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졸작수필]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 명륜동, 내 놀던 옛 동산에 올라 (2019.07.31)

푸레택 2019. 7. 31. 17:28

 

 

 

 

 

 

 

 

 

 

 

 

 

 

 

 

 

 

 

 

●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 명륜동, 내 놀던 옛 동산에 올라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친구들과 함께 대학로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병원 대한의원 의학박물관(醫學博物館)을 탐방하였다. 탐방을 일찍 마치고 명륜동에 볼 일이 있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명륜동(明倫洞)은 내가 유년 시절부터 20년 넘게 살았던 정든 동네다. 나는 언제나 명륜동에 가면 성균관대(成均館大)로 들어가는 큰길로 들어서지 않고 작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그 골목길은 유년 시절 옛 추억이 서려있는 길이다.

 

나는 일곱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칠곡 인동 고향(故鄕) 마을을 떠나 서울로 왔다. 경상도 깡촌 시골마을에서 비록 변두리 산동네이기는 하지만 서울로 이사를 온 것이다. 친구들로부터 사투리를 쓴다고 놀림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골 촌놈이 우리나라 수도 서울로 이사를 왔으니 이것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轉換點)이 된 사건인 셈이다. 그러나 서울이라고 해도 6.25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채 안 된 시절이었으니 산동네에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의 삶은 곤궁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 시절 친한 친구와 나는 성(城)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친구는 성 밖에 살았고 나는 성 안에 살았다. 내가 뛰놀던 명륜동 산동네 비탈길을 조금만 오르면 성곽과 잇닿은 조그마한 성터마당이 나타난다. 그 성터마당 옆에 있는 성곽의 돌 밑 좁은 암문(暗門)을 지나면 바로 친구의 집이 있는 성북동 산동네다. 지금은 친구가 살았던 성 밖의 마을을 북정마을, 내가 살았던 성 안쪽 마을을 명륜마을 이렇게 멋진 이름으로 부르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그냥 성북동 산동네, 성균관대 뒤 산동네에 산다고들 말했다.

 

명륜동 산동네에서 초·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 시절을 보내고 결혼하여 큰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살았으니 내 인생의 젊은 시절을 이 산동네에서 보낸 셈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20년 넘게 명륜동에서 살면서도 명륜동(明倫洞)이라는 동명이 조선시대 성균관에서 유생들이 글을 배우는 명륜당(明倫堂)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또한 친구네 집에서 비탈길을 조금만 내려가면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에 거처한 심우장(尋牛莊)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자랐다.

 

내가 살았던 명륜동 산동네는 지금도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아파트가 들어설 수 없는 제한 구역에 묶인 때문이라고 한다. 단층집들이 이삼층 건물로 높아진 것을 빼고는 신작로(新作路)도 골목길도 예전 그대로다. 친구가 살았던 성북동 산동네는 더욱 변화가 없다. 여전히 낮은 지붕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미로(迷路) 같이 꼬불꼬불하고 좁은 골목길에는 집집마다 기르는 화초가 놓여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낮잠을 즐기고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경로당(敬老堂)과 산동네 꼭대기까지 운행하는 마을버스가 생겼다는 정도이다.

 

정겨운 사람들 모여살던 산동네, 오랜만에 찾아가 본 동네엔 여전히 할머니가 조그만 구멍가게를 지킨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니 귀가 어두우신지 세세한 말은 알아듣지 못하신다. 내가 살았던 집 바로 옆집에는 오십년 넘게 이곳 명륜동 산동네를 지키며 살아가는 옛 친구가 있다. 문을 두드리니 반갑게 맞이한다. 그도 이제 정년을 하고 집에서 쉰다고 한다. 두런두런 옛 이야기를 하며 추억(追憶)을 더듬는다. 동생 친구인 철이네 집은 저기였고 영태네 집은 저기였고 승만이네 집은 저기였고 하는데 이름만 가물가물 생각날 뿐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젊은 시절, 오직 공부에만 몰두(沒頭)하느라 동네 동생 친구들 하고 어울려 놀지 못한 그 시절이 가슴 아프게 떠오른다.

 

명륜마을 성터마당에 오르니 서울 시내가 다 내려다 보인다. 어린 시절 이 성터마당을 얼마나 많이 올랐던가. 오늘 다시 옛 성터에 올라서니 산천(山川)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고 노래한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리움 접어두고 그저 멍하니 성 너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곳은 언제 찾아와도 느긋하고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흐른다. 때론 이렇게 느릿느릿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것이 행복(幸福)이다.

 

북정마을에는 빨강 파랑 노랑 예쁜 색깔의 기와지붕을 한 집들이 많이 눈에 띤다. 문득 올해 초 여행을 다녀온 부산의 감천(甘川)문화마을이 떠오른다. 감천마을은 전쟁 피난민들이 모여살던 산동네였는데 이제는 관광객들로 북적되는 마을로 변신하였다. 이곳 북정마을도 공동체를 이루어 지붕과 벽을 조금 더 아름답게 꾸미고 작은 미술관이나 전시관, 체험장 등 곳곳에 볼거리 있는 마을, 테마가 있는 마을,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마을로 거듭 태어나면 감천문화마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사랑하는 마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니 명륜마을과 북정마을은 어쩌면 그냥 이대로가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떠들썩한 관광객들이 찾아와 북적대는 북촌(北村)이나 서촌(西村)과 달리 내 마음의 고향 동촌(東村) 명륜마을은 가난한 마음들 찾아와 따뜻한 정을 느끼고 위로 받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상처 받은 마음들 조용히 찾아와 사람 살아가는 냄새를 맡고 마음이 치유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움에 잠 못 드는 외로운 영혼들이 찾아와 또 다른 그리움을 만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목마른 대지에 단비가 온다. 마음 아픈 이들에게도 단비 같은 기쁜 편지(便紙)가 전해지기를.

 

/ 김영택 2019.07.31(수) 씀