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로니에공원에서 김상옥(金相玉) 열사(의사)를 추모하다
며칠 전 장맛비가 추적축적 뿌리던 날, 동숭동 대학로 서울대학교 옛터에 자리잡은 마로니에공원을 찾았다. 이곳에는 독립운동가 김상옥 열사(金相玉 烈士)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1998년 건립) 김상옥 열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3·1운동에 참여한 후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행했으며, 친일파를 처단하는 암살단(暗殺團)을 조직해 친일파와 일본인 암살을 꾀하고 상해로 망명해 항일 무력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하였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형사부장 등을 죽였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독립투사들을 체포하고 온갖 고문을 자행하고 탄압하던 본거지였다. 이후 왜경 순사에 포위되어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自決)하였다.
김상옥 열사(金相玉 烈士,1890∼1923) 상에는 님의 높은 뜻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와 겨레가 왜적에 짓밟혀 비굴한 삶을 잇느니 장렬한 의거로 죽음을 택한 대한인(大韓人) 김상옥 열사. 애국의 횃불이 여기 영원히 타오르고 있다. 적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고 떼지은 왜경과 싸우고 또 싸우다 아아 내 조국이여 외쳐 부르며 최후의 일발로 자결 순절하신 거룩한 님의 의거 터에 그 모습을 새겨 세워 높은 공(功)을 기린다.
김상옥 열사가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上海)를 떠나면서 의열단 동지들에게 남긴 다짐의 말이 가슴 뭉클하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아침 7시, 찬 바람.
섣달이 다 가도 볼 수 없던 눈이
정월 들자 내리니 눈바람 차갑던
중학 시절 생각난다.
아침 7시, 찬 바람. 눈 쌓인 들판.
새로 지은 외딴 집 세 채를 에워싸고
두 겹 세 겹 늘어선 왜적의 경관들.
우리의 의열 金相玉 義士를 노리네.
슬프다. 우리의 金 義士는
양손에 육혈포를 꽉 잡은 채, 그만---
아침 7시, 제비
길을 떠났더이다.
새봄이 되오니 제비시여 넋이라도 오소서.
(김 의사의 별명은 제비라 하여 불렀었음)
- 구본웅(具本雄) 화백 유화집(遺畵集)
'허둔기(虛屯記) 1930' 중에서
중학생 시절 마침 이곳을 지나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구본웅 화백이 유화집에 남긴 글이다.당시 김상옥 열사는 제비 같이 날아 신출귀몰(神出鬼沒)한 활동을 한다 하여 '제비'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권총으로 삶을 마감한 아들
주검을 확인하는 어미의 가슴 속에 구멍 하나 뻥 뚫렸다
휑하니 불어오던 그 겨울의 모진 바람 한 자락
뚫린 가슴을 휘젓는다
밥이나 배불리 먹였더라면
공부나 원 없이 시켰더라면
죄인된 어미의 몸뚱이는 이미 주검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 목숨 떨궈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조선인의 투지를 보였으니
너의 죽음이 어찌 헛되랴
이제 눈물을 거두고 의로운 너의 혼에 장한 훈장을 다노라
절규했을 어머니시여
그대 이름 당당한 조선의 어머님이시라
-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 중에서
이윤옥 시인이 아들을 가슴에 묻은 열사의 어머니, 김점순 여사님께 바치는 시(詩)다. 김점순 여사님의 아들 김상옥 열사를 잡기 위해 당시 서울 시내에 총비상령이 내려져 무려 천 명의 일본 경찰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 아들은 천 명의 일본 경찰을 상대로 단신으로 세시간 반 동안 총격적을 벌이며 일경 십수 명을 쓰러뜨렸다. 적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고 왜경에 포위되어 총격전을 벌이다 최후의 일발로 자결(自決) 순절(殉節)하신 김상옥 열사.
문득 40년 전 강원도 양구에서 군생활을 할 때 내가 근무했던 부대의 구호가 생각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외친 당백(當百). 일당백(一當百), 혼자서 능히 적 백 명과 싸워 이긴다는 뜻이다. 한 명의 기병이 천 명을 이긴다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백으로 천 명의 왜적 순사들의 무리들과 싸우다 가신 김상옥 열사의 애국 정신을 본받아 군부대 구호가 일기당천(一騎當千), 당천(當千)이었으면 어땠을까?
