극장은 시민들의 정서와 의식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말하자면 시민의 놀이공간인 셈이다. 그러나 임화수의 평화극장은 시민의 주체적 놀이공간이 아니라 시민으로 하여금 재갈 물린 관객이기를 강요하는 현실의 상징적 공간이다. 시위대는 이 극장을 파괴함으로써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파괴를 그렇게만 보고 있지 않다. 위선과 기만, 억압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이 파괴는 쾌감을 가져왔지만 곧 시위대를 저 원초적 무질서에까지 끌고 가고 말았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는 뚜렷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보다는 밝은 쪽이 더욱 광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래층이고 이층이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마치 원시인들과도 같이 객꺽 고함을 지르며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여기저기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는 곳에 마치 이 세계에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처럼 이상한 냄새를 피우며 연기가 퍼져 가고 있었다.

(중략)…

아마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불만스러워할 때 막연히 느끼는 그러한 방심상태일는지도 모른다.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무질서 에로의 해방상태, 이런 본능이야말로 최루탄을 맞으면서도 애써 진행시켜 갔고 대열을 만들어 갔던 데모의 다른 한쪽 면이 아니겠는가? (「무너진 극장」, 48쪽)

 

(중략)

 

박태순의 작가정신의 편력은 대체로 민중세계 쪽으로 정향되어 있는데, 그 첫 단계가 도시 변두리의 빈민세계에 대한 탐구와 보고이다. 이른바 외촌동(차)형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이 빈민 문제를 다룬 이 소설들은 「정든 땅 언덕 위」(1966)를 비롯한 초기 외촌동 연작에서 「독가촌 풍경」(1977)에 이르기까지 한 계 열을 이루고 있다. 「정든 땅 언덕 위」는 이 계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이 서울의 도시계획에 따라 밀려나 살게 된 곳이 외촌동이다. 시에서 날림으로 닭장 짓듯 지어 준 집들로 이루어진 이 동네는 그러니까 도시에서의 정상적인 삶이 거부된, 쫓겨난 사람들의 마을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난민촌에서 절망보다는 삶의 활기를 발견한다.

 

하나의 거드럭거리는 이방인으로서 당신이 이 동네에 들어선다면, 우선 대변 보는 곳으로 들어가서 10여 분쯤 앉아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변소간의 너덜거리는 썩은 나무판대기에서, 전혀 당신이 예상할 수 없었던 감동과 환희의 고함을 듣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영이 자지는 말방울 자지다.'

어느 위대한 화가도 그려 낼 수 없을 것 같은, 침을 묻혀 가면서 일부러 그렇게 뼈뚤빼뚤 썼을 것임에 틀림없는 큼지막한 그림이 이렇게 주장하고 있음을 당신은 볼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진영이라는 어린이의 고추가 말방울처럼 삐져 나와서, 그리고 말방울처럼 명랑한 음향을 연주하고 있음을 듣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진영이의 말방울 음향뿐만 아니라, 이 동네 전체에서 무어랄까 생(生)의 요란스런, 그리고 점잔빼지 않는 낯선 음향이 들려 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정든 땅 언덕 위」, 12쪽)

 

공중변소에서 듣는 이 말방울의 명랑한 음향, 다시 말하여 삶의 요란한 음향은 이 작품의 주조음이다. 주인공 나종애가 자신을 구원하러 애인 정의도가 오는 것을 보는 곳도 이 말방울이 울리는 공중변소였다. 우물가의 아낙네들의 잡담, 약장수들의 노래, 나종열과 미순이가 밤에 연애하면서 부르는 노래 등이 외촌동의 공간을 울리고, 그 속에서 미순이가 약장수 패거리에 따라가 버리는 사건, 나종애가 미순이 어머니가 자신을 술집 작부로 꾀어 내는 것을 거절했다가 가족에게 구박당하는 일, 고리대금업자 변노인과 미순 어머니의 동거와 결별, 변노인이 독일에 광부로 간 아들의 가족수당을 위해 종애에게 자기 아들과의 서류결혼을 제의하는 일 등이 벌어진다.

