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등뒤의 살의」 고원정 (2019.11.14)

푸레택 2019. 11. 14. 23:09

 

 

 

● 등뒤의 살의 (殺意) / 고원정

 

교관은 교장을 천천히 가로질러 왔다. 예비군 교육쯤은 이제 이력이 났다는 듯 방심한 얼굴을 하고, 까맣게 윤이 나는 지시봉으로 허벅지를 탁탁 두들기면서. 대열 앞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조교 두 명이 잽싸게 복장을 추스르며 몸을 굳혔다. 그래도 대열 속의 웅성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담배 연기와 온갖 잡담들이 들끓어 대는 속에 바글거리는 뒤통수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더할 수 없이 편안했다. 앞의 두 시간 교육이 끝난 다음 화장실에서 어물어물 시간을 끌며 조교의 재촉에 늑장을 부린 덕분에, 맨 뒷줄에 슬쩍 끼여 앉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내 뒤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교관은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출현에 조금도 경의를 표하지 않는 피교육자들을 조용히 웃으면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그가 강조하고 싶은 그대로, 신출내기의 그것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담뱃불들이 꺼지고, 웃음 소리와 말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잦아들었다.

"조교,"

부드러웠지만 깊은 올림을 숨긴 목소리였다.

"교수대를 저어쪽에다 설치해라."

지시봉이 내 쪽을 가리켰다. 에이 하는 소리가 물결처럼 일어 나를 흔들었다.

교관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분위기를 바꿔 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요."

곧 교수대와 흑판은 전시간의 반대편인 내 등뒤로 옮겨졌고, 모두들 조교의 구령에 따라 돌아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 자리는 맨 앞이었다.

 

"자, 바싹들 당겨 앉으세요."

교관의 말과는 달리 어물어물 한치라도 물러앉으려는 내 허리께를 뒷사람의 구부린 정강이가 지그시 밀어 왔다. 좌우의 사내들도 나를 향해 조여들어 왔다. 잔뜩 움츠러드는 나의 자리는 별수없이 맨 앞의 가운데였다. 무어라 꼬집을 수 없는 불길한 예감으로 나는 땀이 밴 손바닥을 문질렀다. 줄을 잘 세운 바지와 반질거리는 군화 코가 눈앞에 있었다. 언젠가 한번 왔던 곳에 다시 와서,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교관이 무어라 얘기를 시작했지만 내 귀엔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뿐, 분간해 들을 수가 없었다.

 

오승은, 그 친구는 어디 앉아 있을까

맥없이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 놀라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내가 꼭 승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비슷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알아들을 수 없는 교관의 목소리는 느릿느릿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조심스레 주위를 곁눈질해 보니, 벌써 가랑이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그렇지... 나는 속으로 끄덕였다. 자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고개를 떨구고 무릎을 싸안으면서 눈을 감았다.

 

(중략)

 

교관이 무어라고 소리를 지른 것과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홱 몸을 돌리자, 다시 얼굴들의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움켜쥔 내 주먹에는 돌멩이들이 가득 잡혀 있었다. 교관이 계속해서 고함을 쳤지만 내겐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나를 쳐다보는 얼굴들은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그 속으로 한 걸음을 떼어놓았다. 기적의 바닷물처럼 대열은 반으로 갈라졌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천천히 힘주어 내디뎠다. 가슴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떨리지도 않았다. 결코 나를 놓아 주는 법이 없던 살기의 한가운데를 나는 거침없이 걸어 나아갔다. 그 길은 끝도 없이 길었다. 그래도 나는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한 발, 또 한 발…

 

이윽고 나는 대열의 끝에 이르렀다. 몸을 돌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편안히 주저앉았다.

내 자리야......

이제야 내 발로 내 자리를 찾은 것이었다. 나른한 피로가 온몸을 감싸고, 나는 기분좋게 눈을 감았다.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앞으로.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나 와!

안 돼.

 

눈을 떴다.

순간, 나는 꺅 하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섭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니까 내가 앉은 자리는 여전히 맨 앞이었다.

"안 돼!"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 나는 두 손 가득한 돌멩이들을 뿌리듯 내던졌다. 땅바닥을 기면서 긁어서는 던지고 또 긁어서는 던졌다. 그래도 살기어린 얼굴들의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열 손가락을 세워 메마른 땅을 긁고 또 긁었다.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면서 대열 속으로 대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얼굴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나를 앞에 두고, 내가 파고드는 그만큼씩 정확하게 물러나는 대열을 향해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리고 또 날렸다. 다시는, 앞으로 밀려날 수 없었다.