김상옥 열사는 1917년 28세 때 영덕철물점에서 일본상품 배척과 민족경제 운동의 일환으로 말총 모자를 제조 판매하였다고 한다. 작금(昨今)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일본제품 불매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이 때 김상옥 열사를 다시금 떠올린다. 일본 여행 안 하기, 일본 제품 안 사기, NO재팬 운동이 더욱 불붙어야 한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시절에 살지 않아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제2의 독립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은 하겠다고 말한다. 이번 사태가 우리 민족의 자긍심(自矜心)과 우월성(優越性)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기회에 누가 일본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찬동을 하는 자들인지, 누가 독립운동가와 애국자·양민들을 겁박하고 탄압을 가했던 자들인지 알려졌으면 좋겠다.
누가 일본 제국의 침략 행위와 식민 지배를 옹호하고, 일본 제국이 주장하였던 조선에 대한 근대화론을 지지하는지, 누가 을사늑약, 한일 강제병합 체결을 정당하다고 하는 자들인지, 누가 일본 우익들의 주장을 옹호하고 대변하며 일본 정부의 한국 내정 간섭과 압박에 대해 지지하는 논조의 말을 하는 토착 왜구(土着 倭寇)들인지도 명확히 드러났으면 좋겠다.
장맛비 오락가락하는 한여름 한낮, 잠시 발걸음 멈추고 한적한 마로니에공원 한쪽에 늠름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 김상옥 열사의 동상을 바라본다. 동상 아랫쪽에 적혀있는 열사의 일대기(一代記)를 읽어보며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를 추모한다. 또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제껏 일본을 너무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봤던 것은 아닌지 자성(自省)의 시간도 가져본다.
대학로에 갈 일이 있다면 마로니에공원에 들러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지신 김상옥 열사의 동상을 찾아가 보자. 그의 숭고한 삶과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그의 높은 공(功)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 보자.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억하자.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 김영택 2019.08.02(금) 씀
● 김상옥 열사의 일대기(一代記)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발췌
김상옥(金相玉) 열사는 1889년 1월 5일 서울 동대문 안 한성 동부 건덕방(健德坊) 어의동(於義洞, 현 종로구 효제동)에서 부친 김해 김씨 안경공(安敬公) 영정파(永貞派)인 귀현(貴鉉)과 모친 경주 김씨 점순(点順)의 3남 1녀 중 2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는 한지이다. 부친 김귀현은 구한국 군인이었으나 한말의 격동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퇴직하여 곡식가루의 불순물을 거르는 체를 만드는 가내 제작소를 시작했다.
김상옥은 1897년 8세경부터 말총으로 체의 얼개미를 만드는 쳇불노동을 시작했다. 당시 집안사정은 몹시 어려웠다. 1903년 14세에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대장간 이지호 노인에게 한문을 배웠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최초로 나간 교회는 연동교회로 보이나, 1905년경부터는 동대문교회로 옮기고, 밤에는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학교 안에 별도로 설치된 신군야학에서 배움에의 목마름을 달랬다.
김상옥은 동흥야학을 만들어 불우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면서 자신도 공부했다. 1910년 21세 때 미국유학의 꿈을 품고 황성기독교청년회관(YMCA) 부설 야간 영어반에 등록하여 낮에는 대장간에서 노동을, 밤에는 영어 공부를 했다. 대장간에서의 힘든 노동은 그의 체력을 단련시켰다. 이듬해 기독교청년회관 체육교사 이필주의 지도하에 청년부장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고등보통학교나 전문학교 학생들과 많은 친분을 갖게 되어 후일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는 기반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상옥은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가기 위해 일을 마치면 집으로 가서 선채로 서둘러 밥 한 술 뜨고 책보를 들고 달려서 학교로 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1911년 22세 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동대문교회 근처에서 기독교 서점을 운영했다. 그러나 서점은 경영난으로 1년 정도로 폐업하고, 1912년 5월부터 10월까지 권서인(勸書人)으로서 삼남지방을 돌며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는 한편 매약 행상을 겸했다. 이 시기에 훗날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와 암살단 동지가 되는 한훈을 만났고, 매약 행상으로 철물점을 개업할 밑천을 마련했다.