 

희극적이기조차 한 이러한 세태 속에서 작가는 나종애와 정의도를 주목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나종애, 정의도, 변노인의 관계를 춘향, 이도령, 변학도의 관계와 흡사함을 밝히고 있는데, 「춘향전」에서 춘향이 주체적 인물이었듯이 나종애 역시 그렇다. 그녀는 미순이 모친과 변노인의 제안을 뿌리치고 머리를 잘리라 그 돈으로 외촌동을 탈출하려 한다. 정의도는 극장 고용원 자리를 얻게 되면 그녀를 데리러 온다고 했었다. 이 작품은 그 약속이 지켜졌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궁핍으로 인해 벌어지는 빈민들의 세태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 오백년」 역시 외촌동 이야기이다. 외촌동을 떠나 서울 용두동에서 상점을 내고 있는 윤지노는 작년에 죽은 정여철의 제사에 참례함겸 여동생 지후 문제로 외촌동에 근 1년 만에 돌아간다. 작년 오늘 정여철은 정신병이 발작해 미쳐 날뛰다 외촌동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고, 여동생은 여공, 시다, 캐디 보조 등을 전전하다 건달인 뽀빠이의 애를 낳고 지금 외촌동에 있는 것이다. 윤지노는 외촌동행 버스 속에서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뽀빠이를 보게 되고, 무허가 판잣집에 있는 동생을 만나나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정여철의 집으로 간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없었다. 밤새 술집에서 뽀빠이와 술을 마시다 그가 잠들자 윤지노는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윤지노는 자기가 이기적이고 소심한 인생을 살아왔으며, 세상에 맞서 용감하게 대처하지 못했음을 반성한다.

 

그는 마치 오랜 동안 정신적으로 노예의 상태에서 빠져 있으면서도 그런 줄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봐야 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막연한 대로 밝고 아름다운 풍경을 자기 스스로 그려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그러한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그는 얼마나 더 옹졸한 인간이 되어 괴팍스러워질 것인가?

 

그는 이윽고 찬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자기가 외촌동 주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쩐지 이곳이야말로 양인 것 같았으며, 어디를 가든지, 무슨 짓을 하고 있든지, 자기가 외촌동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얼마든지 살아 낼 힘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 오백년」, 122~123쪽)

 

윤지노가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외촌동의 모든 사람들은 외촌동을 벗어나고자 했고, 윤지노 그도 마찬가지였다. 교통사고 보상금과 빚으로 서울에서 근근이 상점을 열고 있었고, 외촌동은 결코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 정여철과의 정리를 생각하여 또 뽀빠이와 여동생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담판을 하기 위해 마지못해 돌아왔던 것이었다. 물론 이 두 가지 일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뿐빠이의 토굴 같은 판잣집에서 여동생을 만나서는 여동생의 아픔을 오빠라 해서 건드릴 수 없음을 알았고, 정여철의 가족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외촌동이 삶의 벼랑과 같은 곳이어서 더 물러설 데가 없는, 그래서 새로운 삶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중략)

 

4

「밤길의 사람들」은 1980년대 박태순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환상을 찾아서」의 광득이가 세상편력을 끝내고 다시 4.19의 시위현장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차이는 적지 않다. “학생이 민주화하던 4.19 시절 지난 거고, 노동자가 민주화하는 세상이 된 거예요"라는 여주인공 조애실의 말처럼 시위에 나선 거리의 사람들이 달랐다. 4.19 때의 광득이가 1987년 6월에 노동자의 모습으로 거리에 등장하기까지는 그의 긴 민중세계로의 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온 작가정신의 편력 그것이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작품의 주인공 서춘환과 조애실은 외촌동 사람들의 후예이다. 서른한 살의 노총각 서춘환은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밑바닥 막노동자로 전전하다가 사우디에 갔다 왔으나 적립했던 돈은 사기를 당하고 현재는 막상 이 방값조차 두 달이나 밀려 있는 실업자이다. 그러니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위치만 서울 시내이지 저 외촌동의 뿌리뽑힌 인간들과 다를 게 없다. 스물여덟 살의 조애실 역시 관악산 기슭의 난민촌에서 자취을 얻어 살고 있다. 16세 때부터 노동자였으니 이제 그 방면에서는 은퇴할 나이이다. 시골에 돈 보내고 살아가느라고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되어 이제는 시집이나 갈까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서춘환과 차이가 있다면 조직노동자 생활할을 하여 의식이 좀더 깨어 있는 점이다.

 

두 사람이 6월항쟁이 벌어지고 있는 영등포에서 결혼 탐색을 위해 두 번째 만나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밤늦은 시간까지의 대화에서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지 못하고 마는데, 그 뒤 서춘환이 다시 만나자고 제의한다. 그날이 6월 10일이었다. 작가는 「무너진 극장」에서 그러했듯이 6월 10일 하루를 꼼꼼히 추적하고 있다. 서춘환은 조애실과 약속을 하고 빌려 준 돈, 떼인 돈, 밀린 임금 등을 받기 위해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 약속장소인 서울역으로 나간다.

