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졸작수필] 슬픈 애기똥풀 이야기 (2019.09.04)

푸레택 2019. 9. 4. 22:25

 

 

 

 

● 슬픈 애기똥풀 이야기

 

내가 사는 일산 식사동에는 곳곳에 논이 있다. 봄에 모내기한 벼가 쑥쑥 커가는 모습을 오며가며 지켜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풍산동 밭에는 재배한 고구마를 판매한다는 안내판이 나붙는다. 나는 논과 밭 주위에 자라나는 풀꽃을 살펴보는 즐거움으로 매일 들길을 따라 산책길에 나선다.

 

봄 한철 피어나는 꽃마리와 봄맞이꽃은 꽃도 곱고 귀엽지만 이름도 참 예뻐서 자꾸 불러보고 싶어진다. 함께 피어나는 큰개불알풀은 꽃은 예쁘지만 이름 부르기가 조금 민망하다. 고구마 농사를 짓는 박씨 아저씨에게는 예쁜 별꽃도 꽃다지도 개갓냉이도 쇠비름이나 방동사니처럼 뽑아버려야 할 잡초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개망초꽃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봄부터 피어나던 애기똥풀꽃은 무더기로 피어나 절정을 이룬다. 네 살 재호는 알고 있는 꽃 이름이 민들레밖에 없어서 개망초꽃도 민들레라 하고 애기똥풀꽃도 민들레라 한다. 여섯 살 아윤이는 벌개미취를 코스모스라 하고 루드베키아를 해바라기라 부른다.

 

'가장 재미있게 이름 붙여진 풀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설문 조사를 하면 어느 풀꽃이 대상을 받을까? E여대에서 식물분류학을 가르치는 P교수님이 그 대학 생물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장 잘 붙여진 풀꽃 이름 설문조사를 했더니 '애기똥풀'이 단연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어느 신설 중학교에서 교화를 정할 때 K선생님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아이들에게도 친숙한 '애기똥풀'을 추천하여 개설요원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똥' 자가 들어가는 식물을 교화로 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애기똥풀은 이름에 '똥' 자가 들어가 학교 꽃도 될 수 없는 슬픈 신세가 되었다.

 

'똥' 자가 들어가는 식물은 또 뭐가 있을까? 쥐똥나무도 있고 개똥쑥, 말똥비름, 큰방가지똥도 있다. 개똥벌레, 쇠똥구리, 권정생의 강아지똥! 아, 이건 동물이네. 양귀비과 가문에 황금색 꽃잎, 토속적이고 친근한 이름 애기똥풀을 '애기황금풀'로 개명하면 학교 꽃이 될 수 있을까?

 

나태주 시인은 '무릎걸음으로 앉은뱅이 걸음으로 애기똥풀 꽃들이 처마 밑 물받이 홈통 가까이까지 와 피어 있다. 풀꽃 이름 많이 아는 것이 나라 사랑'이라고 노래했다. 또한 안도현 시인은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라며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새봄이 돌아오면 손주들 데리고 들녘으로 나가서 '애기똥풀' 줄기를 살짝 꺾어 노란 아기 똥을 보여주어야겠다. 그리고 강아지똥이 거름이 되어 민들레꽃을 피우게 했다는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 이야기도 들려주리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쓸모가 있다는 얘기와 함께.

 

시골의 어느 돌담 아래에 홀로 떨어진 강아지똥은 하찮고 냄새나는 존재였어. 봄비가 내리던 날, 강아지똥은 옆에 핀 민들레를 보게 된단다. 민들레는 강아지똥에게 거름이 있어야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알려주지. 강아지똥은 세상 어디에도 쓸모없는 줄 알았던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감격했어. 강아지똥은 빗물을 기꺼이 받아 자신의 몸을 잘게 부수어 노란 민들레꽃을 피우지. 민들레꽃은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희생을 꽃 속에 담아 더욱 노랗게 피어났어.

