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역사산책]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한 곳 남산 '기억의 터',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2019.08.28)

푸레택 2019. 8. 28. 14:43

 

 

 

 

 

 

 

 

 

 

 

 

 

 

 

 

 

 

 

 

 

 

 

 

 

 

 

 

 

 

 

 

 

 

 

 

 

 

 

●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한여름 불볕 더위가 한풀 꺾인 지난 8월 18일 일요일 오후,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남산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를 찾았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만나 명동성당을 둘러본 후 남산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가 보이고 왼쪽 길로 접어드니 바로 '기억의 터'가 나타난다.

'기억의 터'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기리고 그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추모 공간으로 19,755명의 시민 기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억의 터는 '위안부' 문제가 단지 피해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사임을 인식하고 알리고 해결하기 위해 2016년 8월 29일 서울 중구 남산공원 옛 통감관저터에 조성되었다.

통감관저터는 일제 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민족반역자 총리대신 이완용이 3대 통감 데라우치와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8월 29일 조칙이 시행되면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 1906년 설치된 통감관저는 1910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관저로 쓰였으며 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이다.

2006년 통감관저터를 발견한 이후 꾸준히 비(碑)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는데 2010년이 되어서야 통감관저터 비석이 세워졌다고 한다. 아직도 우리 주변 곳곳에는 무늬만 한국 사람인 토착왜구들과 친일파들이 득실거린다. 그들은 끊임없이 거짓 언어로 가짜뉴스를 만들고 퍼뜨려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우리나라 정부를 공격한다. 매국노* 친일파들은 일본인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고 일본을 편들고 우리의 민족정기를 흐리게 한다.

기억의 터에는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어 눈길을 끈다. 1905년 일본은 고종과 신하들을 겁박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게 한다. 이때 공을 세운 하야시 곤스케라는 사람의 동상을 당시 통감관저에 건립하였는데 해방 후 그 동상은 부숴버렸다. 2006년 통감관저터를 찾아냈고 그곳에 묻혀 있던 하야시 곤스케 동상 받침대 잔해를 발견하여 보관해 오다가 기억의 터를 조성할 때 그때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거꾸로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곳 '기억의 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름과 함께 시기별 증언들이 새겨져 있다. 또한 故 김순덕 할머님의 작품 '끌려감'이 함께 새겨져 있어 아픈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어느 피해자 할머니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대지의 눈' 비석에는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해 우린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새겨져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억의 터'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옹벽에 세계인권선언문이 붙어있다. 세계 인권 선언문의 30개 조항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간결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보여 준다. 조금더 걸어 올라가니 남산창작센터가 나온다. 그곳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남산골 한옥마을로 들어섰다. 1994년에 조성된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을 잠시 둘러본 후 우리들은 백범김구기념관과 이봉창 의사 동상이 있는 효창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매국노(賣國奴): 사리사욕을 위하여 남의 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는 사람
* 김익상(金益相): 1921년 조선총독부 투탄, 1922년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을 저격한 독립운동가

 

/ 2019.08.28(수) 김영택 씀

서울시는 한일병탄조약 공포 국치일인 8월 29일에 남산 예장자락에 약 1.7㎞에 이르는 '국치길' 조성을 마치고 개막식을 연다고 한다. 이 길은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된 통감관저터에서 시작한다. 1906년 설치된 통감관저는 1910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서울애니메이션 센터는 통감부 터였다. 통감부는 강제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로 쓰였으며, 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이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경복궁 새 청사로 옮겼으며, 남산에 있던 옛 총독부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남산 '국치의 길'은 통감관저 터부터 시작한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의 데라우치 통감과 이곳에서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했다. 그 일주일 후인 8월 29일부터 조약이 발효되면서 대한제국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통감관저 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뜻으로 ‘기억의 터’를 조성해 ‘조선통감관저 터’임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이 관저로 사용되던 무렵 세워진 을사늑약 당시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 동상의 기단부를 거꾸로 세워놓은 동상도 역사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세워졌다.
ㅡ Daum 뉴스기사 참고 발췌 2019.08.28