(「비둘기는 집으로 돌아온다」, 고려원, 1881)

 

●권력의 추상화의 희화화 / 문홍술(문학평론가)

 

권력은 국가나 중앙집권적인 구조에만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 다층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힘의 그물망이다. 그러한 권력은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결정체가 아니라, 인간 의지와 그 신체를 세밀한 부분까지 통제하는 전략이다. 인간은 권력과의 관계·자리에 의해 구성되고 그 기능이 변하는 '기호'일 뿐이다.

 

권력이 이처럼 인간의 자율의지를 조종하는 전략적 핵심요소로 부상하기 시작한 시기는 근대 이후이다. 푸코(M. Foucault)가 『감시와 처벌」에서 간파했듯이, 근대는 모든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권력이 씨줄과 날줄을 이루면서 유폐적인 그물망을 형성하고 구성원들의 일상의 세밀한 부분까지 지배하고 조작한다. 마치 원형감옥처럼, 사회구성원을 감방에 수감한 채 그들을 감옥의 제도에 맞도록 길들이고 조작한다. 구성원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권력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율적으로 행위한다 생각하지만, 실상 유폐적 그물망을 이루고 있는 각종 장치와 규율에 의해 원형감옥이 정한 틀에 꿰맞추어진다. 틀에 길들여지지 않는 구성원들은 처벌받고 유폐된다.

 

근대 이후의 권력은 이처럼 구성원을 억압하고 길들이는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 권력의 이러한 보편적인 특질 아래 특수자로서 이 여러 권력형태가 연결되어 있다.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권력구조, 그중 10월 유신과 5월의 광주로 상징되는 시기의 권력구조는 군사독재라는 또 다른 폭압성이 가미되면서 가히 가공할 만한 광폭성을 노출한다. 고원정 소설은 광기어린 권력이 지배하던 1980년대에 권력의 횡포와 그 구성원의 운명에 대한 문제를 들고 등장한 이후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오고 있다.

 

'정치적 허무주의' 혹은 '개인주의적 허무주의'로 명명되는 고원정 문학은 권력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권력에 대한 이러한 혐오감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다. 첫째 「등뒤의 살의」에서 보듯, 유년기의 개인적인 체험적 상처와 관련이 있다. 일등의 자리인 반장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친구의 답안지를 변조시켰던 국민학교 시절, 그로 인해 입게 된 정신적 외상 때문에 조회시간에 맨 첫줄에 서서 뒤통수가 뚫어질 것만 같은 아픔을 겪는다. 그 아픔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지속되는데, 그러한 정신적 외상에서 혐오감은 일차적으로 촉발된다.

 

둘째 고원정의 작품 전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배한 폭압적인 군사독재정권이라는 한국의 파행적인 권력구조를 들 수 있다. 실상 국민학교 교실에서 반장이라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답안지를 변조시키는 행위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보다 거시적이면서 파행적인 권력 구조에 의해 길들여진 부산물에 해당된다. 파행적인 한국의 권력구조와 유년기의 외상이 작가정신에 결합되면서 권력에 대한 혐오감이라는 고원정 문학의 뼈대가 구축된다.

 

(중략)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원정의 권력 혐오감이 1970~1980년대의 한국의 권력구조와 그로부터 잉태된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면서도, 그의 작품에는 한국의 권력과 관련된 특수한 현실이 거의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권력구조를 매개하지 않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추상화하여 권력일반으로 비약시킨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에서 한국적 특수현실은 회석화된다. 대신 개별적인 체험의 영역과 추상화된 권력의 영역이라는 두 축이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개별적 체험의 영역이 강조된 작품이 「등뒤의 살의」이고 추상화의 영역이 강조된 작품이 「거인의 잠」, 「칼 1」 등이다.

 

「거인의 잠」은 백인 지배하의 혹인 식민지라는 추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민족해방 투쟁전선에서 테러로 항거하는 과격파와 백인 지배 아래서의 흑인 지위 향상을 꾀하는 온건파라는 두 그룹이 있다. ㄷ파벌의 반목과 질시는 독립 이후에도 이어져 내전이 30년간이나 계속된다. 그 동안 승자의 위치가 여러 번 바뀌다가, 최후의 승자는 오건파의 우두머리인 흰 수염이 되고 과격파의 우두머리인 검은 수염은 처형당한다. 그러나 흰 수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패자인 검은수염을 닮은 사람들을 무대에 올려 죽이는 끔찍한 연극에 몰두하고 마침내는 발작한다. 이 작품은 권력쟁탈을 두고 벌어지는 복수심과 증오심에 기초한 광기어린 폭력을 제3세계라는 추상적인 무대를 통해 묘과하고 있다.