 

/ 김영택 졸작수필 2019.09.04(수) 수정

 

● 애기똥풀 / 안도현

 

나 서른 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 애기똥풀 2 / 나태주

 

무릎걸음으로

앉은뱅이 걸음으로

애기똥풀 꽃들이 처마 밑

물받이 홈통 가까이까지 와

피어 있다

 

풀꽃 이름

많이 아는 것이

국어 사랑이고

국어 사랑이 나라

사랑이란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애기똥풀 꽃 속에서

동그란 안경을 쓰고

웃고 계셨다

 

● 애기똥풀꽃 / 권달웅

 

꽉 막힌 추석 귀향길이었다

참아온 뒤를 보지 못해

다급해진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골 외진 숲 속에 뛰어들었다

벌건 엉덩이를 까내리자

숲 속에 숨었던 청개구리가 뛰어 올랐다

향기로운 풀내음 속에서

다급한 근심거리를 풀기 위해

혼자 안간힘 쓰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조용해, 저기 사람이 왔어

 

살다보면 삼라만상의 복잡한 일 중

더러운 일 한두 가지가 아닌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처럼

참으로 어려운 건 똥 참는 일이다

참으로 시원한 건 똥 싸는 일이다

숲 속의 노란 애기똥풀꽃이 웃었다

 

● 애기똥풀꽃 / 복효근

 

어디 연꽃만이 연꽃이겠느냐

 

집 뒤꼍 하수로가에

노랗게 핀 애기똥풀꽃 보라

 

어릴적 어머니 말씀

젖 모자라 암죽만 먹고도

애기똥풀 노란 꽃잎같이

똥만은 예쁘게 쌌더니라

 

황하의 탁한 물

암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단다

 

그래 잘 먹는 일보다

잘 싸는 일이 중한 거여

이 세상 아기들아

잘 싸는 일이 잘 사는 일

시궁창 물가에 서서도

앙증스레 꽃 피워 문

애기똥풀 보아라

 

어디 연꽃만이 연꽃이겠느냐

 

● 세상이 다 변해도 너만은 변치마라 / 김현태

 

사랑아,

세상이 다 변해도 너만은 변치마라

 

땅이 단풍에 물들고

하늘이 달빛에 그을려도

사랑아, 너만은 늙지마라

 

애기똥풀 핀 들녘에서

너는 바람으로

나는 잎새로

다시 만난다 해도

첫 눈에 알아볼 수 있게

사랑아, 너만은 멈추어라

 

우리가 죽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작은 씨앗을 심을 테니

사랑아, 너만은 영원하라

 

● 개심사 애기똥풀 / 황인산

 

개심사 들머리 애기똥풀은 모두 옷을 벗고 산다.

솔밭에서 내려온 멧돼지 일가 헤집는 바람에 설사병이 났다.

개중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얼굴 마주보며 괴춤만 내리고 쉬를 하고도 있지만

무리무리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부끄러움도 모른 채 물찌똥을 누고 있다.

사천왕문 추녀 밑에서도 노스님 쉬어 가던 너른 바위 옆에서도

산길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노란 똥물을 갈기고 있다.

부글부글 끓는 배를 옷 속에 감추고 산문을 두드린다.

이 문만 들어서면 아침까지 찌들었던 마음도 애기똥풀 되어 모두 해소될 것 같다.

산 아래서부터 진달래가 산불을 놓아 젊은 비구니 얼굴을 붉게 물들인 지가 언제인데

절집 위 옹달샘 풀숲까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있다.

 

개심사 해우소는 천 길이나 깊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요동치는 배를 잡고 허리띠를 풀며 뛰어 들어갔지만 이런 낭패가 있나,

깊이가 몇 길은 되어 보이는데 얼기설기 판자로 바닥만 엮어 놓고 군데군데 구멍만 뚫어 놓았지

칸막이가 없다. 엉거주춤 볼일 보던 사람, 앉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 것도 아닌 자세로

오줌을 누는 사람들의 시선이 참 어정쩡하다. 몇몇의 눈길이 동지애를 느끼며 같은 자세를

취하길 원하였지만 안사부인 볼일 보는 화장실을 열어본 것처럼 놀라 아랫배를 내밀고

엉덩이에 댄 두 손에 힘을 주고 나왔다.

천 년 전 처음 이곳에 볼일을 본 스님은 자꾸 다시 들어오라 하는 것 같은데

보잘 것 없는 내 아랫도리 하나로 하늘도, 가냘픈 애기똥에 기댄 마음도 옷을 벗지 못한다.

개심사를 감싸고 있는 상왕산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옆 칸에서 나오다 눈길 마주친

젊은 비구니의 얼굴엔 진달래 산불이 다시 옮아 붙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