☆ 독립운동가 김익상(金益相) 의사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로 근무하다가 상경하여, 광성연초공사(廣成煙草公司) 기계감독을 지냈다. 1920년 펑톈[奉天] 지점으로 옮긴 뒤 비행사가 되기 위해 광둥[廣東]으로 갔으나, 중국 내의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비행학교가 폐교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뒤 항일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의열단에 가담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1921년 베이징으로부터 폭탄 2개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왔다. 전기수리공을 가장하고 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비서실을 총독실로 잘못 알고 던져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으나, 폭발 뒤의 혼란을 이용하여 무사히 상하이[上海]로 탈출했다. 이어 1922년 상하이 황푸탄[黃浦灘]에서 오성륜 등과 함께 시찰차 중국에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의 암살을 기도했다. 오성륜이 권총으로 쏘았으나 영국인 여인이 끼어들어 실패했고, 그가 던진 폭탄도 불발했다. 도망하다가 죽은 영국 여인의 남편 톰슨이 쏜 총에 맞고 체포되었다. 나가사키[長崎]로 이송된 후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몇 차례에 걸쳐 감형되어 풀려났으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암살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ㅡ Daum 백과사전

● 가짜뉴스 아웃, 가짜뉴스 OUT ~!!! No 일본

가짜뉴스가 어느 한 사람을 난도질하고 있다. 그 난도질 당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면 내 가족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할까? 악의적인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침소봉대하여 나팔을 불고 다니며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이찌 해야 할까? 그렇게 가짜뉴스로 사람을 난도질한 후 가짜뉴스가 가짜로 밝혀져도 가짜뉴스를 만들고 퍼뜨린 자들은 한 마디 사과는 커녕 일말의 양심도 없이 크고 작은 또다른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린다.

지금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순사나 밀정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교묘한 말과 글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마치 자기가 정의의 사도라고 되는 양 사사건건 교묘한 거짓의 언어로 혀를 놀리고 글을 쓴다. 그러면 그 글을 받아 기사로 쓰는 ○레기들이 있다. 그래도 처벌은 없다. 온통 그들의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런 세상이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살기좋은 세상인가? 이런 세상이 과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인가?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는 그런 지옥의 불구덩이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짜뉴스로 거짓의 언어로 남을 난도질한 사람은 뜨거운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런 형벌이 없다면 神도 없는 것이다. 神이시여! 거짓의 언어로 사람을 난도질하는 광기어린 모습으로 광란의 칼춤을 추는 저런 자들을, 저런 사악한 자들을 하이에나 떼와 같은 저런 흉악한 자들을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소서! 신이시여! 신이시여!

무늬만 한국인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그저 농담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 씨앗을 퍼뜨려 일본인의 DNA를 지닌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유리한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DNA 검사를 해 보면 어떨까? 자기 핏속에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확인해 두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 삼인성호(三人成虎)

세 사람이 범을 만들어낸다는 뜻으로, 근거가 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곧이 듣게 된다는 말. 여러 사람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하다. 여러 사람이 유언비어를 말하다.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이라 할찌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참말로 믿게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전국 시대 위나라 방총이 태자를 모시고 조나라 한단으로 인질이 되어 가면서 자기가 없는 동안 왕의 관심이 자기에게서 멀어질까 하여 혜왕을 만나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왕께서는 믿겠습니까?"

"그 말을 누가 믿나?"

"그럼 두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반신반의하겠지."

"이번에 세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을 믿을 것 같다."

총은 말했다.
"시장에는 분명히 호랑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됩니다. 저는 지금 멀리 한단으로 떠납니다. 제가 떠난 후 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셋만은 아닐입니다.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면 믿지 않을 테니 걱정마오."

방총이 출발하고 아직 한단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의 걱정대로 참소가 들어왔다. 이에 혜왕은 약속과는 달리 방총을 의심하게 되었다. 몇 년 뒤 태자는 인질에서 풀려 귀국했지만 방총은 그가 예견한 대로 왕을 만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
출전] 「전국시대 위(魏)나라 혜왕(惠王) 때, 방총이 태자와 함께 인질로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으로 가면서 위혜왕에게 말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지 못하겠지.” “두 사람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믿으십니까?” “역시 믿지 못하겠지.” “여러 사람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과인은 믿게 될 것이오.” 그러자 방총이 말했다.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말한다면 호랑이가 되는 것입니다. 한단은 위나라에서 저잣거리보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이 넘습니다. 왕께서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과인이 스스로 알아서 판단할 것이오.” 방총은 작별인사를 하고 출발했다. 그런데 방총이 한단에 도착하기도 전에 혜왕의 귀에 참언이 먼저 들어왔다. 수년 후 인질에서 풀려난 방총은 한단에서 돌아왔으나 결국 왕을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