 

「칼 l」 역시 기독교도의 지배 아래 그들과 맞서 싸우는 회교도 국가라는 추상적인 공간을 무대로 하여 권력 이면에 감추어진 추악한 측면을 폭로하고 있다. 회교도 전사인 이브라힘 알 무사는 조직 내에서 'K17로 기호화된 '회교 혁명의 순혈아'이다. 그는 종교와 혁명의 순수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의 가슴에서 뽑은 한 자루의 칼의 빛을 좇는 절대의 삶을 산다. 그는 그 칼로 기독교도의 수상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잠입하지만, 이때 기독교도와 회교도가 평화라는 미명 아래 타협한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그의 일가족을 학살한 장본인들이 기독교도들이 아니라 그의 동료인 회교도들이며, 그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조작된 만행임을 알게 된다. 권력의 이면에 내재된 폭력성을 깨닫지 못하고 겉으로 내세운 허울 좋은 명분에 휩쏠렸던 그는 결국 권력에 의해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성스러운 싸움에 던져진 도구'로서의 기호 'KI7'에 불과하다.

 

이저럼 추상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폭압적인 권력 역시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권력의 추상화는 역사의 추상화를 동반한다.

 

(중략)

 

여기서 역사는 특수자로서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일제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을 거쳐 저 먼 신라시대로까지 소급· 확장된 역사이다. 그것은 특수자로서의 역사가 갖는 질적 편차를 무시한 추상화된 역사개념이다. 특수자로서의 한국 권력구조를 매개하지 않고 추상적인 권력으로 비약한 것과 추상적인 역사개념으로 비약한 것은 일맥상통한다. 이 추상화된 역사와 권력에 대한 혐오감에 고원정 소설이 자리잡고 있다. 추상화의 자리에 근대 이후 파행적인 한국의 특수 역사와 특수권력에 대한 질적 천착이 스며들 틈은 없다. 다만 어느 시대이든 피상적으로 관찰된 추상적인 역사와 추상적인 권력만이 있고, 그 모두는 동일하게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자리잡는다.

 

역사의 추상화와 더불어 추상화된 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낼 때, 그리곤 대항권력이 부재할 때, 혐오스러운 권력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부재한다. 만약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권력을 매개한 보편자로서의 근대 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면, 일체의 권력을 부정한 자리에서도 도달해야 할 어떤 유토피아적인 대상을 근대 역사 자체 내 혹은 근대 이전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통해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유토피아적인 대상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로 나아간다면 고원정의 소설은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중략)

 

고원정 문학이 개별적 체험과 추상화라는 두 영역 사이에 자리잡고 그 나름의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종합적인 지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종합적인 지양에 이르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역사와 그 권력에 대한 천착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고원정의 소설이 깊은 울림을 갖기 위해 나아갈 자리는 특수자를 매개로 하여 개별자와 보편자가 지양된 곳일 것이다. 특수자를 매개하지 않는 보편자는 추상적일 뿐이다. 미학적 범주에서, 그런 추상화는 알레고리보다 질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보편적인 것의 특수한 것으로의 전이 속에 알레고리가 존재한다'는 괴테의 지적은 적어도 고원정 문학에서는 강조되어야 한다. 그의 데뷔작 「거인의 잠」이 '알레고리적'인 추상화의 영역에서 출발하였기에 그의 소설적 완성도는 특수보편자라는 '알레고리' 본연의 미학을 달성하는 정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원정 문학은 특수자로서의 한국의 역사와 권력을 질적으로 깊이 있게 파악하기보다는 표층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개별적 체험과 추상적 영역을 상호분리시킨다. 여기에 폭력적인 권력과 그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개인이라는 작품구조가 반복되면서 그의 작품은 도식성을 띠게 된다. 추상화는 관념전달에는 유효하다. 그러나 그것이 특수보편자라는 알레고리 본연의 범주로 질적 이행을 하지 못한 채 그 상태에서 반복되면서 도식성을 지나치게 띠게 될 때, 소설은 삶의 구체적인 토양에 그 뿌리를 깊게 내린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닌 인위적인 알루미늄 나무를 대하는 느낌을 준다. 살아 있는 나무는 항상 신선감을 준다. 반면 조화류의 나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고원정의 소설이 계속 우리에게 신선감을 주기 위해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씌어지는 소설이어야 하며, 그런 소설은 관념에 구체적인 삶이 용해될 때이며, 그럴 때 소설은 풍성한 나뭇잎을 드리우고 우리를 그 세계 속으로 이끌 것이다. 광기어린 권력에 대한 비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함에 있어서 획일적인 창작방법이 지배적이던 1980년대에 '알레고리적'인 창작방법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들고 나온 고원정이 190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그 소설사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추상화와 희화화에 입각한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특수보편자라는 '알레고리' 본연의 미학으로 상승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