 

그러나 조에실은 옛날 같은 직장의 노동자들과 만나 시위에 참가하여 결국에는 명동성당 농성에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조애실을 만나 결혼을 제의하고자 하는 서춘환은 하루 종일 조애실을 찾아 시위현장을 따라다닌다. 이날이 지난 다음에는 그는 밤이면 명동성당을 찾아가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서춘환의 눈으로 6월 항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그 중에는 저 「무너진 극장」에서 그려낸 무질서로의 해방의 1980년대식 모습이 들어 있어 홍미롭다.

 

명동은 시민들의 해방공간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커다란 삼태기에 콩을 잔뜩 담아 까불리기를 하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였다. 병신춤, 배꼽춤을 추듯이 하는 사람들. 문자 그대로 길길이 날뛰고들 있는 사람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열나게 외쳐 대고 있는 청춘들. 더욱이 처녀애들, 온 길바닥이 난장판이었다. 판화에 벽화에 소자보에 유인물에 지저분하기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람의 피, 그 혈서를 연상시킬 만큼 붉은 색깔로 무어라 무어라 써놓은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 놓고 싸돌아다니는 코미디언 같은 청년, 비싸게 사 입었을 남방샤쓰에 개발쇠발 과격구호를 그려 놓고 있는 아가씨, 미친 듯이 호루라기를 불어 대는 인간, 그런가 하면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 공부라도 하는 것일까.

 

형형색색의 헝겊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술을 달고 거드럭거리는 녀석, 그 모든 인종들이 살판났다고 설쳐 대는 중이었다. ..(중략)· 그야말로 병신 꼴값들을 하는 것이었으며 놀랄노자(字)의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 혼란, 무질서가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시간은 고장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해방을 구가하고 있었다. (「밤길의 사람들」)

 

「무너진 극장」에서 파괴에의 몰두를 통해 해방을 구가한 것에 비교해 보면 해방공간 명동의 모습은 한바탕 놀이판이었다. 이것은 명동성당 안의 농성자들을 위해 밤만 되면 시민들이 모여들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으로 연장되는데, 그것은 곧 강강수월래나 술래잡기, 집뺏기놀이 같았던 것이다. 물론 4.19 때와 마찬가지로 물리적 충돌과 고귀한 희생이 뒤따랐고 팽팽한 긴장과 위기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파괴로 이어진 광기는 없었고, 일상적 인간들 모두가 밤길의 사람들이 되어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하나의 축제로 이어갔다. 대중들은 소극적 일상인이기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역사적인 삶을 열어 나갔던 것이다. 이 흐름 속에 조직노동자 운동에서 물러나 맥없는 일상인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조애실은 다시 운동의 현장에 복귀하게 되고 애당초 현실운동에는 관심이 없었던 서춘환은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망가져 가던 두 사람이 결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싱싱한 시대성과 역사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그런 이 작품은 박태순 문학의 새로운 도달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4.19의 진행은 외촌동이나 탄광촌과 같은 우리 사회의 저층을 통과하여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 간 것이다. 「무너진 극장」에서는 극장을 파괴해 버리고는 새로운 극과 무대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막연히 그리고 있었음에 비해 여기서는 서울의 거리를 하나의 새로운 무대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조애실이 명동성당 안에서 확보했던 '작은 세상',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되지는 않았고 그 점에서 4.19의 미완성은 지속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차이는 매우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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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거니와 박태순은 작가의 사회적 책무와 위상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해 온 작가이다. 「3.1절」은 바로 그러한 문제를 다룬 것이기도 하거니와 작가는 작품집을 묶어 낼 때마다 작가로서의 자신의 발자취를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거나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보여 준 바 있다. 예컨대 1989년에 30년 동안의 작업을 10년 단위로 정리한 자선집(自選集)「낯선 거리」의 서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학은 자기 시대에 대한 전투를 나름대로 전개하여야 한다. 타락한 사회에서의 진실이라는 것이 그 전투의 결과로 얻어지는바, 창작작품은 곧 타락한 사회와의 전투를 중단하지 아니하는 문학정신의 요청에 의해서만 그 진실을 보급받게 하는 것임을 안다.

 

이처럼 박태순은 진정한 삶을 위한 문학을 일관되게 추구해 온 셈데, 독자 대중에 영합하기만 하고 그들을 정서적 감동과 지적 깨달음으로 고양시키는 작품이 갈수록 줄어드는 오늘날 상황에서 그의 작업은 더욱 소중하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