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적도기단」 박상우 (2019.11.09)

푸레택 2019. 11. 9. 21:50

 

 

 

● 적도기단 / 박상우

 

영혼이 무기력해지는 적도기단,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시를 쓰지 못한다.

 

1

대기하라.......

오전 아홉시경에 그들에게 구두로 전해진 명령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언제까지, 어떤 식으로 대기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는 애초부터 없었다. 참으로 막연한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명령이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하달되어진 것인지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분명한 사실은 단지 그것이 명령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대기하고 있던 그 두 시간 동안, 그들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열한시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기별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그 명령이 잘못 전달되어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설령 제대로 된 전달이었다 할지라도, 그 명령에 사용되어진 어휘만은 분명 잘못 택해진 것임을 그들은 서로에게서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어휘 선택이 아무리 잘못되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명령이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대기하라는 게 정확하게는 무슨 뜻이죠?"

일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회를 기다린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상병이 기계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잘못된 거예요. 기회를 기다리라니,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무슨 기회가 있을라구요. 안 그런가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일병이 상병을 올려다 보았다.

"처음부터 어차피 말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상병은 더욱더 무표정한 얼굴로 침상 끝에 걸터 앉은 일병을 내려다 보았다. 내무반 한가운데 미동도 않고 버티고 선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그 어떤 세상사에 대해서도 더 이상은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그것처럼 지극히 태연해 보였다.

"결국 우리는 기회를 박탈당한 인간들인가요?"

일병이 겁먹은 눈빛으로 상병을 올려다보았다. 기회를 되찾을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전혀 없겠느냐, 요컨대 그런 애원의 빛이 그 검은 눈망울 속에서는 가득히 출렁이고 있었다.

"경험이라고 생각해."

상병의 말은 더할 나위 없이 담담했다.

대가가 너무 큰 경험이라는 데 문제가 있어요."

일병이 울상을 지으며 대꾸했다.

대가가 큰 만큼 얻는 것도 있겠지."

문득 고개를 쳐들며 상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이건 도대체......

"됐어. 그만두자"

말을 마치고 나서 상병은 침상 끝에다 엉덩이를 붙였다. 진력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밑도끝도 없는 대기생활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실 진력이 나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었다.

 

(중략)

 

일병이 죽은 다음날 아침, 상병은 곧바로 입창되었다. 일병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입창 명령을 이행하라는 또 다른 명령이 기어이는 하달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영창으로 이송되면서 상병은 비로소 일병의 죽음이 명령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명령에서 벗어난 자아,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의지가 그 죽음의 의미 속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는 자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적 의지를 그가 끝끝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무화시켜 버림으로써, 오히려 그런 선택적 의지를 역으로 강요하는 듯한 광망(狂妄)한 현실 속에 그 자신이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 년 내내 변하지 않는 기후처럼, 열독(熱毒)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끔찍스런 폭양의 계절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세계사, 1994)

 

* 적도기단: 적도지방에서 생기는 공기 뭉치. 열대기단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임.

 

☆ 박상우 소설가

1958년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

춘천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제23회 이상문학상(1999)

제12회 동리문학상(2009)

 

☆ 삶과 역사의 미분(微分)으로서의 소설 /강상희(문학평론가)

 

「적도기단」은 명령의 체계로 존립하는 "차갑고 견고한 수직" 사회 군대를 배경으로 하여 일병과 상병이 겪게 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전말을 그리고 있다. 수직사회에서 "바다"와 “수평”을 그리워하는 두 인물이 처하게 될 결말이 비극적일 것임은 이미 이 작품의 갈등 양상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권위와 명령의 회생물이 되는 두 인물이 처한 수직의 상황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적도기단"과 같은 곳이며, 그곳에서는 "영혼이 무기력해지”고 “어느 누구도 시를 쓰지 못 한다." 그 태양의 열기는 종국에는 인간의 이성을 증발시키고 오로지 이성의 그림자에 불과한 “속성과 맹점”만을 남겨 놓는다. 한계 상황과도 같은 이곳에서 반성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이 두 인물뿐이다. 속 깊은 내면성(Innerichkeit)으로 자신을 정립할 수 있는 이 두 인물 외 다른 인물과 체계는 대단히 불합리하고 맹목적이다. 대조적인 인물군의 설정은 이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하지만, 이분법의 단순 논리로 조망됨으로써 그 기여의 의의를 삭감하고 있다.

 

"명령의 권위에 대한 집착심 때문에 그들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걸 여물처럼 씹고 또 씹고, 그리고 되새김질까지 하면서 말이지."

"한심하군요."

"한심하다는 걸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나는 거지"

푸우, 말을 마치고 나서 상병은 날숨을 한껏 길게 내뿜었다.