1912년 23세에 동대문 앞 창신동 신작로 변에 형 김춘옥(金春玉), 동생 김춘원(金春園)과 함께 영덕철물점을 열었다. 1913년 24세 때 경북 풍기에서 대한광복회가 결성될 때 채기중, 한훈과 함께 참여했다. 그해 10월 동대문교회에서 정진주와 결혼했다. 1916년 5월 동대문 앞 도로가 확장되면서 영덕철물점 자리까지 도로에 들어가자 확장된 도로가의 창신동 487번지를 세내어 영덕철물점을 옮겼다. 철물점을 운영하면서도 1916년 한훈, 유장열 등과 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 기습작전에 참여하여 반민족 분자 2명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1917년 28세 때 영덕철물점에서 일본상품 배척과 민족경제운동의 일환으로 말총 모자를 제조 판매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양말과 장갑 등도 제조 판매했다. 이 시기 직공이 50여 명이나 될 정도로 번창하여 당시 돈으로 1~2만원(현재 화폐가치로 1~2억원)의 여유자금을 갖고 있었으며, 영덕철물점 뒤편 경성부 소유지를 빌려 공장과 말들이 대기하는 마방(馬房)을 확장했다. 직공들을 위하여 공인조합을 만들어 직공들을 보호하고, 일본어 사용 금지, 금주 금연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업조합을 조직하여 일본 상권에 대항하여 경영주들의 결속을 다졌다. 또한 이종소, 임용호, 김동계, 손정도 목사 등과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여 사회계몽과 인재양성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해 12월 다시 도로가 확장되면서 영덕철물점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게 되자 집주인으로부터 임차한 철물점 부지 중 도로에 편입되는 16평을 제외한 127평을 매입하여 2층 건물을 신축했다. 이 건물은 동대문에서 지금의 신설동으로 통하는 거리에 들어선 최초의 2층집이었다. 1층 바깥채는 농기구 판매와 마차 제작, 편자 박는 작업장으로 썼으며, 2층은 중국 요리점 동춘원에 세를 주고, 작은 방 하나는 사무실 겸 독립운동 본부로 사용했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이날 오후 철물점 문을 닫고 직원들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주어 만세시위에 참여시킨 후 자신도 탑골공원에 가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또한 손바닥에 불 화(火)자를 써 가지고 펴 보이며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 지른다”고 하면서 상인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그날 오후 동대문 근처에서 일본 순사에게 쫓기는 여학생을 구출하고 일본도를 노획했는데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1919년 4월 1일 후배 학생들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 모여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혁신공보』를 발행했다. 그해 8월 『혁신공보』를 추적하던 일본 경찰에게 붙들려 40일 간 구금되어 혹심한 고문과 추궁을 당했고 기소되었다. 혁신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동지 박노영과 김봉신을 상해(上海)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임시정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실망스러운 보고를 받았다.
1920년 1월 하순 김상옥과 혁신단 동지들은 혁신단 진로를 논의한 끝에 『혁신공보』 발간보다 일제를 직접 공격하여 타격을 가하는 강력한 투쟁, 즉 조선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으로 방향을 재정립하고 암살단을 조직했다. 이 시기 만주 김좌진(金佐鎭)의 길림군정서 요원인 김동순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파견되어 길을 찾던 중 암살단 조직원과 만나 김상옥 조직과 결합하고, 김상옥은 군자금을 지원했다. 그해 3월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 하에 무기를 갖고 입국한 광복단 충청지구 결사대장 한훈을 만나 무기와 폭탄을 확보하고, 이들과 연합하여 5월에 정식으로 암살단을 발족시켰다.
이후 6월에서 8월까지 암살단원들은 북한산 등지에서 사격을 비롯한 특공훈련에 돌입했다. 이때 사격을 연마한 김상옥은 일등 사수가 되었다. 암살단원들은 8월 24일 미국 상하의원단 42명이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을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관들을 처단하고 총독부를 폭파하며 일대 시가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윤익중과 김상옥은 각자의 집을 저당하여 각 1천원과 2천원의 거사자금을 만들었고, 박영효 등 사회 저명 인사들과 박승직 같은 동대문지역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 무기와 트럭 3대를 확보했다.
암살단의 계획은 먼저 미의원단 환영 인파 속에 섞여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선도하며, 「암살단 취지서」와 상인들에게 주는 「철시경고문」을 배포하고, 트럭 1대는 폭탄과 폭약을 싣고 종로 2가에 대기하다 조선총독 이하 고관들을 습격 처단하고, 다른 2대에는 사격대를 태워 출동병력과 장시간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8월 24일 오전 11시에 한훈이 권총과 실탄을 가지고 오면 오후에 그것을 집총대(저격수) 이윤기와 서대순에게 전달하여 임무를 실행하는 것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거사 당일 오전, 일본 경찰이 예비 검속 차 김상옥 집에 들이닥쳤다. 자신이 예비 검속 당하여 일시 구금되면 계획 차질이 불을 보듯 하자 2층 창문을 통해 피신했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사무실로 쓰던 2층 방을 수색하여 「암살단 취지서」, 「암살단 명부」 등 문건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곧 이어 총과 탄환을 전달하러 온 한훈이 포박 당했다. 그리하여 몇 개월간 준비해 왔던 거사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3개월간 서울 시내 각처를 돌며 은신했는데, 그 기간 동안 김동순 등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갔다. 자신에 대한 수사망이 좁혀 오자 동지 유득신에게 해외 탈출 자금을 구해 오게 하여 중국 펑텐(奉天, 현 선양(瀋陽))으로 피신했다. 김상옥은 궐석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그해 11월 의열단원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최경학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사건을 지원하고, 1921년 1월 김원봉의 의열단 재조직에 참여한 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같은 해 7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과 협의하여 임시정부 자금모금과 서울의 여성 동지 장규동의 망명을 꾀하고자 다시 국내로 몰래 들어왔다. 서울, 충청, 전라 등지에서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금한 후, 김상옥의 활동을 돕다 고문을 받아 심한 병중에 있었던 여성동지 장규동을 대동하여 상하이로 탈출했다(제3차 망명). 이듬해인 1922년 4월 상하이에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 10일 여성동지 장규동이 건강악화로 사망했다. 김구(金九)가 장례식을 위해 관을 사라고 돈을 주었는데, 그 돈으로 일본에 복수하기 위한 권총을 사와 주변을 놀라게 했다.
1922년 12월, 일제와 단판 승부를 위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협의하고, 안홍한·오복영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했다. 도중에 여비를 도둑맞아 안홍한만 대동하고 세 번째로 압록강을 건너왔다. 서울에 들어와 암살단 동지를 재규합하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 처단, 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2월 7일 삼판통(현 후암동) 304번지 매부 고봉근의 집을 거사를 위한 은신처 겸 한당 서울혁명사령부의 본부로 삼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적고 남대문 역과 가까워 조선총독이 일본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남대문 역에서 출발하는 때를 살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의 계획은 이전의 미의원단 방문 때의 거사 계획보다 더 규모가 컸다. 첫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비롯한 일본 고관은 물론 친일 반역 조선인 경관들을 모두 숙청한다. 둘째, 관공서, 관저 등을 대거 불사르고 수도국, 전화국, 전기회사를 폭파한다. 셋째, 애국 군중을 동원 재편성하여 각 관공서와 경찰서를 접수한다. 이것이 그가 계획한 ‘단판 승부’였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종로2정목의 경찰서 서쪽 창문을 향해 던진 폭탄이 폭발하여 폭음이 종로거리를 뒤흔들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근처를 지나던 매일신보 사원 5명과 기생 한 명, 어린이 한 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상하이 『독립신문』은 일본 경찰 3명을 포함하여 1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 탄압의 본거지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중 1월 21일 동지 전우진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은신처가 발각 되었다. 일본 경찰은 1월 22일 새벽 군경 1,000여 명을 동원 효제동 이혜수 집 주변을 4중으로 포위했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효제동 여러 집들의 담을 넘나들면서 3시간여 동안이나 혼자서 지붕위와 담벼락 등에서 공격해 오는 일본 경찰을 항해 총격전을 벌여 16명을 사상케 했다.
그러나 탄환이 다해 가자 상하이를 떠나오면서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처럼,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34세, 그곳 효제동 72번지는 그가 태어난 집이자 순국 장소가 되었다. 일본 경찰들은 열흘 동안 계속 신출귀몰한 김상옥에 혼비백산해 온지라 두 손에 권총을 쥐고 벽에 기대선 채로 숨을 거둔 그의 죽음을 감히 다가가 확인하지 못하고 어머니 김점순을 불러와 사망 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유해는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
일본은 이 사건이 민심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1개월 20일이나 보도통제하다 일반의 관심이 식어질 즈음에야 해제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즉각 3월 15일자로 양면에 걸쳐 전면호외를 발행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단신으로 수백 명의 무장경찰과 3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인 예는 일제 35년 동안 전후무후한 일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김상옥 의사의 장렬한 죽음이 알려지자 1923년 2월 17일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3월 1일자 『독립신문』에 그의 생애와 장렬한 서거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인 1948년 10월 6일 김상옥열사기념사업협회(고문 김구, 이시영, 협회장 조소앙)가 창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문동 공동묘지의 묘소는 가족과 지인들의 잦은 성묘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의 강압으로 화장하여 집에 모셨던 것을 독립유공자 포상과 더불어 국립묘지로 모셨다. 김상옥 의사의 의거를 도왔던 가족들-어머니 김점순, 매부 고봉근, 동생 김춘원도 각각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1998년 5월 28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김상옥 열사의 동상이 건립되었고, 2010년 7월 2일 인의동 종묘 동쪽 창경궁로 접점에서 종로 6가 율곡로 동대문 방향 접점 도로를 김상옥로로 명명했다.
/ Daum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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