“저는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그들이 제정신을 차릴 줄 알았어요." (「적도기단」, 398쪽)

 

두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는 이들의 존재론적 지위가 이중적인 것임을 알려 준다. 이들은 '명령과 권위'의 수직체계에서 현실적으로 억압당하는 인물들이지만, 그 체계의 '한심함'을 판정할 수 있는 도덕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판정은 대단히 단정적이다.

"속성과 맹점, 그런 게 힘이 된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하기야 뭐, 그런 힘이 세상을 뒤집기도 하는 세상이니까 더 이상 말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겠지만, 그래도 난 그 힘의 본질이 이토록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일 줄은 정말이지 꿈에서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직도기단」, 398쪽)

 

어쩌다 병이 나서 의무대로 찾아가 본 사병들은 그들(의무대의 사병 : 인용자)이 그곳에서 군의관보다 더욱 거만하게 행세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주구(走狗)들이었다. 같은 제복이면서도 다른 제복들과 분명하게 구별되지 못해 기를 쓰고 버둥거리는 그들을 향해, 그래서 많은 사병들은 말했다. 우리는 땅개지만 저 새끼들은 똥개라고. (「적도기단」, 401~402쪽)

 

이 두 인용문의 표현처럼 '주구'들을 만들어 내는 수직의 체계는 '속성과 맹점'을 동력(動力)으로 하여 운동하는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체계이다.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체계는, 두 인물의 것인 관념의 순수함과 대비되지만, 그 대비의 융합은 이 작품에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체계는 현실적으로 '속성과 맹점'이라는 견고한 수직의 운동을 결코 벗어날 수 없고, 수직의 운동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이성"과 “정의"를 말하는 두 인물의 생각은 지극히 사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적도기단」이 소재와 서술의 구체성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이 한다면, 그 이유는 이것이다. 이 작품의 의도가 '체계와 개인'의 권력관계라는 문제를 일종의 알레고리를 통해 계시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읽혀지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적도기단」에서 파악된 체계의 속성은 박상우의 여러 작품들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의 여러 작품들, 특히 이곳에 수록된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실존의 일그러짐은 바로 그 혼적으로부터 말미암은 것들이다. 「적도기단」에서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는 옷을 벗고 정치를 해. 기상시간부터 취침시간까지, 오로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으라는 말만을 끝없이 되풀이하던 그런 사람들이 말야"라고 했던 상병의 말처럼, 이제 실존에 치유하기 힘든 고통과 상처를 주는 것은 그 체계의 속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정치'라는 종자이다.

 

이른바 '정치적 상상력'과는 그 밀도를 달리하는 '정치의 미분력'은 단편 「돌아오지 않는 시인을 위한 심야의 허밍코러스」로부터 최근작인 「노란 잠수함」까지를 이어 주는 궤도를 형성한다. 그의 작품들이 보여 주는 이 궤도를 따라가다 보면 작품의 세계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국면들이 정확하게 일대일 대응을 이루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돌아오지 않는 시인을 위한 심야의 허밍코러스」는 「적도기단」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발표된 작품이지만 「적도기단」에 표출된 바 있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중략)

 

박상우의 작품세계는 그 양이나 질실로 보아 완결되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저간에 발표된 그의 작품들이 보여 준 행로만큼은 어느 정도의 완결성을 띠고 있다. 그 완결성은 대단히 솔직하고 감각적이지만, 그만큼 위험스러운 면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이제 극단으로 내몰린 개인을 어떻게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문제인 동시에 작가 박상우에게는 절대절명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여전히 삶과 역사의 미분인가? 아니면 해체되어 떨어져 나간 개체들의 적분(積分)인가? 필요한 것은 해체의 추인인가, 해체에 대한 냉엄한 질타인가? 이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문제 제기자인 박상우의 작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분명 우리는 행복한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

 

☆ 박상우 소설가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교사를 그만두고 문단에 데뷔해 작가로 본격 전업했다. 1991년 김춘수 시인의『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차용한 동명의 소설이 주목을 받았으며, 1990년대 작가군의 선두주자로 활동하며 『독산동 천사의 시』, 『호텔 캘리포니아』, 『사랑보다 낯선』,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가시면류관 초상』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99년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직후부터는 10년 동안 침잠의 세월을 보내며 작가와 소설, 그리고 인생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탐구와 내적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재개하여 소설집 『인형의 마을』과 10년 침잠의 궤적을 담은 산문집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작가 인생 20년을 넘어서면서 행간 속에 파묻혀버린 작가의 실체를 작가 공간과 창작 공간을 통해 끄집어 낸 『작가』를 출간했다. 2009년에는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